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린 삼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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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린 삼년산성

 

2007년 11월 25일(일) 답사기.

우리네 일상에서는, 어디 한 군데 홀가분하니 들르려 해도 늘 사정이 썩 여의치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24일(토) 저녁 일정까지를 겨우 끝마치고,  밤에 충북 보은을 향해 출발하여 25일 1시에 숙소에 닿았다.

300D를 쓸 무렵에 혼자 와보고, 5D를 산 뒤로는 한 번도 오질 못했으니 2년이 좀 넘었나? 물론 처음 삼년산성을 찾았던 때는 학부를 막 졸업한 1984년 5월 초였다. 내가 찾았던 삼국시대 산성의 첫번째였다. 당시의 첫 느낌은 경이로움과 감탄이었다. 성벽의 규모가 그랬고, 그런 성벽이 남아 있는 상태가 그랬다.
그래서 이곳은 늘 정이 가는 곳이었고, 그 덕에 무척이나 자주 찾던 곳이기도 했다.

일기예보상으로는 일요일 오전까지는 맑은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정작 느즈막이 눈을 뜨니, 5m 앞이 안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에라~이 ! 잠이나 더 자자 싶어서 두어 시간 더 자고 일어나니 오전 10시가 좀 넘었나?
눈을 부비고 씻고… 숙소를 나와 차를 몰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10m 앞이 안보일 정도로 자욱히 낀 안개는 개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싶어서 삼각대까지 들고서 성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비탈을 조금 올라 동문쪽으로 가자니 조금씩 안개가 가시는 느낌이 든다.

▲ 동남쪽 안쪽 성벽 : 자욱하게 낀 안개가 조금씩 개일 기미를 보인다.

  최근 무너진 동벽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인가,
사진을 하는 친구와 막 친분을 쌓기 시작했을 때, 함께 이곳을 오르면서, 위의 사진 오른쪽에 나오는 계단 쯤에서 캔 커피 하나를 데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 때는 계단도 없었고, 그냥 성벽 안쪽 회곽도를 따라 비탈길만 나 있는 상태였다.
당시 삼각대를 안가져왔던 까닭에, 그 친구는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사진을 찍으려고 머리 만한 돌을 몇 개 포개놓고 카메라를 얹어서 셔트를 눌렀다. – 그때는 “거 참 별나게도 찍네”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덜 흔들린 사진에 대한 욕심이 내게도 생긴 것은 한참 뒤였다.
어쨌든 이렇게 자욱한 안개 때문에, 사진을 거의 포기하면서 서문으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4시 방향을 지나면서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성벽이 제일 잘 남은 동벽을 타고 내려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성밖으로 넘어나갈 지점이 제대로 안찾아진다. 한두번 와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더니 동쪽 치성터 위로 올라가서 돌아보니, 아래 사진과 같은 성벽이 눈 앞에 드러난다. 성 안의 안개가 걷히면서 성벽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천년이 넘게 잘 버티던 성벽이 절반 이상이나 무너져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동쪽 성벽 : 성안에 가득찬 안개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

내가 안들런 지 2년 좀 넘는 사이에, 이 산성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2005년 5월 3일에 찍은 아래의 사진을 다시 보며 비교해 보자. 남아 있는 구간의 거의 절반 가량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이제는 이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단 말이지.
내 하드 디스크에 있는 사진 몇 장만이, 다시 찾을 수 없는 기억 속의 장면으로 남게 될 줄이야…

▲ 2005년 5월 3일자 사진

  삼년산성은 어떤 곳?
삼년산성은 삼국시대 산성 중에서 드물게 축조 연도가 분명한 곳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삼년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삼년만에 공사를 마쳐서 이름붙였다”는 주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보수한 기록이 있다.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으로 일찍 진출한 교두보와 같은 곳이다. 상주에서 청주로 나가는 교통로상에서, 거의 평지코스라고 할까.

