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이야기] 17세기 동북아시아의 문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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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동북아시아의 문제아 : 담배

17세기에는 동북아시아에서 담배 문제가 뜨거운 감자였다.

컬럼버스가 담배를 아메리카로부터 유럽으로 전래한 이래, 담배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전래된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첫째는 바다길을 통하여 인도를 거쳐, 필리핀을 지나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전래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육로로 비단길을 통하여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래되었다는 설이다. 셋째는 이 두가지 경로를 모두 생각할 수 있다는 설이다. 현재는 첫째의 가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담배가 16세기말 17세기초에 동북아시아에 전래된 이래, 그 전래속도가 빨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주로 발생한 문제는 담배가 전래되자마자 급속하게 전파되어, 누구나 담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나아가 비옥한 밭에까지 담배를 재배하게되자 곡물생산이 줄어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조선, 중국의 각 정부에서는 담배의 급속한 전래에 따른 문제를 둘러싸고 골머리를 앓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민을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1609년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하였고, 1612년에는 근원적으로 흡연을 막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담배 재배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일본 정부는 담배 문제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100년 동안 씨름을 하였다.

청나라는 담배가 전래되면서 청나라 관료와 군인들을 중심으로 너무 좋아하게 되자, 담배의 수입이 급격하게 늘어 청나라의 재산이 국외로 빠져나가기도 하였고, 담배를 피우다가 불을 내어 재산을 잃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청나라 황제인 태종은 “담배를 피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금연령을 내리면서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였다.

조선 정부도 담배의 전파 속도가 빨라 담배의 소비가 급증하고, 비옥한 밭에까지 담배를 재배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 문제를 둘러싸고 왕과 관료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과 청국 정부처럼 극약 처방을 쓰기 보다는 계도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정부는 담배재배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먼저 일본정부는 담배 재배와 흡연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유럽으로부터 일본에 연초가 전래된 시기는 1573년부터 1605년 사이라고 여겨진다. 일본에서도 담배가 전래된 뒤 전국 각지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흡연의 풍속이 경도(京都) 등 대도시  뿐만 아니라 산간벽지까지도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농민들은 산간벽지는 물론이고 비옥한 밭에서도 담배를 재배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1609년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은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금연령을 공포하였는데도, 국민들이 담배 피우는 습성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흡연이 증가하자 일본 정부는 고단위 처방을 썼다. 1612년에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의 흡연을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담배 재배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후 일본 정부는 1701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끊임없이 흡연을 금지하는 정책을 집행하고 단속활동을 벌였지만, 일본국민들의 흡연 풍속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담배를 재배하는 지역은 확대되었고, 재배면적도 확대되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금연령을 포기하였다.  17세기에 일본사회로의 담배 전래는, 면화 전래 다음으로 일본 중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담배의 전래와 보급현상은 농업적 측면뿐 아니라 상업적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즉 비옥한 밭에 담배를 재배하여 농업에 영향을 미쳤고, 담배를 사고 파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산간지방까지 유통경제의 범주에 휩쓸리게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정부에서는 흡연자를 처단하는 법령까지 공포하였다.

다음에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보다 더욱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당시 중국은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우고(1616년) 한족인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청에 복종하고 조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게 되었다. 그것이 병자호란이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담배가 조선으로부터 청나라에 전래되었다. 담배가 청나라에 전래되면서, 청나라의 관료와 군인들은 담배 맛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담배는 청나라 사람들의 중요한 기호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많은 담배가 청나라에 유입되게 되었다. 담배가 병자호란 당시에 잡혀갔던 포로들을 데리고 올 때도 사용되었으며, 나아가 청나라의 중요 수입품이 되었던 것이다.

담배를 피움으로써 청나라의 재산이 국외로 빠져나가고, 나아가 담배를 피우다가 불을 내어 재산을 잃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1638년에 청나라 황제인 태종은 조선정부에 담배 무역의 부당함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금연에 대한 극약 처방을 실시하였다. 즉 “담배를 피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금연령을 내리고, 철저히 단속해갔다. ‘흡연자 처형령’에 의해 청나라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조선상인들도 그 법령에 벌벌 떨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상인들도 청나라에 담배를 갖고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흡연자 처형령’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한번 맛을 들이고 인이 박힌 청나라 사람들은 담배를 찾게 되고, 이에 담배 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청나라 상인 중에 조선에 와 담배를 몰래 사가지고 가서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상인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청나라 황제의 엄한 금연령에도 불구하고, 인민들이 담배를 재배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이에 청나라 황제는 금연령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비옥한 땅에는 담배를 재배하지 말라

이제 조선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에서도 담배가 전래되어 급속히 보급되자, 농민들은 자신의 텃밭이나 밭에 담배를 재배하였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재배하는 것이 이익이 되자, 비옥한 논에까지 담배를 재배함으로써 사회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유학자들간에는 담배재배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담배재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산간지방이나 계곡에 한정하여 담배재배를 허용하자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재배면적을 제한하여 일정한 면적 내에서 담배재배를 허락하자는 의견을 개진하는 학자도 있었다.

1732년에 부승지 이귀휴(李龜休)의 상소와 그에 대한 영조의 대답이 당시의 관료와 왕의 생각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귀휴는 말하기를 “백성이 담배를 심는 것으로 직업을 삼고, 곡식을 재배하는 많은 땅이 백해무익한 담배를 심어서 끝내는 태워 없어지니 매우 무의미한 일입니다. 봄에 담배를 심을 때, 지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지하도록 한다면 백성이 어찌 감히 담배를 심겠습니까? 법을 세워 금지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담배 재배 금지령’을 내릴 것을 아뢰었다.

이에 영조대왕께서 말씀하셨다. “예전에도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영원히 금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옥한 토지에 담배를 심는다면 곡식을 생산해낼 수 없으니 이것도 권장할 일이 아니다. 삼남지방의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비옥한 땅에는 (담배를) 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이와 같이 조선시기에는 관료나 유학자들이 곡식을 재배하는 비옥한 토지가 담배밭으로 되는 것을 우려하여 담배재배금지를 주장하였고, 이에 왕도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비옥한 토지에는 담배를 심지 못하도록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말한다)의 관찰사에게 명령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정부에서는 일본 정부가 ‘금연령’을 내리고, 나아가서 ‘담배 재배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철저히 금지시키는 정책을 펴기보다는 ‘비옥한 토지에는 담배 재배를 하지 않도록 권유’하는 회유책을 펼쳤던 것이다. 1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담배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