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 가는 길 4(끝) : 죽지랑과 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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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 가는 길 4(끝) : 죽지랑과 득오

 

  내가 처음 부산성을 찾은 것은 1988년 봄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석사과정 때, 복학하고나서 무작정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1/2만5천 지도를 사서 들고 홀로 경주로 향했었다. 죽지랑과 득오 이야기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늦은 아침을 대충 먹고서 산길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었는데, 정상에 가까운 완만한 구릉지까지 오르는 동안 꽤나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다. 물론 오르는 길이 험하지 않아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었다.
  또 1999년 초에 임기환 · 홍순민 선생과 함께 두 번째로 갔을 때는 날이 저물 무렵이라서 1/3쯤 오르다가 도중에 내려왔었다.

  이제는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가며 남은 성벽도 제대로 살피고, 사진도 찍어보자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성벽 둘레가 7.5km 가량되는 규모이므로 한 번에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 이번에는 남쪽 성벽의 허물어진 부분과 남문(南門) 터라도 직접 보자는 것이 작은 목표였다.


▲ 부산성 근방의 지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7 『경주유적지도』를 부분 스캔함)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
  송선리 마을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성 안으로 올라가는 길은 비포장이고 더러 패인 곳이 있지만 완만한 경사에다 길 폭이 왠만하여 사륜구동차를 움직일 만하다.
  오래 전에는 성 안에 목장이 있었고, 또 성벽 안쪽 능선에는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기 때문에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한 것같다. 그러나 이 길도 20세기 사람들이 새로 닦은 것이 아니라, 오래전 성이 사용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이런 때는 무리해서 마련한 내 차가 만족스럽다. 그래서 등산할 수고를 좀 덜고 시간을 아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런… 지도에서 확인하여 예상하던 지점의 1/3쯤 올라가자 철로 만든 차단문이 앞을 막았다. 자물쇠가 걸린 채 “사유지란 것, 채소 도난 등등으로 출입을 통제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 아닌가 !
  다행히 관리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사정을 이야기하면 되리라 싶었는데… 핸드폰을 꺼내 드니 <통화권 이탈>이란다. 골짜기가 깊긴 깊은가 보다.

   이제 꼼짝없이 걷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길이 괜찮은 편이라 다행이다 – 사실 답사, 특히 성곽 답사는 이렇게 걸어서 올라야 한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게으른 핑계일 뿐…
   성 안에는 만교사(萬敎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여기서 걷기 시작한지 30여분. (골짜기는 제법 깊다. 겨울인데도 작은 계곡의 물이 제법 흐른다. 신라시대에도 성 안의 물은 풍부했을 것이다) 많은 개들이 왕왕 짖어댄다 싶더니 관리인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개들이 짖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고, 마당에 트럭이나 짚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주인은 자리를 비운 듯하다.
  옛날에는 우사(牛舍)가 있고, 누런 소들이 좀 보였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황폐해진 건물 몇 채만 남았다. 이 건물들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 목장 관리 건물 : 성이 쓰이고 있을 때, 이런 완만한 경사지에는 창고건물들이 빼곡했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와서 보면, 처음과는 다른 지형이 보인다. 능선 가까운 곳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다. 아마 신라시대에는 이런 곳에 창고가 총총히 들어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봄직하다. 당시에는 계단식으로 땅을 고르고 건물을 세웠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흙이 흘러내려 비스듬한 경사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다.


▲ 좀 전에 지나온 목장 관리 건물(흰색)이 보인다. 멀리 오봉산 꼭대기 가까이 주사암이 보인다.

  성벽을 찾아라
성벽을 보기 위해서는 산 능선이 하늘과 만나는 곳까지 올라가서, 다시 조금 아래로 내려서야 한다. 성벽을 산비탈 안으로 기대쌓는 방식[內托法]을 쓰는 우리네 산성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그래서 쉬이 성벽을 찾기 어려울 때는 산길을 벗어나서 능선 꼭대기를 향해 곧장 나무덤불을 헤치고 올라가기도 한다. 이번에도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이런 방식을 택했다.


▲ 오른쪽 골짜기의 보이지 않는 아랫쪽이 출발 지점이다. 어린 고라니를 만난 것이 여기쯤인가.

  과연 내 판단이 맞았다.
  고생은 조금 더 했지만, 서쪽 성벽의 허물어진 부분을 바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가다보니, 넓은 채소밭이 나오고, 다시 서쪽으로 경사를 좀 내려서니 무너진 성돌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요행히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2~3m 정도 남아 있었다. 일행은 보지 못한 장면을 혼자 보는 것도 기분이 괜찮다.


▲ 부산성 서벽 잔존부 ; 축조 당시의 원형으로 보기가 망설여진다.

