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답사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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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답사기 ②

남무희(고대사 분과)

  대마도 답사기 ①을 쓴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더 미루다간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짓누른다. 답사때 필기한 내용과 관련자료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가물거리는 기억들을 다시 가능한 한 되살려 보겠다.

  첫날의 답사가 나름대로 강행군이었지만,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8시 24분에 답사지로 출발하였다. 처음 도착한 곳은 카미자카(上見坂) 전망대이다(8: 45~8: 59). 이곳은 대마도의 특징을 보여주는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완(淺茅灣)의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간혹 내리는 비와 안개 때문에 아소완은 우리에게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다.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오타케유키가 쓴 시비(詩碑)가 있다.

  다음 답사지로 이동할 때, 누군가가 ‘대마도 최대의 곡창지대’라고 말하던 이즈하라쵸(嚴原町)의 경작지가 보인다(9: 25).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시이네(椎根)의 이시야네(石屋根)에 도착하였다(~9: 39). 이시야네는 널빤지 모양의 돌을 겹겹이 지붕에 쌓은 집으로, 쌀과 보리 등의 식량이나 의류 등의 가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대마도는 강한 바람이 부는 곳이지만, 옛날에 막부가 민간주택의 경우 기와를 얹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붕을 돌로 만들어야만 했다.


지붕을 돌로 만든 경우는 일본에서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코모다하마진쟈(小茂田濱神社)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이곳은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1차 일본원정때 점령한 지역이다. 이때 2대 대마도주 소오 스케구니(宗助國) 등이 전사하였다. 또한 이곳은 러일전쟁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며, 더 이상의 외침이 없었으면 하는 기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도리이(烏居) 양쪽에 대나무를 묶어놓은 것이 특이하다.


일본에서는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원구칠백년평화지비”라는 글씨가 있으며, 위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있다.


러일전쟁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출발한 후,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잠시 버스에서 내린 곳은 카네다죠(金田城)이다(10: 43). 그러나 카네다죠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지는 못하였다. 카네다죠는 조선식 산성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660년에 당(唐)이 백제를 침공해오자, 당시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은 일본에 사신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풍장(豊璋)을 귀국시켜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일본의 대화정권(大和政權)은 이에 원병파견을 결정하고, 661년에 제명여제(齊明女帝)가 군대를 이끌고 난파궁(難波宮)을 출발하여 해로로 북구주의 박다만(博多灣) 나대진(娜大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출정을 앞두고 제명여제가 급사하였다.

  이에 전권을 장악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661년 풍장의 귀국길에 5,000명의 호위병을 파견하였다. 또한 663년에는 27,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삼군(三軍; 전ㆍ중ㆍ후군)으로 나누어 하까다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출병을 강행한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하였다.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의 패배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갖게 하였다. 이에 신라와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대마도에 사키모리(防人)를 주둔시키고 봉화를 설치하였다. 또한 667년에는 대마도에 카네다죠라는 백제식 산성을 쌓아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한반도 남해안의 동향이 한 눈에 보이는 아소완의 죠오야마(城山; 260m)에 세워진 이 성은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다.


도로변에서 바라본 죠오야마(城山)이다.

  다시 북상하여 대선월(大船越)의 만제키아시(萬關橋)를 건넌 후(11: 17), 코부나코시(小船越)에 도착했다(11: 26). 미우라만(三浦灣)과 히가시아소(東淺海)에 있는 코부나코시는 바다 사이의 육지가 178m에 불과해 배를 끌고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후나고시(船越)는 ‘배를 육지로 끌어 넘어간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부근에 아마씨류신사(阿麻氏留神社)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라고 쓰여진 비석이 눈길을 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글만을 매일 보면서 성장해야만 될 일본인들이 과연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어떤 시인은 ‘사랑하는 까닭’이라는 시를 통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황백현 가이드 선생은 이 도로가 382번 국도라고 하였는데,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보다 자세한 답사기를 쓰기 위해 ‘대마도 부산사무소’의 홈페이지에 대마도지도를 비롯한 관련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지도를 보면서 답사기를 읽으면 보다 이해가 빠를 것으로 생각된다.


대마도 부산사무소에서 보내준 쓰시마 지도이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코부나코시를 지나서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이린지(梅林寺)이다. 자료집에 의하면, 바이린지는 538년 백제의 사신이 불상과 불경을 일본에 전하러 가기 위해 하루 밤을 숙박했던 곳에 세운 사찰로, 일본에서 최초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바이린지에서는 신라 하대에 제작되었다고 하는 철제 탄생불을 친견할 수 있었다. 탄생불은 호신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수인(手印; 부처의 손모양)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일생을 보통 팔상도(八相圖)로 설명하는데, 불교도에게 탄생불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찍이 백봉거사(白峰居士; 1908.2.2~1985.8.2)는, “아득한 옛날이라 하늘 땅이 열리던 날/ 룸비니 동산에는 하늘 꽃비 내리는데/ 갖나신 발가숭이 나만 높다 하더라/ 높다고 하오시니 하늘 위에 또 하늘가/ 나라고 하오시니 발가숭이 나란 말가/ 외칠새 가뭇 없을새 물을 곳도 없어라/ 물을 곳 없댔더니 곳곳마다 발가숭이/ 놀라서 돌쳐보니 나도 또한 발가숭이/ 오호라 나날 때 한 소리로세/ 기억다시 새롭네”라고 하는 ‘아기 부처의 탄생을 노래한 시’를 지은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런 말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직 알 수 없을 뿐이다.