어쨌든 이곳은 신라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삼년이라는 성 이름이, 나중에 <삼년산군>이라는 행정구역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는 공을 세운 이도 삼년산군 출신의 <도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이후 660년에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무열왕은 삼년산성에 머물며 당나라 사신을 영접하기도 했다. 이때 당의 사신 왕문도가 조서를 전하려다가 급사했는데,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하기도 한다. 신라의 음모가 있었던 듯이…
나중에 9세기에 들어와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잠시 삼년산성을 근거로 삼은 적이 있었다. 또 후삼국이 대치할 때, 고려 태조 왕건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지나쳐서 청주로 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그 이후 언젠가 이 성은 버려진 상태로 오랜 세월을 지낸 듯하다. 다만 조선초기 기록에서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나오고, 성 안에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되어 있어, 완전히 방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한다.
이런 식의 삼국시대 산성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당시 조선군이 이긴 곳은 거의가 산성 전투였다. 그 무렵 오래된 산성을 보수하여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유성룡의 언급 속에서 삼년산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삼년성은 황간과 영동으로 길이 지나니, 적군의 진격로를 끊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 뒤로 실제 성을 보수하여 다시 썼는지는 기록에서 찾기 어렵다.

  안개만 찍고 돌아서다
이곳 성벽은 20세기 초까지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80년대 초에 채록한 현지 촌로들의 전언에 따르면, 온전했던 성벽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관동대지진 때라고도 하나, 그 기억의 정확성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도 삼국시대 산성 가운데, 단양의 온달산성과 함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잔존한 성벽이 훌륭한 곳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삼년산성이었다. 높이 10m가 넘고, 두께가 6m에 달하며, 남은 성벽이 수십m나 이어지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말이 된 셈이다. 장관이라고 할 만한 동벽 구간이 마저 무너져버렸으니 말이다.

새로 무너진 동벽 구간을 약간 더 지나서 뒤를 돌아보니, 성벽 안쪽에서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성 안의 안개가 슬그머니 성벽을 타고 넘어 밖으로 소리 없이 나가고 있었다. 카메라 달랑 들고 혼자 답사 다니며 맛보는 즐거움이다. 다만 사진을 제대로 못찍는 실력이 아쉬울 뿐. – 앞서 말한 친구와 함께 왔다면, 그 친구는 분명히 흐르는 안개를 실감나게 화면에 담아냈을 것이다.

▲ 오른 쪽이 성 안쪽이다

위의 사진을 찍은 곳을 조금 더 지나서, 동북쪽 성벽으로 가까이 가면서 성 안쪽을 찍었다. 성 안에 가득한 안개가 몰려 나가는 사이로, 햇살이 나무 가지를 비추며 안개와 함께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실력이 제대로 갖춰졌다면 아주 환상적인 빛의 향연을 보여주었을텐데… 아쉽다.

결국은 무너진 사실을 확인하는 답사가 되어 버린 아쉬움.
가만히 기억을 살려보니, 언젠가 언론에서 삼년산성이 무너졌다는 짧은 소식을 전한 적도 있는 듯하다.

성 내부는 잡목을 제거하고 정비하는 작업을 한창 벌여놓았더랬다. 예전에는 서문을 들어서면 능선의 안쪽 성벽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훤히 다 보인다. 그러나 유적을 정비한답시고 꼭 이렇게 해야 하는지는 개인적으로 좀 회의적이다. 그대로 좀 놔두면 뭐가 덧나나?
내 생각만 그런지, 어디 여쭤봅시다. 다음 사진 2장 중 어느 장면이 더 자연스런가요?


▲  2005년 5월 3일 : 연못은 발굴이 끝나고 아직 정비가 안된 상태였음.


▲ 2007년 11월 25일 : 연못의 모양새를 제법 갖추어놓았다.

   삼년산성 내부의 연못, 아미지(蛾眉池)를 바라보며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것인데, 2007년 사진은 성 안의 잡목들을 모두 베어버린 상태이다. 그러나 두 장면의 차이는, 단순히 푸른 나뭇잎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의 차이는 아니다.
내년 5월 3일에는 기필코 앞의 사진과 꼭 같은 각도에서 한 장 찍어서 비교해보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