무너진 성벽을 따라 수풀과 나뭇가지를 헤치며 300m 가량 걷다가, 일행에게 연락을 취하려 핸드폰을 꺼냈으나 여전히 불통이다. 혹시 싶어서 성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더니,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응답이 들렸다. 좀 평탄한 길을 따라 가던 일행도, 결국 나처럼 능선을 향해 곧장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과 합류하여 조금 걸으니 사람과 경운기가 다닐 만한 길이 보인다. 아마 서문 터가 아닌가 싶다.


▲ 부산성 서문 터 : 밖에서 안으로 보며 찍은 것.

나는 다시 이 길을 잠시 혼자 걸어 나왔다.
청도 방면에서 부산성으로 곡식을 수송해오려면, 우리가 출발했던 송선리 쪽으로 수레를 끌고 들어오는 길도 있겠지만, 다른 길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즉 앞에서 제시한 지도에서 보듯이, <우라리> 쪽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오는 제법 넓은 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한 것.

성 밖으로 나와 100m 가량 걸으니 거의 토막민(土幕民)의 거처에 가까운 집 한 채가 나온다. 우라리 쪽 길을 물어보려고 소리내어 주인을 찾았으나 응답이 없다. 자세히 보니 방문에는 열쇠가 걸려 있다. 다른 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걸려 있는 옷은 할머니의 옷인데… 다른 곳으로 겨우살이를 위해 떠난 것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농약 분무기가 새것인 것으로 봐서 얼마 전까지도 조그만 밭을 가꾸고 있었던 것같고…


▲ 서문 터 밖으로 나가다가 만난 집. 초가집 지붕을 이을 겨를이 없어서 재생천을 덮고 끈으로 묶었다. (얼마 전에 배운 ‘배경색 날리기’를 시도해봄)

  주인 없는 집을 기웃거리는 것이 실례인 줄 알면서도, 부엌도 살펴보고 마당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방 문 앞에 남자 고무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인 부부가 사는 곳같기도 하고…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어쨌든, 우리네 산골 빈민의 삶을 보여주는, 더구나 요즘은 주변에서 쉬이 보기 어려운 모습을 만나고서는 사진 몇 장을 찍는 실례를 범하다.

   사람을 만나지 못한 까닭에,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여기서 우라리를 거쳐 청도 쪽으로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집을 지나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선뜻 보아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 사는 분들은 아마 우리가 올라왔던 길처럼 성 안을 통해 여기에 닿는 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았다.
   다만, 현지인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해도, 길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 마을을 이루고 사람들이 제법 살던 때야 그렇지 않지만, 사람이 떠나고나면 몇 년만에도 금방 수풀이 우거져서 길을 덮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혹, 이곳 아니면 여기보다 조금 북쪽의 구릉지에서 우라리로 이어지는 수렛길 정도는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라 상상한다(이런 상상은 잠정적인 것이다. 내년 봄쯤, 하루 종일 코스로 작심하고 다시 찾아갈 작정이다). 밀양 · 청도 방면에서 수송해온 곡식들이 송선리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오기보다는, 서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부산성에 얽힌 이야기 – 죽지랑과 득오
  능선을 따라 성벽이 허물어진 더미 위로 서남쪽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계속 옮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오른쪽 능선 너머 아래쪽이 성벽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부산성의 남쪽과 서쪽은 성벽을 넘어서면 바로 이렇게 아주 완만한 지형이 이어진다.
  지금은 채소밭으로 바뀐 이런 곳에는 창고 건물들이 빼곡했을 것이다.


▲ 부산성 서쪽의 무우밭. 수확을 포기한 채 내버려두었다.

   이제 죽지랑 이야기를 좀 해보자.
   화랑 죽지랑(竹旨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가 있었다. 문득 열흘이나 모임에 나오지 않아 집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모량의 익선(益宣)이 부산성 창고지기(倉直)으로 뽑아갔다”고 했다.

   죽지는 낭도들과 함께 부산성의 득오를 찾아가서 술과 떡으로 위로하였다. 그리고 득오가 휴가를 얻을 수 있도록 부탁하였으나 익선은 듣지 않았다. 이 때 추화군(推火郡:밀양)에서 곡식을 운반해오던 간진(侃珍)이, 낭도를 아끼는 죽지랑의 마음에 감동받아 곡식 30석을 주고, 또 진절(珍節)이 자신의 말 안장까지 주니, 그제서야 익선은 겨우 허락하였다.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던 관리가 이 소문을 듣고 익선을 잡아 더러움을 씻기려 했다. 그러나 익선은 도망쳐버렸고, 대신 그 아들을 잡아서 한 겨울에 성 안의 연못에서 씻겼더니 얼어죽고 말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이로 인하여 모량부 사람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승려가 되지도 못하는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죽지는 7세기 중반의 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기도 했다. 훗날 득오가 죽지의 덕을 흠모하여 지은 노래가 유명한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다.
   이 이야기는 화랑과 낭도의 인격적 유대관계를 잘 보여준다.
   또 익선이 득오를 차출하여 일을 시킨 것은 공적(公的)인 것이며, 죽지가 득오를 빼내오려 한 것이 오히려 사적(私的)인 것 아닌가? 화랑은 정식 관직(官職)이 아니었기에 익선에게 부탁하는 처지였다는 것, 익선이 뇌물을 받았지만 조정의 관리는 법에 따라 처벌하기보다는 일종의 세례(洗禮) 조치를 취했다는 것. 더러움을 씻긴다는 것은 옛 관행 또는 종교성 짙은 행위인 듯한 느낌… 등등

