불완전하지만 의미있는 ‘역사 정리’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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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평】

불완전하지만 의미있는 ‘역사 정리’의 첫걸음
- 친일파 재산 환수 문제에 관하여-

정태헌(근대사 2분과)

  1. 친일파 재산 환수 발표

친일파 문제는 대한민국-국가의 내용을 채우는 주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아우른 역사관이 함께 녹아있는 소재다. 다 끝난 바둑도 복기를 통해 점검하듯이 더구나 새로 건국하는 마당에 남의 나라 지배를 40년 가까이 받아야 했던 경험과 유산을 정리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건국 직후 반민특위가 와해된 이후 친일 문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잊혀진 대상이 되었다. 1966년에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발표되어 관심을 불어일으키기는 했지만 학계에서 연구가 일기 시작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물론 친일 문제가 여전히 학계의 본격적인 천착대상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 시기 들어 친일 문제가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출범은 그 반영이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 관련 위원회 조직은 권력 내부의 정치논리가 개재되어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더라도 큰 틀에서 제도적 민주화 과정의 한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끝에 2006년 7월 13일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 송병준, 권중현, 고희경 등 9명의 명의로 되어 있거나 그 후손이 상속 증여받은 땅 154필지, 7만 7108평(공시지가 36억원, 추정시가 60억원)을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한국현대사에서 ‘역사적인 일’인 이 결정에 대해 연좌제다, 일제 지배 하에서 친일파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 너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대체로 일반 여론은 지지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친일문제에 유독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보수언론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5월 2일 결정에 크게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같다.

무엇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재산환수 대상이 되는 친일반민족행위 범주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로 범주화한 20가지 가운데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찬의와 부찬의 포함)로 활동한 행위만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ㆍ처형ㆍ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자 등 친일의 정도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인정된 자가 포함되어 있다.

해방 60년이 넘은 뒤에야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조사 대상은 기본적으로 제한적이다. 더구나 매매 등으로 소유권이 후손이 아닌 제3자에게 넘어간 경우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2. 친일재산 환수 발표의 역사적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표는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해방 직후 이뤄져야 했던 친일파 처리 시점을 놓친 오늘의 상황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채우는 과정이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건국 이후 사실로 증명해주고, 이완용의 후손이 소송을 해서 자기 땅을 찾아가는 국가의 내용을 새로 채우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는 또 건전한 보수세력의 정착에도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내실있는 보수세력의 정착은 진보세력의 내실화에도 기여한다. 일제시대 이래 한국의 보수세력을 흔히 민족주의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국제주의에 대칭하여 민족주의=반사회주의라는 당시의 관행화된 용어가 분단과 더불어 고착된 결과였다. 한국의 지배그룹으로 재편된 친일파들의 이념은 반공이라기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북이었다. 독자적 이념으로 서기보다 북한이라는 적대적 체제가 존재함으로써 정체성을 찾는 범주였다.

민족주의적이었다는 근거는 사실 박약하다. 반북논리에 의존할 뿐 반공에 조응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반세기에 걸쳐 대한민국의 내용을 채우고자 한 세력은 민주화운동 세력이었다. 하여간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작업 이후 친일 문제의 거론은 빨갱이로 몰리는 분위기까지 형성되면서 친일 문제는 완전히 덮어졌다. 기존의 한국사 연구가 친일:반일의 구도로 이루어졌다는 과잉비판과 달리, 이후 친일 문제는 사실상 1980년대까지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

반북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한국의 자칭 보수우익세력은 일본의 극우세력과도 손을 잡는다. 무릇 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게 마련인데, 유독 한국의 민족주의가 그렇지 못한 것은 역사적 연원 때문이다. 가령 이영훈 등이 주장하는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은 대한민국을 운위할 역사인식의 밑천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운위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합세한다. 지적 사기행위인지, 한 편의 코미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일부 조류를 보면 일본의 우경화를 탓할 수만도 없다. 스스로 정리할 줄 알아야 남에게도 정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친일파에 대해 책임을 묻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다양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대부분 사망한 가운데 이뤄지는 친일파 청산작업은 제한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가운데 재산환수는 극히 제한된 책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재산권에 국한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다. 굳이 개념화하자면 친일행위로 취득한 재산 가운데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국가권력의 환수조치로 제한적인 법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상징성은 극대화된다.

