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답사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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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답사기 ③

                                                                        남무희(고대사분과)

대마도 답사기 ①과 ②를 쓴 이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를 핑계삼아 답사기를 마무리하지 못하였음에도, 마냥 기다려준 웹진위원장님과 간사선생님께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아무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 느꼈던 소감들을 가능한 한 되살려 보겠다.

  대마도 답사의 마지막 날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한 후, 이틀 동안 묵었던 호텔을 나왔다(7: 22). 마지막 일정을 향해 떠나는 버스에 올랐는데, 고대사분과의 생기발랄함을 널리 알리셨던 어떤 선생님께서 전날의 과음으로 버스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다시 호텔로 가야만 했다.

  항상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놓칠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다. 다시 호텔로 가는 길에, 지신사(池神社)라는 신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호텔로 발길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이번 답사에서 놓쳐 버렸을 것을 생각해보면 출발 시간을 늦춰준 어떤 선생님의 본의 아닌 의도가 나름 고맙기도 하였다.

일본의 한 부분에 불과한 대마도를 답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신사(神社)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사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살핀다면, ‘일본인’이라고 하는 타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신사는 원래 ‘모리’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숲을 의미한다고 한다. 숲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사에 대한 이해와 그곳을 배경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마츠리의 현장을 통해, 한국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조금 시간을 지체하였지만, 다음 목적지인 엔치즈(圓通寺)로 출발하였다(8: 00). 엔치즈의 입구에는 “불허훈주입산문(不許葷酒入山門)”이라는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찰 입구에 보이는 하마비(下馬碑)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린내나는 음식이나 술을 마신 자는 산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의미.

  엔치즈에는 조선초기에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던 통신사 이예(李藝, 1373~1445)의 공적비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연복사 종과 유사한 형태의 동종이 걸려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려 있는 운판(雲版)이 초인종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 뒤편의 종가묘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엔치즈의 답사는 마무리되었다(8: 45~9: 10).

엔치즈를 뒤로 하면서, 다음 답사지를 향해 버스는 출발하였다. 그동안의 빡빡한 여정으로 모두들 지쳐 있을 무렵에, 승연이가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어제도 두 곡을 불렀는데, 오늘도 노래를 통해 지친 답사객들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외국의 어느 시인은,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이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만일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 같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자발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승연이도 대견하지만, 그렇게 아이를 키워온 아버지의 자상함이 존경스럽다고나 할까.

승연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기운을 회복한 답사객들은 다음 답사지인 박제상 순국비에 도착하였다(9: 51).

그런데 이곳은 박제상이 순국한 곳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들으면서, 역사왜곡의 현장에 와 있는 씁슬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인가 비가 계속 줄기차게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후부터 사스나와 오오무라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였다. 세찬 비바람을 무릅쓰고 도착한 곳은 한국전망대였다(10: 30~10: 45).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을 바라볼 수는 없었는데,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일본을 왕래하다가 태풍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던 역관들의 순절비가 있었다. 그 분들의 명복을 빈다.

다시 버스에 오른 일행은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토노쿠비에 도착하였다(11: 11~11: 20). 이곳은 제일교포 어린이가 놀다가 발이 빠진 것을 인연으로 발굴하게 되었는데, 한반도의 유물과 거의 같다고 한다.


2호묘, 1호분은 소실.


3호묘


 토노쿠비에서 바라본 대마도 주택가 

토노쿠비의 답사를 마지막으로 이번 대마도 답사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회장님의 마무리가 있었다(11: 25).

이렇게 해서 대마도답사의 일정은 큰 사고없이 무난하게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답사를 통해서, 대마도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여러 번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대마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보통 역사유적을 답사하게 되면 유적이나 건물 위주로 사진을 찍게 되는데, 이번 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대마도의 야생화들을 사진에 담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또한 회장님의 마무리가 끝난 후에 마이크를 잡으신 어르신께서는 다음에 매화꽃이 필 때 다시 보자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 인생의 연륜이 짧은 관계로, 야생화들을 사진에 담고 있는 여러 선생님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시인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문득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생각해보면 한 개인의 인생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닐까.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라고 읊었던 어느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에도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도 한 떨기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어느 시인이 읊었던 잘 알려진 시를 음미하면서 답사기를 마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