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해방 후 조만식의 활동과 운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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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만식의 활동과 운명(2)

 

갈등을 받아 안으면서

 해방 후 몇 달간 북한에서의 민공간의 합작은 비록 잡음이 적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조만식측과 공산측의 관계가 악화될 조짐을 보인 것은 건국문제를 둘러싼 이견 때문이었다. 조만식은 외국군 철수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데 반해, 김일성측은 연합국의 입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로 인해 양자간의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만식은 김일성을 만나 “북조선 각도가 조선 정부 창설에 참여하고 중앙정부는 12월 이전까지 수립되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감정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때까지 정부가 수립된다면 미소 정부에게 남북조선에서 점령군 철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 제의에 동의하지 않자 조만식은 측근들을 통해 그가 통일을 방해하고 있고 붉은 군대를 위해 일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바야흐로 김일성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적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공산측이 조만식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소련군 지도부의 평가에서 그는 “소련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아직 불명확”하다는 아쉬움은 드러나 있지만 북한에서 김일성, 박헌영과 더불어 가장 지명도가 높다고 지적되었다.

공산측과 조만식 간의 협력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결정에 의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한국임시정부의 수립과 4대국에 의한 5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를 주된 내용으로 한 모스크바 결정 실행은 결과적으로 보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했다.

조만식의 입장은 공산측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당장 모스크바 결정에 신탁통치 조항을 들어 찬성을 유보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이 공산측을 매우 긴장시켰음은 물론이다. 공산측은 일찍이 제기된 민족통일전선 노선에 따른 권력 구도와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향후 수립될 한국임시정부 내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도 북한 민족주의자의 수장인 조만식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몰락

1946년 1월 4일 모스크바 결정을 논의하기 위해 조만식이 위원장으로 있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민공 양측 간부들과 소련군측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만식은 미소사령부 대표가 회담을 통해 모스크바 결정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그  결정을 수용하지 말 것을 언명하였다. 회의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는데, 조만식은 계속해서 “내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모스크바 결정에 찬동할 수 없다”고 완강한 입장을 굳히지 않았다. 결국 회의는 어떠한 결실을 보지 못하였고, 소련군당국은 그를 연금할 것을 결정하였다. 곧이어 조만식은 따르던 민주당 부당수 이윤영(李允榮) 등은 남한행을 택했다.

하지만 공산측은 이후에도 조만식의 입장 변화를 위해 지속적인 ‘인내심’을 보였다. 소련군 당국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한국(조선)임시정부의 ‘대통령’직까지 제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를 맡은 스티코프도 1946년 2월 초 그를 찾아가 설득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스티코프와의 면담은 소련측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완전히 포기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공산측은 북한 사회에서 조만식의 영향력과 잔재를 씻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에 전개하였고, 이에 부합되게 그는 ‘반민주주의자’의 대명사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조만식이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완고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은 분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시사점을 찾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 조선 신탁에 대한 모스크바 회담 결정이 나에게는 분명하지 않다. 이밖에도 김구를 포함한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의 저명한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반탁운동이 개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그는 모스크바 결정 자체에 대한 단호한 반대 입장보다는 남한에 있는 ‘동지’들의 반탁운동에 더욱 유대감을 표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후일 그의 입장이 극적으로 변화되는 대목을 보면 더욱 그렇다. 남쪽과의 연대를 중시했던 그로서는 강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당장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모스크바 결정이 그나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만식의 몰락은 단순히 해방 후 3대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따르던 상당수 북한 민족주의세력의 몰락임과 동시에 북한 내에서 그가 대표하는 ‘자본주의적’ 주장이 사실상 힘을 잃었다는 것을 뜻했다. 조선민주당은 곧이어 부당수이자 김일성의 동료인 최용건의 지휘하에 ‘친공’ 정당으로 개편되었다. 소련과 북한공산당 지도부가 이후 급진적인 정치사회적 개혁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 속에는 그의 몰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공산측과의 협력을 지속하였더라면 그 후에 전개될 한반도의 운명은 이후 나타난 결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심경의 변화와 최후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조만식은 북한의 급격한 변화를 목도하면서 연금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밀사를 통해 미군정 및 우익지도자들과의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해방 후 외세란 미국과 소련을 지칭할 수 있는데, 그에게 이 두 나라는 동일하지 않았다. 소련에 대해서는 반감이 큰 반면, 미국과는 상호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지는 않았다.

외부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1947년 7월 1일 제2차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때 정국에 대한 조만식의 견해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미국대표단장 브라운에게 미국에 의해 신탁통치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불가피하다면 미소양국에 의한 신탁통치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운동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였다. 이는 그 자신의 종전 주장과 비교해 볼 때 놀라운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조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반탁운동에 대한 자신의 지지 입장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또한 그는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임시정부 수립이전에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만식의 태도 변화는 ‘반쪽’의 분단국가보다는 신탁통치가 실시되더라도 통일국가로 가야한다는 신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만으로 가시화되고 있던 분단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그의 연금생활은 북한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직전 북측은 남한 형무소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 이주하와 조만식을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쟁을 앞두고 남로당의 고위급 지도자들을 구해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측은 조만식 우선 송환을 주장하는 등 교환 문제 해결에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전쟁이 발발하여 조만식의 생사는 전적으로 북측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게 된 북한지도부는 조만식을 비롯한 ‘반동분자’들을 총살하였다. 한평생 영욕의 세월을 살아온 ‘조선의 간디’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