이와 더불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성과는 정치적 책임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는 자칭 보수세력에게 자기갱신을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수세력들이 친일파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제시기를 살았던 일반인의 삶에서 도덕적 책임을 제기함으로써 시대에 대한 총체적 정리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리는 시대의 산물이므로 이후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꾸로 묻게 되면 질문 자체가 희화화된다. 나치시대의 일상사 연구를 한국사에 직대입하는 데서 나타나는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3. 내용 채우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국가의 중요성

친일파 문제를 둘러싸고 피곤하고, 때로는 해악하기까지 한 현학이 오고가곤 한다. 다시 한 번 상식을 되내여보자.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자유주의자건, 아나키스트건, 포스트 모더니스트건 가릴 것없이 분명한 것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구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태고 적부터 그랬다. 누구든 크던 작든 공동체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공동체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형성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이러한 원초적 환경 단위를 넘어 개인의 선호에 따라 명목상 얼마든지 가입 탈퇴가 자유롭지만 다양하고 때로는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각종 동우회, 동향회, 동창회 등 사적인 친목모임이 많아졌다. 구성원들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규범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고 동의한다. 그리고 국가라는 강력한 억압체의 존재에 이르러 법으로 신체적 또는 재산적 강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 응당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구도 이 사실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이러한 범죄에 대한 처벌은 공동체의 유지 자체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모순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동체가 개인을 침해하기도 하는 권력을 수반하기 때문에 응징과 처벌이 가능하다. 공동체의 존재 또는 그에 따른 규범은 구성원인 개인의 존엄성이나 주체성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을 수반하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억압하므로 공동체를 없애야 한다는 추상적인 선언만으로는 무의미하다. 그러한 주장의 방향 설정이 잘 못 되면 구성원에게 해악까지 미친다.

이러한 충돌 영역은 권력체를 없애자는 선언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면서 공동체-국가의 내실을 채워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줄어드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과정에 대한 고민이 사상된 채 주장되는 권력해체론은 이들이 권력해체를 주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민주화투쟁을 무화시켜 수구집단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실제로 작금의 현실이 그러하다.

개인이 공동체-국가를 통해 규정되는 모순은 결국 지양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개인과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종단위가 결국 국가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논의는 철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민주화의 진척 정도를 가늠하는 일차적인 기본 범주도 국가 단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민주적 의식은 국가 범주에서 내실이 이뤄진 가운데 국제적 범주로 확산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만 민주적 의식의 세계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출처 : 한겨레 신문>

해방 후 헌법에 규정된 보통선거제를 미국의 영향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대주의적이고 비주체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일제 하 민족운동 세력들은 좌우를 떠나 건국의 방식으로서 이미 보통선거제를 규정했고 실제로 해방 후 실현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에서조차 보통선거제(25세 이상의 남자)가 이뤄지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그나마 유일한 정치적 출로역할을 하던 지방의회조차 (피)선거권은 상층유산층에 국한되었다. 식민지 지배를 일정하게 또는 전면적으로 수용한 부르주아나 근대주의 세력은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다. 내용을 채우는 것은 지난한 투쟁과 시간을 요구하고 그 구성원의 몫이지만, 구성원이 소속된 국가를 갖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만큼 중요하다.

국가간 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그보다 종속적이지만 민족간, 종족간, 인종간 차별은 더 두터운 벽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연구에서는 한 세기 전 나라를 잃은 상황을 두고 억압체인 국가의 소멸로 치부하는 철없는 경향까지 보인다. 반면에 나라를 빼앗은 더 강한 국가-더 큰 억압체에 대한 비판의식은 무디다. 철없음은 사고의 불균형을 낳아 당연히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은 비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에도 만연한 국가간 차별을 이미 한 세기 전의 상황을 두고 혼자만의 관념 세계에서 극복한 것이다. 언제가 될른지는 모르지만 억압체인 국가를 없애고 말그대로의 공동체 형식으로 대체하는 일도 해당 구성원이 일구어야 한다는 상식은 없다. 그러니 결론은 엉뚱한 데로 간다. 한 국가를 강점한 다른 한 국가(권력체)나 그 구성원들이 강점된 국가의 구성원들을 보는 인식은 불보듯 뻔한 사실에 반하는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의 유희가 횡행하는 것이다.

4. 다른 문화의 공존과 존엄을 추구하는 민주화

그러면 친일파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대상에 대해 차별적으로 명확한 규정과 그에 따른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묻는 과정은 한국현대사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아 있다. 즉 개인적 영달을 위해 공동체-국가의 소멸에 기여하고 일제가 이에 투쟁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조력한 존재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 중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인을 위해서도 조선인이라는 의식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현영섭처럼 적지 않은 자발적 ‘내선일체’론자들의 논거는 사실 ‘신념’에 입각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더 이상 ‘내선일체’를 외치지 않았다. 혹자는 이들의 주장을 복잡한 논리로 설명하려 애쓰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른 곡학아세에 불과했다. 물론 일본 역시 패전과 더불어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수사어였던 ‘내선일체’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다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실의 반영이었다. 진실의 핵심은 단순명료하다. 객관적으로도 조선은 연합군의 적국 일본이 강제점령한 곳이었을 뿐, 패전 이전에 일부 지식층들이 관념의 착각 속에 외쳐대던 또 다른 일본-‘외지’가 아니었다.

