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개성답사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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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개성 서쪽으로

11월 20일. 오늘도 맑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로 서울에서 출발할 때 우산을 가져왔지만 정말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맑다. 민화협 분들 말씀은 북녘 땅에서 이곳 개성과 사리원을 빼고는 모두 비가 온다고 한다. 하늘이 우리 답사를 돕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같은 차를 탄 원광대 나종우 선생은 자기 이름이 비를 그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종우여서 자기가 참가하는 행사에는 항상 비가 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모두 즐겁게 웃는다. 비가 안 오는 것은 자기 덕이라는 농담이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역시 출발시간과 출발장소는 같다. 9시 10분 버스가 현대공단 숙소에 도착한다. 평양에서 온 흰색 소형 버스이다. 버스에는 민화협 사람들이 타고 온다. 내가 탄 2호차에는 나이가 좀 든 김기묵씨와 사진촬영을 밀착 감시하는데 정평이 있는 김철남씨가 탄다. 아침에 홍순민 선생에게 받은 볼펜을 건네자 김철남씨는 대뜸 사진 쉽게 찍기 위한 뇌물 아니냐는 뼈있는 농담을 하면서도 볼펜은 받아 옷에 넣는다. 민화협 일꾼들과는 달리 북측 학자들은 자남산 여관에서 머물기 때문에 덕물산 자락의 현대아산 노동자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매일 진봉산 동쪽 마을 봉동을 지나 개성시내로 들어선 후 자남산 여관에 들러 북측 학자를 태우고 답사지로 향한다.

왕건릉에서 김철남씨

나는 매일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또 본다. 그 덕에 차안에서 북측 인사들과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현재로서는 개성주변을 보는 것이 북측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다. 매일 2차례 이상 자남산 여관을 드나들면서 선죽교를 본다. 볼수록 감흥이 떨어진다. 개성의 유물 유적 중 제일 볼품이 없는 것이 선죽교라고 한마디씩 한다. 벌써 배가 부른가 보다. 오늘은 왕건릉과 숭양서원, 공민왕릉을 답사한다. 바야흐로 개성 서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2) 왕건릉 가는 길

자남산 여관에서 북측 학자를 태운 버스는 남대문을 지나 서쪽으로 향한다. 이곳은 초행이다. 남대문을 지나자마자 길 오른쪽(북)에 보이는 큰 건물이 학생소년궁전이다. 바로 고려의 이궁 수창궁이 있던 자리이다. 고려시기 이궁의 하나였던 수창궁은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본궁궐이 불에 탄 이후인 1381년(우왕 7)에 다시 중건되어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이 즉위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옆 큰 건물이 송도대학이다. 개성 성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룡철씨가 학장이라 한다. 이번 북측 학자 속에 전룡철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차가 체신운영국을 지나 개성역 앞을 지난다.송도고적;을 쓴 고유섭이 생각난다. 고유섭은 개성역에서부터 송도고적순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성역 서북쪽의 산이 남대문에서 보았던 야매산이고, 그 뒤쪽으로 가끔 보이는 그보다 조금 높은 산이 오공산이다. 길옆으로 작은 도랑 정도의 물길이 있다. 이것이 고려 때 고급 주택가로 인기를 끌던 앵계란 말인가? 곧 나성 서쪽문인 선의문 자리로 여겨지는 약간의 언덕을 지난다. 바로 위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이렇게 고속도로는 나성을 끊고 지나간다.

도심을 빠져 나오자 곧 갈림길이 나온다. 서쪽으로 곧장 가면 개풍땅이고 벽란도까지 갈 수 있다. 오후에 공민왕릉을 가기 위해서 그 길을 갈 것이다. 차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북쪽)으로 향한다. 길 오른쪽으로 고속도로의 교각이 보이고, 그 뒤로 구릉이 보인다. 오공산 자락이다. 차는 곧 태조 왕건릉으로 난 직선도로로 들어선다.

