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찾은 부산 금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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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은 부산 금정산성

하일식 (고대사분과)

벌써 몇 달이 지난 답사기를 이제야 올립니다. “우물쭈물 하다 보니,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참으로 명문이라고 느끼면서… 부산 금정산성에 다녀온 이야기를 이제야 끄적거려 봅니다.


생각해보면, 금정산성에 가서 사진을 좀 찍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벌써 몇년 전부터였던 듯….
특히 금정산성 서문의 적대(敵臺)는, 비록 수년 전의 복원품이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의 적대로서는 얼마간 전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나중에 낼 책에 사진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하나, 금정산성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두어번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성이다 뭐다 하는 데는 관심도 없었고, 누군가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더란 말이지. 그래서 성문 있는 곳조차 구경 못하고 풀밭에 앉아서 과자나 먹고 오는 게 고작이었기에, “제대로 한 번 보자”는 생각이 있었다.(나는 부산에서 나서 19년간 살았다)

벼르던 끝에 결심을 하고, 2008년 10월 26일(일) 저녁 열차로 구포역을 향했다. 다음 날 아침에 서문쪽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기에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았고, 화명 전철역 부근에서 하루를 묵다.
그리고 27일(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굴국밥을 사먹었다. 평소 내 답사 습관으로 따지자면 경이적으로 일찍 일어난 셈이다. 이렇게 일찍 서둘러야 해뜰 무렵, 북문 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쪽 성벽을 따라 돌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 금정산성 북문 : 성 안에서 본 모습

7시 조금 넘어 도착한 북문(안쪽에서 본 모습).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성벽 안쪽 숲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오르거니 내리느니 걸어야 한다.

▲ 동쪽 성벽. 원효봉에서 의상봉을 바라보는 지점.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걸어서,  제4망루 부근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성벽을 바라보다. 4망루는 한창 해체 수리 중이었다. 멀리 이어달리는 성벽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억새밭에 비치는 햇살도 가을 정취를 더해준다.
이날은 일찍 산행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월요일이라 그런지 다른 등산객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동문까지 가는 동안 10명 안팎의 사람을 만난 것이 전부였던 듯.

▲ 북쪽으로 의상봉을 바라본 모습

위 사진에서 보이는 성벽은 대부분 최근에 보수한 것이다. 높이는 대개 1~2m 가량밖에 안된다. 당초 쌓았을 때도 그 정도였을 것이다.
금정산은 부산을 대표하는 산이다. 역사가 오래된, 범어사라는 큰 절을 끼고 있기도 하고, 기암괴석이 총총히 서 있어서 풍광이 좋다. 내가 산을 오르는 이 날도,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며 쾌적한 기분으로 산길을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야트막한 성벽과 안팎의 억새밭이 어우러져 역광을 받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지난 번 학동센터에서 미러박스를 바꾼 뒤에, 24-105mm를 끼우고서는 서문쪽에 가서야 광각으로 바꿔 끼웠는데, 즉 렌즈를 바꾼 적이 없는데도 왕건이 먼지가 2개나 센서에 붙었다. 참 부실한 사람들… 기왕에 수리를 맡겼으면 청소도 좀 해줄 것이지… 에잇.
결국 서울로 돌아와서 이틀 뒤에나 먼지 청소를 직접 했다.

▲ 동쪽 성벽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다가, 4망루 거의 다 와서 북쪽으로 되돌아본 모습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성벽의 높이가 그닥 높지 않다. 사진에 보이는 부분에서 일부는 최근에 보수한 곳이고, 일부는 거의 원형을 간직한 곳인데… 이 정도라면 맘먹고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구나 내성과 외성을 합쳐서 둘레가 18km 넘는 대규모 아닌가?

미련스럽다는 얘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200년이 지나는데도, 조선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공포’가 남아 있었다고 할까.
아뭏튼 별 ‘쓸모 없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좀 야유섞인 표현으로 하자면 이렇다.

위 사진에 보이는 성벽은 전체 성곽을 중간쯤에서 남북으로 (태극무늬처럼) 가로지르는 내성이다.(사진찍은 방향은 동쪽에서 8시 방향을 본 것임)    멀리 낙동강이 보인다.

▲ 동벽의 미완성 치 : 성벽을 만든 한참 뒤에 덧붙여 쌓다만 것이다 

금정산성은 ‘미완성’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서쪽 성벽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위 사진에서 보듯이 동문쪽으로 다가갈수록, 이런 곳들이 몇군데 눈에 들어온다. ‘치'(稚)라고 부르는 시설이다. 그래도 모양새를 갖추려고, 성벽을 먼저 낮게나마 쌓고나서, 이런 식의 치를 군데군데 추가하였다. 그러나 치를 쌓는 일은 시작만 해놓고서는 마무리짓지도 못했다. 이런 모습으로…
서너군데 보이는 치는 바깥 성벽의 절반도 못미치는 높이에서 공사를 멈추었다. 대개가 이런 모습이었다.
성을 쌓기는 하는데… 절박하지 않았고, 여력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될까?