한 국가-공동체 구성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정체성은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와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 민주화 역시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이 범주는 대개 국가 단위로 이뤄진다. 국가 범주에서 이뤄져가는 민주화는 한 걸음 나아가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만들어낸 문화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범주가 넓어지면서 세계화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속한 민족, 즉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국가가 폭력적으로 소멸, 흡수된 상황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물론 민주화가 이뤄진 곳은 찾기 힘들다.

다른 경우이지만, 한 재일동포의 고백은 시사점을 준다. 속 뒤집어지게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일본에 사는데 차라리 귀화하고 일본인으로 사는 게 낫지 않나?” 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침략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쩌다 일본 땅에 살게 된 내가, 내 부모가, 내 형제가, 내 친구들이 이제까지 조센징이라고 차별받으며 살아왔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부터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당신이라면 당신을 버리고 그리 할 수 있겠나? 그러면 행복지겠나? 다른 거 다 떠나 내가 마음 편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리 하겠다.” 귀화한 사실을 숨긴 채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성은 정체성과 다른 것을 존중하는 상대화 과정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실현된다. 이 과정을 통해 민주화 영역도 넓어진다. 양성평등은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성이 될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사실은 권력우위자인 남성의 인식이 깨어) 성의 차이를 존중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5. 인륜의 문제인 친일파 문제

친일파 문제는 민족과 국가-공동체에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을 넘어, 개인의 인권과 생명을 짓밟는데 동참하면서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행위였다.

친일파들은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없애는데 일조하고, 나라의 주권을 찾아야 한다는 투쟁을 진압하는데 일조하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민족말살을 자행했다. 이토록 열심히 나섰지만 공동체와 다른 조선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없다. ‘내선일체’는 커녕 중요한 형식요건인, 일본에 속한 한 지방으로서의 조선의회조차 없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은 모두 일제가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여건조차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이 도발한 전쟁을 ‘성전’이라고 부화뇌동하면서 전쟁에 협력하고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이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일제 때 군수를 지냈던 이항령이나 아버지인 파인 김동환을 대신하여 참회의 뜻을 보인 아들처럼 당사자나 후손이 자성을 보인 경우는 귀하게 여겨야 할만큼 오히려 특이한 사례에 속한ㆍ다. 친일 관련 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위원회를 방문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후손들 가운데 선대의 친일행위를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애국자이고 훌륭한 일을 한 분이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제 때 정리가 되지 못한 채 기득권이 기득권을 낳아 체제화하면서 강변의 논리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통용되는 사회가 된 반영이다.

일제 지배 하에서 친일파 아닌 자 누구냐는 식의 물타기 논리는 물론 친일 문제를 논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발상이다. 그러나 단독범이 아닌 한 모든 범죄에 주범과 종범이 있다는 상식을 되돌아보면 답은 간단하다. 하루하루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을 한 자와 이를 주도한 자는 엄연히 다르고 책임도 다르다. 결코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다.

나치청산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당 수준 진행된 가운데 심층적 나치청산의 방법론을 한국사에 거꾸로 적용하면서 일상사 또는 생활사가 보검이듯 생각하는 한 서양사학자는 “학살, 고문, 인권유린, 인종차별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거스르는 반인륜적 행위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이라는 특수한 가치에 반하는 부역행위를 청산대상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명분있는 일인지“를 따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 학자가 전자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양자를 분리하는 문제의식 자체나 3.1운동 이후 식민체제가 유지된 것은 한국인들이 그런대로 일상의 삶을 유지하고 만족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는 점이다. 민족운동은 안중에 없고 친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다. 친일의 실상이 밝혀지고 규명되어야 관용과 화해를 할 것 아닌가? 전시체제하 강제동원과 수탈도 안중에 없다. 국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인식틀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있게 된 것은 친일파가 온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차라리 솔직하게 지금까지 계속 한반도가 일본의 한 속주로 있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게 낫다.

누가 대한민국의 내용을 채우고 ‘정통성’을 채워갔을까? 해방 이후 1980년대에 이르는 과정은 민주화의 제도화를 향한 투쟁 국면이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 국민들이 국가건설이나 자본축적을 위해 민주화 과제를 미룬 것이 아니라, 당시 국내외의 정치 사회적 조건과 외삽적 성격이 강한 분단국가권력의 무단적 통치가 국민들을 일방적으로 억압한 결과였다.

그러나 무단적 통치가 지속될 수는 없었다.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민주화 의식이 확산되어 파쇼적 억압만으로 통치 유지가 어려워졌을 때, 권력은 경제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독재체제나 불법 장악한 권력의 정당성을 과시하려 했다. 즉 민주화는 제도화되기 이전에도 그러한 요구가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권력이 그에 조응하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결국 사회적 생산성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민주화는 경제성장이 달성된 후에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소득이 얼마, 가령 7천 달러가 되는 때부터 민주화가 시작된다는 계량적 수치도 결과의 현상을 주목한 것에 불과하다. 그 이전의 고난에 찬 과정과 내용을 간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