바이린지 입구에 걸려 있는 동종이다.

  다시 북상하여 도착한 곳은 에보시타케(烏帽子岳) 전망대이다(12: 32~12: 55). 이곳에서는 대마도 최고의 경치인 아소완의 절경을 볼 수 있다. 조금 전 카미자카 전망대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아소완의 몸매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내려 온 후, 다음으로 간 곳은 토요타마쵸(豊玉町)의 니이(仁位)에 있는 와타츠미진쟈(和多都美神社)이다. 이곳은 일본의 건국신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에 전하는 히코호호데미노미(彦火火出見)와 토요타마히메(豊玉姬)라는 두 신을 모시고 있는 해궁(海宮)이다. 이 신사에는 5개의 도리이(烏居)가 있는데, 2개는 바다에 있다.


바다에 있는 두 개의 도리이(烏居)이다.


바다쪽에서 바라본 신사의 전경이다.


와타츠미진쟈의 자연림이다.

  이곳에서 약간 더 북상한 후, 중화요리를 주로 하는 니이(仁位)의 도요타마반점(豊玉飯店)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1: 26~1: 59).

  점식 식사를 마친 후, 다시 382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좌측으로 난 48번 국도로 들어가게 되면, 미네쵸(峰町) 키사카(木板)의 카이진진쟈(海神神社)가 있다(2: 22~2: 57). 이곳은 신공왕후가 삼한정벌의 기원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바다의 수호신인 토요타마히메를 모신 신사이다.


수도관 뒤에 해신이 있다.


카이진진쟈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카이진진쟈로부터 조금 더 이동하자, 대마해협조난자추도비가 있다(3: 02~3: 10). 이 비를 세운 목적을 살펴보면, “바다의 안전을 원하는 대마도민들은 해협을 공유하는 이웃으로서 불행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추도의 비를 건립한다”라고 되어 있다.

  지금까지 계속 북상하던 버스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내려오던 길에 갑자기 소가 길을 막는 바람에 버스는 잠시 멈추어섰다.

  순간 오오미(靑海)의 계단식 경작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때 버스의 유리창을 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갑자기 버스를 세워준 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황백현 가이드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한반도로부터 이주해온 가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원래의 일정에는 없었으나, 버스에서 내려 오오미(靑海)를 답사하였다(3: 16~3: 39).


기와 위에 돌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오오미 답사를 마친 후에, 다시 간 곳도 역시 원래의 답사 일정에는 없는 곳이었다. 답사노트에는 소강(小綱)으로 간다고만 되어 있었는데, ‘대마도 부산사무소’에서 보내준 지도를 통해 무슨 의미인지가 이해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간논지(觀音寺)의 관세음보살좌상을 친견할 수 있었다(4: 06~4: 45).


목탁의 모양이 특이하다.


어두운 조명과 유리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진품을 찍기가 힘들었다.



원래는 서천 부석사에 있던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한다. 불상 속에서 나온 문서에 의해, 고려에서 1330년에 주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작시기와 원래의 출처가 분명하게 판명된 매우 귀중한 불상이라고 하겠다.

  다시 남하하여, 다음에는 대선월(大船越)의 여호도(女護島)에 도착하였다(5: 10~5: 16).

 이곳은 러일전쟁(1904~5)의 역사적 현장 가운데 하나인데, 이영학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설명이 끝난 후, 대선월의 만제키아시(萬關橋)는 걸어서 건넜다(5: 48).


만제키아시에서 내려다본 전경이다.

  만제키아시는 러일전쟁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러일전쟁 당시 로제스트벤스키가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일본 함대와 이틀 동안(5월 27~28일) 싸웠는데, 이때 발틱함대가 크게 패하였다. 만제키아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 전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만제키아시는 1900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건설하였다.

  오늘 대마도 답사에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오후나에의 후나에아토(船江跡)이다(6: 20~6: 30). 대마도주가 사용하던 전용선착장으로, 1663년에 소노 요시자네가 만든 5개의 선착장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마지막 답사를 끝낸 후 면세점에 잠깐 들렀다(6: 36~). 이곳에서 이경미ㆍ고현아 선생님이 추천하는 상품을 샀는데, 그 선물을 받은 분의 반응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두 분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음으로는 숙소 부근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에 숙소로 돌아온 후, 대마도의 이튿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