왕건릉에서 본 진입로(정학수 선생 사진)

(3) 새로 고친 왕건릉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있는 태조 현릉은 그가 죽은 943년 5월에 만들어졌으며, 태조는 이곳에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와 함께 묻혔다. 현릉은 고려를 연 태조의 릉이었기에 외적의 침입으로 몇 차례 이장의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태조릉은 부아산 향림사로 잠시 옮겨졌으며, 1217년(고종 4)에 거란 유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다시 태조의 재궁은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한 1232년(고종19)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환도한 1270년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현릉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불분명하다.

이곳은 또한 1906년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파괴되었다가 1954년에 복구되었다. 현재의 왕건릉은 1992년 발굴조사 후 공민왕릉의 조각수법 등을 본 따 새로 만든 것이다.

주차장에 내리니 자주색 기와를 덮은 커다란 삼문이 홍살문 대신 우리를 맞았는데, 그 사이로 새로 만든 왕건릉이 보였다. 삼문 앞 동쪽에는 1993년 김일성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서있다. 삼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커다란 규모의 왕건릉이 앞을 가로 막는다. 삼문에서 봉분까지에 이르는 완만한 비탈길은 돌을 깔았으며, 그 좌우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서있다. 서쪽의 정자각 벽에는 왕건초상화를 비롯해서 왕건 생애도가 그려져 있고, 동쪽에 나란히 서있는 비각에는 신도비와 개수기실비가 들어 있다.

왕건릉 전경

(4) 릉 앞에 있던 귀엽게 생긴 돌 범은 어디로 갔을까?

 

새로 만든 왕건릉은 잘 다듬어진 봉분을 비롯해서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석등, 4마리의 돌호랑이,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는데, 모두 새로 만든 것이어서 사진에서 보던 옛 맛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개건 전의 사진에도 병풍석을 비롯해서 혼유석 석등 문인석, 석호 등이 있었는데, 그 중 현재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 안쪽에 보존해 놓은 12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을 빼고는 나머지 석물은 어디에 보존해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귀엽게 생긴 돌범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고치기 이전의 왕건릉(서울대출판부 도록)

고치기 이전 왕건릉 앞에 있던 돌범(서울대출판부 도록)

이 능이 최근 새로 만들어진 것을 알지만 역시 사진 찍기 바쁘다. 앞에서도 찍고 옆에서도 찍고 또 눈치를 보고 능 뒤로 올라가서도 찍는다. 묘역이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사이 능 서쪽 현실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 양쪽에 보존해 놓은 병풍석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현실의 벽화를 볼 것으로 기대했었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그렇지만 기대가 크면 다시 희망이 생기는 법. 상당한 숙의 끝에 북측 책임자는 사진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현실 안을 보여주기로 결정하였고, 우리는 5명씩 현실에 들어가서 현실내부와 이슬 맺힌 유리벽 너머의 벽화를 볼 수 있었다.

동쪽 벽에는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쪽에는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지만, 북쪽의 현무와 천정의 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벽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벽화는 언제 그려졌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왕건릉은 몇 차례의 이장과 환장을 거듭했으니, 이 그림은 처음 릉을 만들었을 때 그린 것일까, 아니면 환도 이후에 그린 것일까? 설명하는 분의 말에 따르면 4차례의 덧칠 흔적이 있다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림의 제작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으리라. 어제 박물관에서 왕건상을 본 데 이어 오늘 왕건릉의 벽화까지 보았으니, 말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다 본 셈이다. 이것 역시 이번 답사의 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정몽주의 옛집, 숭양서원

왕건릉 답사를 마치고 점심 먹기 전에 들른 곳이 숭양서원이다. 숭양서원은 자남산 남동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정몽주의 옛 터이다. 그곳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선죽교가 있다. 정몽주는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근처의 선죽교 근처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숭양서원 입구 동쪽 언덕의 바위에는 김육의 송덕비를 비롯한 여러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숭양서원의 문 앞 좌우에는 여러 동물 모양이 새겨진 특이한 2개의 돌계단이 있다. 말을 타고 내릴 때 이용했다는 마상석과 마하석이다. 사실 하나만 있어도 말을 타고 내리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 같은데…

