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 가는 길 3 : 부운촌과 여근곡

0
320

부산성 가는 길 3 : 부운촌과 여근곡


18일 오후 2시경, 경주 시대로 들어와서 L선생과 합류하다.
  그리고 원래 내 일정에 있던 대로, 경주와 울산 경계 지점에 있는 관문성을 함께 둘러보았다. 여기서 관문성이라 함은 길이 12km에 달하는 차단성(遮斷城)이 아니라, 이 차단성의 동쪽 산 꼭대기에 있는 테뫼식 신대리성(현지 지명을 따라 이름 붙임)을 말한다.

  신대리성 성벽에는 모두 10개의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일찍이 박방룡 선생님이 찾아내어 보고하였고, 나도 한참이 지난 뒤에 다시 분석하여 글 한 편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디지탈 카메라를 쓰기 전이라, 이번에 다시 가서 사진을 좀 만들어보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산꼭대기라 해도,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으니 동남벽에는 짙은 그늘이 져서 깨끗한 촬영은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명문도 몇 개 밖에는 확인하지 못했고… 이 답사기의 주제를 비껴나 있으므로 생략.

  전생의 김대성이 살던 곳
  다음날인 19일,
  경주에 오면 늘 가는 곳에 들러 재첩국으로 아침밥을 먹고, 첫 목적지인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雲坮里)로 향했다. 이번 답사 때 꼭 찾아보려고 작정한 곳이다. 김대성 이야기 때문이었다.
 『삼국유사』김대성 조에서는, 전생(前生)의 김대성이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연은 ‘모량리’ 뒤에 주(註)를 달아 “어떤 기록은 부운촌(浮雲村)이라고도 했다”(一作浮雲村)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운대리이지만, 그 속에는 부운(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 ‘부운못’이고, 못 근방이 부운이라 불린다. 20여년 전에 사놓았던 1/5만 지도에도 ‘부운’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한자(漢字)가 아니라 한글로 되어 있어서 더 확인이 필요했다.
  결국 『경주읍지』에서 부운(浮雲)을 찾아내고서야 확신이 섰다.


▲ <부운못>과 운대리 마을

조선후기 기록에 지명이 나온다면, 이는 요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부운이란 지명이 8세기 전반(김대성이 불국사/석굴암을 지은 것이 8세기 중반이니까,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전생은 8세기 초 또는 전반이라 해야 맞다)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내려왔다는 것이 될까? 섣불리 그렇게 판단하면 안된다.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지명이 살아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 바르다. 혹 “一作浮雲村”이라는 주(註)를 일연이 붙인 것이 아니고, 일연이 참고한 기록으로부터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저본의 기록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졌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의 상한을 최소한으로 잡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적어도 ‘생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는’ 이런 조심성이 요구된다. 그러고나서, “대략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부터 ‘부운’이라는 지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진다”고 간주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발붙이고 농사지으며 대물려 살아온 곳, 땅 이름이 가진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 아니랴!
   사실 그 자체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바로 이 마을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던 곳으로 알려지고, 그렇게 오래토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록을 통해 전해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정도만으로도 한 번쯤 찾아볼 가치를 충분히 가지는 답사 장소라 하겠다.

   부운못 뚝 위를 반 바퀴쯤 돌며 걸어보고, 다시 사라리(舍羅里) 고분 발굴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운대리와 바로 붙어 있는 마을이 사라리이다. 고대사나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유명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 사라리 고분 발굴지역 : 파란 지붕이 있는 곳 부근

   1990년대 중반에 신라 초기사를 보충해주는 중요한 발굴이 이루어졌던 곳인데,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신라 초기의 목곽묘(木槨墓), 목관묘(木棺墓), 그리고 신라의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등이 대량 발굴되었다. 출토된 유물들도 호랑이 모양의 대구(帶句)를 포함하여 다양하고 풍부하여, 이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권력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공장 부지를 고르다가 일부 유물이 출토되어 긴급발굴을 시작했던 까닭에, 발굴이 끝난 뒤에도 유적을 복원하지는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지도를 확인하고서 정확한 발굴지점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 공장이 보이는 곳이다.

   선덕왕의 지혜와 여근곡
   사라리를 떠나 부산성으로 가는 길에 잠시 여근곡(女根谷)에 들렀다. 오래전에 처음 찾았을 때와는 달리, 제법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찾는 발걸음도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도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와 관련된 장소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3가지 일을 미리 알아낸 지혜(知幾三事)]를 기록한 부분이 있다.
    하나는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냈을 때, 그 꽃의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는 것 –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서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
   둘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개구리가 울자 “서쪽 여근곡에 가면 적병이 있을 것이니 가서 쳐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 과연 정예군사 2천을 보내니 백제군이 웅크리고 있어 소탕했다는 것이다.
   셋은 선덕왕이 자기가 죽을 날을 말하면서 “도리천에 묻으라”고 한 이야기. 나중에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세워지면서 여왕의 예견이 맞았음을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하늘 가운데 하나로 제석천(帝釋天)이 주재하고, 사천왕천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 여근곡 : 골짜기가 생긴 모양을 따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사진은 날씨 좋은 봄날에 찍
어야 좋다.

   그런데 여근곡과 관련한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다. “백제군의 침입을 어떻게 아셨느냐?”는 신하들의 물음에 여왕은 이렇게 답한다.
   “개구리는 성난 눈을 하고 있어 병사의 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성은 음(陰)이고 흰색에 서쪽을 뜻한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성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그래서 쉽게 소탕할 줄 알았다.”
   선덕여왕에게 배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이 설화를 믿는다면, 여왕은 음양의 이치를 제법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신라시대 지배층의 남여관계가 비교적 개방적이었음을 감안하면, 무리한 언급이나 파격적인 발언도 아니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군이 침입한 장소가 바로 이곳 여근곡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설화에서는 “군사를 이끌고 가보니 부산(富山) 아래에 여근곡이 있었다”고 했지만, 이곳은 신라 왕경에서 너무 가깝다.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적군이 들어올 때까지 신라군은 뭘했나도 문제이지만, 특별한 대책없이 5백명의 백제군이 여기까지 침입했다는 것도 의아스럽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들은 여근곡 · 옥문곡은 이곳이 아니라 훨씬 서쪽의 지리산 부근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추정이 더 설득력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 참, 하나 놓쳤군요.
   부운촌으로 가는 도중에 금척리 고분군에도 들렀습니다. 아래 사진.

▲ 금척리 고분 : 金으로 된 자(尺)가 나왔다는 전설에서 붙은 지명. 모량부 지역의 중심
고분군.
                                                                                                                   (하일식 : 고대사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