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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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광서(현대사 분과)


중앙권력 기관의 수립 모색

  해방 직후 북한 내 좌우 정치세력들은 자치기관인 도, 시, 군 단위의 인민위원회에서 공존하였다. 이들은 같은 기관에서 협력을 모색하면서도 경쟁을 벌였고 때로는 갈등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 귀국 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부분국 결성을 통해 좌파세력들을 단합시켰으며, 조만식이 이끄는 민족주의세력 역시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세력을 결속시켰다.

북한 진주 후 소련군 지도부는 각급 인민위원회를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통치하지 않았고, 배후의 감독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북한 내에 중앙권력기관이 부재했던 까닭에 소련군 사령부는 사실상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중앙권력의 부재는 그 기능을 수행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소련군 당국으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따라서 중앙권력기관 수립에 대한 공산측의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의 조직 원칙에 따라 이미 1945년 10월경부터 모색되었다. 공산측은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중앙화’하지 않고서는 통치의 어려움이 따른 것으로 판단하고 중앙권력기관의 조직을 급하게 서둘렀다.

  이에 따라 소련측 고문들의 자문을 받는 25~30명으로 구성되는 ‘민간자치임시위원회’가 발족할 계획이 완성되었다. 이 기관은 도와 군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에 대한 지도를 책임지는 사실상의 중앙권력 기관으로 예정되었다.

문제는 누가 이 조직을 이끌 것인가에 있었다. 소련과 북한공산당 지도부는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천거하였으나 그는 이 직위를 거부하였다. 그가 북한 내 중앙권력기관의 수립을 ‘분단’ 행위로 간주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공산계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공산계가 시도한 중앙권력기관 설치 시도는 최고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행정10국이라는 다소 변칙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11월에 발족한 이 기관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중앙행정기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고루 분포한 각 국(局)의 책임자들은 하부 인민위원회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기관은 최고지도자가 부재하였고, 통치보다는 행정기능에 치중하였기에 중앙권력기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출처 :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탄생

  1945년 12월 말 한국(조선)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를 주 내용으로 하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좌우세력의 분열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파생된 정세는 북한지역의 정치 지형을 일거에 바꾸어놓았고, 조만식 그룹에 의한 모스크바 결정 반대는 북한에서 우익민족주의자들의 입지를 급속히 축소시켰다.

공산측은 변화된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서는 1945년 말에 좌절되었던 ‘권력의 중앙화’를 시급히 달성해야만 하였다. 그들이 중앙권력기관을 수립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유는 ‘상향식’ 권력 구조의 원칙적 실현이라는 형식논리 이외에 좌파세력의 주도권을 확립하려는 욕구가 가로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공산측은 향후 미소의 합의에 따라 한국(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될 경우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북한 내 정치체제의 개편은 좌파의 주도권을 확실히 다지고 이를 통해 남측 우파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전한반도 차원의 좌파 주도권을 확립하고자 함이었다.

1946년 2월 7~8일 북조선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들의 협의회에서 북한최초의 중앙권력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이하 북임위)가 출범하였다. 북임위 위원장으로 취임한 김일성은 북한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하여 향후 정국 운영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북임위 부위원장에는 연안파 출신의 북조선신민당 주석인 김두봉이, 서기장에는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인 강양욱이 선임되었다. 북임위는 산업국, 농림국, 사법국, 보안국, 교통국, 상업국, 체신국, 재정국, 교육국, 보건국 등 기존의 10국 이외에도 기획부, 선전부, 노동부, 총무부 등 4개 부서가 추가되었다. 

  각 국은 행정10국과 달리 소련군 사령부의 지휘에서 벗어나 북임위의 기관으로 재편되었다. 명실상부한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관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의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는데, 소련군사령부와 소련 민정기관은 계속해서 이들 기관에 대해 ‘지도와 지원’이라는 통제 메커니즘을 활용하였다.

북임위의 국장단은 북조선 공산당 2명, 조선민주당 2명, 무소속 6명으로 행정10국의 국장단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중용되었다. 이것은 권력 기관 구성 기준에서 당적보다는 전문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임위에 참여한 조선민주당과 무소속 출신 국장들은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들의 ‘통일전선’ 정책에 공감하는 인사들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중에는 일제하 친일경력의 소유자도 포함되었다는 점인데, 공산당은 친일파 처리 문제에 있어서 누군가가 필요한 인재일 경우 무조건적인 숙청과 배격보다는 지나간 과오를 참회한 후 등용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북임위는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토지개혁의 준비 기초”를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당면과업으로 설정하였다.

  ‘친일, 반민주세력’의 청산은 건국과정의 기본 전제로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반면, 토지개혁은 북임위 결성의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서도 절실한 요구가 되었다. 그밖에 북임위는 모스크바 결정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사업을 벌였으며, 한국(조선)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남쪽과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사안으로 삼았다.

북임위의 창설은 북한 사회를 통일적으로 이끌 중앙권력 기관으로서 사실상 북한 정부의  출발이었다. 북임위는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시키고 이를 전한반도로 확대해 나가려는 ‘민주기지론’의 구체화된 형태로 등장했다. 공산측은 북임위가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 수립될 한국(조선)임시정부의 토대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희망과는 달리 북임위는 북한 내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에 일조한 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