계단 위의 삼문을 지나니 바로 앞에 강당이 나오고 그 앞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강당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고졸한 맛이 있다. 현판이 없는 강당 마루를 역시 신발을 신은 채 넘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정몽주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에 이른다. 사당에는 정몽주의 영정뿐 아니라 서경덕, 김육, 조익, 우현보 등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숭양서원이 정몽주의 옛 집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정몽주가 살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북측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서원 앞의 마상석과 마하석은 정몽주 선생이 출퇴근 할 때 이용했던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숭양서원. 문앞 계단 아래 좌우에 말을 타고 내리는데 쓰였다는 돌계단이 있다.

숭양서원 강당

숭양서원 답사 후 점심은 다시 봉동관에서 먹는다. 본래는 공민왕릉에 가서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할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추워서 식사를 봉동관에서 하게 된 것이다. 역시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앞자리에 앉아 지도를 펴들고 다시 길을 확인한다. 내려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사진이라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면 나중에 맞추어 라도 볼 텐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하나라도 놓칠 새라 보고 또 본다.

어제 밤의 여흥으로 봉동관을 들어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자연스럽다. 여성동무들과 인사도 자연스럽게 한다. 역시 사람은 자주 어울려야 한다. 점심식사 후 선물로 술과 고사리를 샀다. 밖으로 나와 덕물산 아래 펼쳐진 공단 공사 현장을 찍고 또 덤으로 북쪽으로 봉동의 학교 등도 카메라에 담는다. 정말 넓은 곳이 파헤쳐지고 있다. 그 이전엔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음에 오면 이곳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6) 공민왕릉 가는 길

 

점심식사 후 일정은 공민왕릉 답사이다. 오전에 선의문터를 지나 만난 갈림길에서 이제는 바로 서쪽으로 향한다. 한참을 간다. 지도를 보면 태조왕건릉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한두개 넘으면 공민왕릉이 있는 봉명산이지만 돌아서 가니 꽤 멀다. 길 북쪽으로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쪽으로 꽤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이 예전의 서교, 곧 황교일 것이다. 길옆에는 논과 밭이 있고 또 산 밑에는 마을이 있다. 또 마을 앞에는 시멘트로 만든 탑이 서있다. 여러 구호가 적힌 시멘트로 만든 탑은 모든 마을마다 있다. 고개를 넘자 길 왼쪽으로 아파트가 보이고 또 근처에 공원도 있다. 공원에는 시멘트로 만든 조잡한 조각들이 서있다.

갈림길(동네 확인)에서 차는 북쪽으로 접어든다. 길의 고도는 조금씩 높아지는데, 길옆에는 역시 논과 밭이 보인다. 공민왕릉 2킬로미터 팻말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이제 산길이다. 2시 10분 쯤 출발한 버스는 45분 정도에 공민왕릉에 도착했다. 생각보다는 많이 걸리지 않았다. 남대문에서 이곳까지는 약 9.8킬로미터라 한다. 공민왕릉 진입로에는 메타스쿼어라는 서양나무가 심어 있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수삼나무라 한다. 이 나무는 개성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최근 남쪽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7) 아름다운 공민왕릉의 모순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 봉명산 기슭의 공민왕릉은 왕릉인 현릉과 왕비 노국대장공주 릉인 정릉을 포함하여 말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1365년 왕후가 죽자 공민왕은 직접 정릉을 만들었으며, 1372년 자신의 사후를 위해서 현릉을 만들어 두었다가 1374년 그곳에 묻혔다. 현릉과 정릉은 1905년 도굴된 적이 있고, 1920년에 일부 수리공사를 했으며, 1956년 개성시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서 다시 수리공사를 하면서 내부조사를 실시하고 벽화를 옮겨 그렸다. 이후 이를 토대로 모형을 만들었는데, 그 모형은 현재 개성역사박물관 서쪽 전시실에 있다.

