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집, 동암 백남운 생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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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수련회 답사기】

동암 백남운 선생이 태어난 곳을 다녀와서… 

박창희(현대사분과)

  한적한 시골 길을 달리던 버스는 조그만 마을 입구 길 옆에서 멈추었다. 조용하고, 아늑해 보이는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둘러보니 스무 가구도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저기 동쪽으로 거인 머리가 연상되는 바위가 보인다. 동쪽 바위에 닿아 있는 나의 시선 사이에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지붕은 검은 색이다. 저기다! 백남운(白南雲)이 태어난 곳! …….

  10년 전쯤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다. 학부시절 예비답사였을 게다. 그때 이리저리 헤매다가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왔었다. 여담이지만, 반암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길목에서 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다람쥐 녀석 때문에 급정거를 했었는데 ……, 녀석도 놀랐는지 길 한가운데 멈추어서 잠깐 동안 두리번거리던 다람쥐의 모습은 아직도 뚜렷하다.   

  마을에 들어서서 이리 꺾이고 저리 꺾인 길지 않은 동네 길을 오르락내리락 걸어서 그 집에 이르렀다. 백남운의 생가는 반암마을의 동쪽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동쪽바위(東岩)는 훨씬 더 가깝고 잘 보인다. 거인이 자기 몸을 땅 속에 묻고 목과 머리만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백남운이 ‘동암(東岩)’을 호로 쓴 까닭이 이해될 만큼 신기하고 인상적이다.


<사진 1> @박광명

멀리서 지붕만 봤을 때는 그래도 사람이 사는 집 같더니만, 막상 와서 보니 폐가나 다름 아니다. 집 주변은 온통 잡초투성이고 지붕에서 흘러내린 기왓장더미가 발에 밟힌다. 검은 색 양철 지붕만 새로 얹어 놓았다. 담장도 없고, 마당이랄 것도 없는 집이다. 부엌하나 방 한 칸 그리고 마루가 전부인 정말 초라하고 작은 집이다.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에 오른 다음 방안에 들어섰다. 벽지는 여기저기 찢어진 채다. 찢어진 벽지 사이로 보이는 옛날 신문 벽지에는 조병옥의 사진이 있다. 조병옥은 1945년 해방 후부터 1960년까지 활동했던 정치가이다. 그렇담 1950년대에는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사진 2> @박광명

이번 답사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반전(反轉:reversion)이다. 백남운의 생가는 없어졌다고 한다. 위의 생가인양 묘사된 집은, 백남운 아버지 제자들이 해방 후에 지어 준 재실(齋室)이라고 한다.

재실이란, 대개 무덤이나 사당 혹은 능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뜻하지만, 선비나 유생들이 공부하던 집이라는 뜻도 있다. 실제로 백남운이 태어난 집검은 색 양철 지붕을 한 재실의 뒤편이라 한다. 집이 있었다는 자리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집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

재실과 백남운 생가 터를 보면서, ‘지금 집 주인은 어떤 사람이길래 집 관리를 이렇게 엉망으로 하는 것인지, 여기에서 백남운이라는 사람이 태어난 건 알고는 있는지, 백남운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기는 아는 건지 ……’, 안타까움, 실망과 푸념 그리고 비아냥거림 혹은 비난하고 싶은 마음 등등 착잡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속으로 물어 본다. ‘그러는 넌 백남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데?’라고 …….

백남운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에게 백남운은 주로 ‘월북’한 사회주의자 혹은『조선사회경제사』라는 책을 쓴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백남운에 대한 앎 정도도 그렇다. 부끄럽고 민망하다.

  2009년 7월 한국역사연구회 여름 수련회 겸 답사를 다녀와서, 백남운 생가 답사 후기를 쓸 요량으로 관련 문헌들을 뒤적거렸다. 백남운의 인생 경로를 소략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무리하련다.

백남운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와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에 항거하여 대규모 농민항쟁이 불붙기 시작하던 1894년 2월 11일, 전북 고창군 아산면(雅山面) 반암리(盤岩里) 반암마을에서, 수원 백씨 문경공파(文敬公派)의 시조 백인걸(白仁傑)의 11대손인 수당(遂堂) 백낙규(白樂奎 : 1866~1935)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일곱 살부터 열네 살 때까지 어려운 경제형편과 전형적인 예학적 분위기 속에서 부친 백낙규의 사숙(私塾:서당)을 통해 엄격한 주자가례(朱子家禮) 교육과 한문수업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그 이듬해 1911년 4월 18세의 나이로 전남 함평의 기대승(奇大昇 ; 행주 기씨)의 후손 기남섭(奇南燮 : 1891~1950)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1912년 4월, 조선총독부 부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관할하는 수원농림학교에 진학하였다.

22세가 되던 1915년 3월,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2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1918년 10월에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일본에서 동경고등상업학교(1919), 동경상과대학(1920~1925)에서 학구생활을 영위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이론을 수용하였다.

1925년 4월 동경상대 졸업과 함께 연희전문(연세대의 전신) 상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사회경제사』를 출간하였다. 1938년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940년 7월까지 복역하였다. 1941년에는 대화숙(大和塾)에서 일제의 전시통제경제를 지지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해방 되던 1945년 8월 조선학술원을 창립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미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 교수로 선임되었다. 그 시기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4월 「조선민족의 진로」를 『서울신문』에 연재하였다. 5월 민족문화연구소를 창립하고 소장이 되었다. 『독립신보』 창간에 참여해 고문 겸 논설위원장이 되었다.

  7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9월 좌우합작과 3당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박헌영(朴憲永)과 대립했다. 11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의 합당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12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47년 4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5월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을 『독립신보』에 발표했다. 근로인민당 결성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8월 미군정이 ‘8ㆍ15 기념대회’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에 대해 대규모 탄압과 검거를 했을 때 검거되었다.

1948년 4월 무렵 월북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남조선의 현정치정세」를 보고했다.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단으로 선출되었다. 9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교육상이 되었다.

  1952년 과학원 원장, 1956년 민주과학자협회 초대 위원장, 1961년 3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겸 상무위원, 1962년 맑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이 되었다. 1979년 6월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백남운은 일제하 연희전문 상과 교수로 있으면서 정치적 실천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학계에서만 활동한 전형적인 학자였다. 그러다가 해방 후 조선신민당 남한 책임자로 정치활동에 참여한 이후에는 사회주의 주류가 아니라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비주류에 속하면서 이른바 ‘중도좌파(中道左派)’ 입장을 대표하였다.

학문 분야에서, 한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개척자로서의 백남운의 위상은 대개가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백남운이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가장 깊이 있는 지적 수준을 보여주었고, 또한 가장 방대한 학문적 성과를 생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