  학문적인 차원에서 따지자면 죽지와 득오 이야기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더 장황히 늘어놓을 내용은 아니다.

  부산성에 대하여
  부산성 남문 터는 옹성(甕城)의 기능을 하는 석축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방의 석축들이 신라 때의 것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서쪽과 남쪽의 성벽도, 무너져 내린 윗쪽에 1m가 조금 넘는 높이로 쌓아올린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후대인들이 언제 손을 댔을까?


▲ 왼쪽은 부산성 남문지 부근의 석축들. 20여 년 전에는 부근에 와당이 제법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부산성 안의 창고시설은 조선 초기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에는 부산성 군창(軍倉)에는 영천과 영일, 장기 지역의 군량이 비축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30년(1597)에 소수의 군사들이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기록이 있다. 또 『비변사등록』 숙종 34년(1708) 윤3월 5일조에는 최진한(崔鎭漢)이 부산성을 고쳐쌓자고 건의한 내용이 나온다.

  “(부산성) 안에는 네 시내와 한 지역에 아홉 샘물이 있습니다.… 성의 1/3의 일은 지금까지 완전하며, 만약 수축(修築)한다면 신축과는 현저히 다르므로 공력(功力)을 많이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건의에 대해 숙종은
  “… 부산성을 수축하는 일은 본도 감사로 하여금 계문하도록 함이 좋겠다.”고 응답하였다. 이 때 수축이 이루어졌는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 부산성 성벽에서 발견되는 후대의 손길은 아마 이때 무렵의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 산성을 답사하다보면, 1970년대의 예비군들이 훈련 때 석축을 손댄 흔적까지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산성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모두에 축조 기록이 있다. 합쳐보면 663년(문무왕 3)에 3년에 걸쳐 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가 초축(初築)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남산성도 이미 존재하던 것을 591년에 새로 쌓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죽지가 장군으로 처음 출전한 기록이 진덕왕 3년(649년)이므로, 그가 화랑이었던 때는 그보다 빨라야 한다. 따라서 663년의 축조기사는 초축이 아닐 듯하다. 부산성은 밀양 · 청도 방면의 세곡(稅穀)을 모아 저장하는 곳으로 663년보다 일찍부터 활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富山)이라는 이름도, 이 산에 있던 창고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 안에 1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절 하나, 목장 관리소 하나, 그리고 앞서 사진에 담은 서쪽 성벽 밖의 집이 거의 전부이다. 창고 터가 있었음직한 곳에는 채소밭이 이어지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 농삿일이라 수확도 제대로 안한 곳이 많다.


▲ 성 안 능선이 완만한 곳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 많고, 버려진 농기계들이 눈에 띈다.

  다음 답사를 계획하며
  이번 답사 때 일부 구간이나마 제대로 살펴보려 했는데,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익선의 아들을 씻겼다는 연못으로 짐작할 만한 곳도 찾아보지 못하였다. 산성 안에는 반드시 저수시설을 갖추어놓는 법인데, 계곡물을 제외하면 농민들이 채소농사에 이용했음직한 작은 연못을 멀리서 보았을 뿐이다.
  서울로 돌아와서『경주유적지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7)를 보니, 목장 관리인의 주거 뒷 편쯤 제법 떨어진 곳에 큰 연못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래서 답사는 사전 준비가 주도면밀해야 하는 것이다. 서쪽 성벽을 보기 위해 길아닌 길을 오르면서, 농사짓는 데 필요해서 만든 작은 연못을 보았지만, 이 큰 저수시설은 놓쳤던 것이다. 미리 알고 갔더라면 이곳부터 찾아보았을 것을 !
  어쩌면 여기가, 익선의 더러움을 씻기고자 하여 그 아들을 잡아다가 한 겨울에 집어넣고 씻기다가 죽었다는 바로 그곳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결국, 이번 부산성 답사기는, 조만간 한 번 더 찾아가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같다. 내년 3월 쯤에 시간이 맞는 사람 두어 명과 함께 답사계획을 다시 세워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