동문쪽으로 가까이 오니 성벽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트럭에 돌을 싣고 와서 쏟아놓으면, 포크레인이 성벽 가까이로 옮겨놓고, 인부들이 하나씩 쌓는다. 10여 년 전부터 각 지자체마다 성벽 복원이 열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글쎄… 그렇게 복원이라고 공사판을 벌인 결과를 보면, 과연 복원되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대개는 원래 성벽의 모양새를 잃어버리기 십상이고, 나아가 정체불명의 뺀질한 담벼락처럼 만들어놓은 꼴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만큼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면, 굳이 뭐하러 복원하려고 돈을 들이나?” 하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 돈으로 다른 복지비용으로나 쓰지… 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성벽 복원하는 공사를 보는 눈길이 고울 리가 없다.

▲ 동문이다. 최근에 새로 말끔히 정비해 놓았다.

동문을 거쳐, 다시 산성 안의 마을로 내려왔다. 성벽을 따라 남문쪽으로 더 돌아보려면 시간도 제법 걸리고, 그러다보면 정작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서문까지는 ‘하세월’이겠다 싶어서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그래서 마을로 내려온 다음, 시간을 대략 계산하고서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있다는 부산대학 부근, 장전동으로 가보기로 했다. 동문쪽으로 바로 내려가도 되지만, 남포동 쪽에서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을 바꿔타고… 오랜만에 부산에서 모처럼 꽤 먼 거리를 이동하다. 어렵사리 부설비를 확인하고(나중에 언급한다), 장전동에서 다시 산성마을로 올라왔다. 그리고 서문으로 곧장 향했다.

▲ 오래동안 보려고 했던 서문의 적대와 수문이다

조선후기에 여러 성제(城制)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성의 입지와 각종 시설물 등등에 대해 중국의 지식이 수용되면서, 학자들간에 논의가 많았다. 이른바 실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 쌓는 법에 대해 한 마디쯤 안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이 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거론된 것이 적대(敵臺)이다.

성벽 가운데 돌출된 치(雉), 성문을 감싸 안은 옹성(甕城)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수비병이 성문에 다가온 적군을 공격하기 좋도록 만든 것. 비슷한 기능을 가진 시설을 조선후기 식으로 부르자면 적대라고 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조선후기의 성곽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지만, 적대란 말은 조선후기에 나온 용어일 뿐이고, 그 기능이 삼국시대 이래의 비슷한 시설과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어쨌든 금정산성 서문의 적대는 성문 앞 옆으로 삐죽이 사각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조선후기 적대의 모델이 된다. 대표선수라고 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 사진에 보이는 모습은 제법 무너져 있던 것을 1974년인가에 복원하고 몇년 전에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얕은 계곡을 바로 곁에 끼고 있기 때문에 수문을 함께 설치하였다. 이 수문도 몇 년 전에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돌 색깔만 보아도 금방 새 것이라 눈치챌 수 있다. 다만 원형대로 복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형을 추적할 자료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은데…

가까이서 본 서문과 적대는 위와 같은 모습이다. 이런 건축물 앞에 섰을 때는, 무리해서 갖춘 광곽렌즈가 무척이나 흡족하다.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는데, 유적이 뷰파인더에 다 안잡히면, 그것도 스트레스.
늦가을 평일이라서, 찾는 사람도 없고… 호젓하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시간을 꽤 보냈다.

여기서쯤, 금정산성에 대해 간단히나마 짚어보자.
『중보문헌비고』에는 1703년(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에게 쌓게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1667년(현종 8)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축성되어 있었고 숙종대에 와서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어떤 이는 삼국시대부터 축성되어 있던 것을 간간히 보수하면서 이때까지 왔으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성 안을 가르지르는 중성(앞의 5번째 사진)을 쌓았다. 그리고 장대(將臺)나 군기고(軍器庫) 등의 여러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또, 1808년에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폐허처럼 된 산성을 다시 고쳐 쌓고 성문을 재건하였다. 이 때 세운 비가 <금정산성부설비>이다.
서울에서 사진으로는 이미 체크해두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여 대학원생에게 전화를 해서 “인터넷으로 확인하여 문자를 달라”고 했다.(정말 좋은 세상이다) 문자를 받아들고 비슷한 동네에 가서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일러준 대로 바로 그 곁에 있다는  건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조금 헤메다가, 마을 할머니에게 여쭈어보고서야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개발구역이라서 주변의 작은 집들은 다 철거하고 터닦는 공사가 한창이었고, 비석은 그 가운데 덩그러니 보호막 속에 놓여 있었다. 앞으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도, 이 비는 그대로 보호될 것이라 한다. 큰 바위 위에 세운 것이고, 부산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니… 1808년 보수할 당시의 상세한 내역은 여기 새겨져 있다.(세세한 내용은 생략)

