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토착 질서를 뒤흔든 ‘혁명’, 토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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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질서를 뒤흔든 ‘혁명’, 토지개혁

토지개혁, 그 필요성과 계기는

 

8.15 해방 후 절대 다수의 농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토지개혁을 통한 일제시대의 모순된 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북한에서 더욱 첨예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북한 인구의 80%는 농민이었고, 그 중 80%는 소작농과 빈농이었다. 더욱이 전체 농가의 4%에 해당되는 지주들이 부침땅 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업에서의 봉건적인 질서 타파는 사회경제적 개혁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며, 모든 정치 세력은 절차와 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토지개혁은 전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과제였기 때문에 남북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전국적 차원의 정부 수립 이후에 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각 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토지 소작료 율을 60~70%에서 30%로 줄이는 이른바 3:7제를 임시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문제 결정(앞의 글 참조)으로 조만식 등 민주당 우파 수뇌부가 퇴장하고, 좌우세력이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등 한반도 정세가 긴박해지자 공산측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른바 북한의 민주적 근거지를 강화시켜 전한반도 차원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민주기지론’의 발상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 출발은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위)의 수립이었다.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임위는 좌우세력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공산측이 확고한 주도권을 쥔 채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바로 북임위는 출범과 함께 토지개혁을 자신의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논란과 시행

1945년 말부터 공산측은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였다. 초창기에 공산측에 의해 구상된 토지개혁안들은 지주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지주의 토지 몰수 범위를 40정보 이상을 소유한 자로 규정한다든지, 동유럽 국가의 실례를 적용하여 유상몰수를 실시하고 몰수된 토지는 인민위원회의 관리하에 20년간 분할 상환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넘기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 보다 엄격한 법령안에 따르더라도 조선인 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 규모는 10정보 이하를 소유하는 지주의 경우 5정보 초과분을, 10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전체 토지를 몰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초기 토지개혁 구상은 상당히 온건한 방향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 결정으로 인한 정세 변동은 북한만의, 그것도 매우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예고하였다. 1946년 2월 21일자로 작성된 법령안은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 토지를 몰수할 필요가 있으며, 몰수된 토지는 국유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토지국유화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농민 대표들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이 법령은 일본인토지 소유와 조선인지주들의 토지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된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넘기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 법령안은 북한 내부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2월 24~26일 간에 열린 농민대회 분과 회의에서는 다수의 찬성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가혹성’이 지적되었다. 3월 5일 법령 공포일에 열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회의에서조차 일부 비공산계 위원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토지개혁 법령이 봉건제도의 철폐에 맞추어졌고 자본주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법안은 채택되었다.

한 가지 쟁점은 ‘토지의 국유화’ 주장이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농민의 소유’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북한과 소련지도부가 농민들의 보다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 그들의 토지소유 욕구를 고려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농민의 토지 소유를 규정한 동구국가들의 개혁 경험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법령은 토지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였으나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경리를 억제할 목적으로 토지의 매매, 저당, 소작을 금하도록 하였다.

토지개혁은 3월 7일부터 4월 1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토지개혁을 실무적으로 담당한 것은 농촌에서 빈농과 농업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된 농민위원회였다. 농민들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 나서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 전체 토지 면적은 182만 98 정보였는데, 그중 55.4%에 해당되는 100만 8,178정보가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 이주한 지주 등에게 평균 1.35정보씩 분배되었다. 즉, 총 농업호수 112만 가운데 토지분배를 받은 농가 수는 72만호로 약 70%가량이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았다. 몰수된 토지 가운데 일부 – 18,935정보(1.9%) – 는 인민위원회가 직접 관리하게 되어 장래 국영농장 형성의 기초를 이루었다. 소작제가 철폐된 대신 농민들은 ‘현물세법’에 따라 수확 농작물의 25%를 납부하여 인민위원회 재정의 밑거름을 이루었다.

 

‘혁명’의 영향

 

북한의 토지개혁은 의도한대로 농촌에서의 봉건적 관계를 철폐할 계기를 만들었지만 반면에 지나치게 급진적 성격을 띠었다. 애초 일본인 지주나 친일 지주들의 토지만을 몰수하려던 것이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모든 지주로까지 그 범위가 넓혀지면서 상당한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다. 7만 호의 지주 가운데 4천 호만이 농민과 동등하게 토지를 분여 받는 것에 동의한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의 거부감은 예고된 것이었다.

지주와 민주당 출신 일부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업무 수행을 거부했고 평양과 함흥 등지의 학생들은 동맹시위를 도모하였다. 반대세력은 테러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최용건 암살 미수 사건, 강양욱 家에 대한 테러 등은 우익반대세력의 북한 지도부에 대한 대표적인 물리적 저항이었다. 하지만 우익세력들의 저항은 사태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의 힘은 분산적이었고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에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했다. 따라서 이들의 선택은 ‘잠재적인’ 반대자로 남아 기회를 엿보거나(한국전쟁 시기 수많은 민주당원들이 남쪽 편으로 돌아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남한으로 도피하여 철저한 반공교두보 확보에 나섰다. 토지개혁이 실시된 1946년도 남한으로의 도피자 수는 다른 연도에 비해 훨씬 많았다는 것은 이 개혁이 끼친 사회적 파급력을 입증해 주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되었으며, 다른 유산계층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향후 ‘민주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특히 토지개혁은 북한의 지도자로서 김일성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토지개혁 법령 발표 이전에 1개월 이상 지방을 순회하면서 농촌사정을 살필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쏟았다. 토지개혁의 전 과정과 그것의 성과는 김일성의 이름과 직접 결부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해방 후 시행된 최초의 민주개혁 조치이자 동시에 식민지 질서로부터 북한 사회의 근본을 뒤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구질서의 수혜자들이 대거 물러나고 새로운 지배세력의 기반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 또한 공산측의 입장에서 토지개혁은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은 여기에서 직접 피해를 당한 지주세력과 그들의 영향하에 놓여 있던 다양한 계층들에게 북한체제에 대한 경계심과 이질감을 심어주어 애초 북한지도부가 의도했던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결합된 민족통일전선이 실현되지 못하고, 한반도 차원의 좌우대립을 고착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하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