능은 수십미터 위의 언덕위에 자리 잡았는데, 그곳까지는 돌계단이 놓여 있다. 돌계단이 시작되는 축대 아래 왼쪽에는 방위를 표시하는 석물이 정남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오른쪽에는 정자각이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공민왕릉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서쪽이 공민왕릉인 현릉이고 동쪽이 정릉이다.

공민왕릉 전경

지금까지 개성의 유적 유물을 시큰둥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공민왕릉을 보고는 모두 감탄한다. 문화재와 미술을 보는 눈이 없는 내 눈에도 공민왕릉의 규모와 돌조각 수법은 대단하게 느껴진다. 병풍석과 난간석의 조각, 능 주변에 서있는 돌 양과 호랑이, 문인석과 무인석, 석등, 혼유석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공민왕이 현릉과 정릉을 만들면서 당대 최고의 기술과 최대의 비용과 노동력을 동원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 때 만들어진 왕릉제도가 이후 조선시기 왕릉제도의 기본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민왕릉은 중요하다.

훌륭한 문화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모순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 아름다운 문화재에는 고려말 민중들의 땀과 고통이 서려 있는 것이다.

박물관 모형에서 확인한 것에 따르면 현릉 벽에는 12지상 그림이 한 벽에 4개씩 그려 있고, 천정에는 해와 북두칠성, 3성이 그려있다. 또 동벽에는 문을 그리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하게 하였으니, 여기서도 공민왕의 왕후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현릉과 정릉 사이에 있는 돌양

현릉 서쪽 뒤에는 능 앞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방위석이 서있는데, 이 역시 정확하게 정남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을 보면 뾰족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것이 왕릉의 안산 격인 아차봉이다. 아차봉 너머로 높지 않은 산들이 이어진다. 처음엔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다고 넉넉하게 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중간에 일정이 바뀌어 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현릉 뒤편의 방위석. 정남을 기리킨다. 앞의 뾰족한 산이 아차산이다.

돌계단 아래 서쪽에는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것이 공민왕릉의 원찰로 지어진 운암사터일 것이다. 그 동쪽에는 유명한 광통보제선사비가 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시급히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 섰다. 이 비는 다른 비와 달리 넓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원찰인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릉의 내력이 적혀있다.

(8) 마지막 밤이 저물다

 

오늘 저녁은 자남산 여관에서 남측 주최 연회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내 자리는 첫날 연회 때와 같이 4번 식탁이다. 역시 이 자리엔 문화보존지도국 소속의 리기웅, 김명철, 변룡문 3분이 함께 하였다. 이분들은 모두 60을 넘긴 학자들로 고구려 벽화고분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실무를 담당했으며, 이번 개성역사지구를 세계문화유산 등재사업에도 실무 일을 맡을 예정이라 한다. 이 중 리기명 선생은 이번 토론회에서 ‘개성일대 력사유적의 문화사적위치와 세계적 가치’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점잔은 노학자의 편안한 모습이었다. 반면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김명철 선생은 술도 잘하고 사교성도 뛰어난 분이었다. 이분의 전공은 고려의 성곽이라고 했는데, 돌아와서 그분이 쓴 2편의 논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4번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 앞 줄 오른쪽이 리기명선생.

사흘을 같이 지내서인지 첫날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부드럽다. 여기저기서 술을 돌리고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옆 식탁에서 돌리던 폭탄주가 우리 쪽으로 전염되고 말았다. 김영미 선생의 흑기사를 자처한 리기명 선생이 연거푸 2잔을 들이키고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채웅석 선생까지 기꺼이 마신다. 나도 기분에 취해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한참 분위기가 올라가는 듯하더니 여기저기서 일어선다. 어느덧 작별시간이다. 분위기와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에 일정을 끝내는 것이 이곳의 규칙인 듯 했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차는 선죽교, 자남산, 남대문을 지나 봉동으로 향한다. 어두운 도시 한복판에서 자남산의 동상만은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현대공단 숙소에 돌아오니 역시 날씨는 쌀쌀하다. 오늘밤이 개성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개성답사의 꿈을 이루었지만 미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단의 현실을 더 가까이서 보아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