▲ 금정산성부설비

조선후기에 성을 크게 쌓으면서, 금정산성 안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서울의 북한산성도 그러하듯이, 성곽 관리를 승려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금정산성도 그랬다. 국청사(國淸寺)라는 절은 지금은 조그만 규모이지만, 조선후기에는 그 역할을 맡아 많은 승려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지금도 성 안은 ‘산성동’이라는 독립 행정구역이 있고,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대개는 성  바깥의 직장에 다니거나, 음식점, 민박집을 운영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학생수도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청주 상당산성이나 광주 남한산성처럼, 성 안에는 모텔같은 공식 숙박시설이 들어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만약 예약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었다면, 여기서 자고 다시 하루쯤 더 묵었을 지도 모르겠다.

▲ 금정산성 안의 ‘산성마을’

대략 이렇게 돌아보는 중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슬슬 기차 시간에 맞출 때가 되어간다.  내차로 움직일 때는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있고, 어떤 때는 시간 여유도 많다.  그런데 차를 안가지고 오면, 또 그런대로 장점이 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가볍게 술 한 잔을 할 수 있다는 것. 누가 들으면, 꽤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겠지만… 사실 맥주는 꽤 좋아하고(두어 캔), 다른 술도 한두 잔 정도는 한다. 다만, 별로 많이 마시지를 못해서 아직 취해본 적이 없다는…

금정산성은 막걸리가 유명하다. 서울, 경기 일대에서 <포천막걸리>가 이름을 날리듯, 부산에서는 <산성막걸리>를 친다. 제대로 담근 곳에 가서 먹으면 꽤 감동적(?)이기도 하다.
내가 금정산성에서 마지막으로 막걸리를 먹어본 것이 1986년 여름이었나 싶다. 가까이 지내던 몇 년 아래 후배들과 함께였다.

상경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문쪽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 보니, 골짜기 한쪽에 천막을 치고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할머니가 있어서 잠시 들러다.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 : 막걸리 한 되를 내오신다.
기겁을 하고 “아이고, 제가 이걸 다 못먹어요. 손대기 전에 반되만 덜어낼까요?” 했더니, 흔쾌히 다시 내주신다. 쌀쌀한 늦가을 오후에, 혼자 앉아서 껄쭉한 막걸리 서너잔을 느긋하게 마시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니터로 확인하면서.  이럴 때는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좋은가?

지금 우리가 금정산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808년에 대대적으로 고쳐쌓은 모습이다. 그나마도 무너진 곳이 많아서 최근에 다시 복원공사를 하는 구간이 있다. 부산시에서는 수억을 들여서 다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모 은행의 지원을 받아서…  뭐, 그런 계획은 그렇다 치자.
다만, 내가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은, 19세기 초에 이런 식의 대규모 공사를 한 사람들의 마인드에 관해서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씻어지지 않는 공포감이 있었던 것같다.
성곽 답사를 다니면서 체크해둔 여러 곳이 있는데, 18세기 말, 19세기 초, 심지어 대원군 때조차도 지방민을 동원해서 성곽을 고쳐쌓는 일들을 더러 했었다. 그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책에서, 이런 성들을 몇 개 모아서 함께 다루는 장(章)을 따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공포감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리고 외침에 대한 대비라고 해도 좋다.
다만, 18세기 19세기에, 이런 식의 성곽을 새로 쌓고, 또 고쳐쌓는다고 해서 나라를 튼튼히 지킬 수 있었느냐 하는 것 !
그들은 이미 철 지난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마냥… 외적이 쳐들어오면 성안으로 들어가서 농성한다는 식의 <오래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세계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알게 되는 상식이지만, 이미 성곽으로는 안되는 시대에 접어든 지 한참을 지나지 않았던가?

18, 19세기 사람들이 이렇게 성곽을 쌓아서 나라를 지키는 데 성공했었나? 충청도 홍주성이나, 전라도 금성산성 등… 동학군이나 의병들이 옛 성에 웅거해서 일본군과 싸운 곳이 몇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패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을 당해내지 못했다. 물론, 이유가 기관총 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성곽은 무용지물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경복궁 궁장(宮墻:궁궐담장)이 낮아서, 서울 성곽이 허물어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18, 19세기에 성 쌓기에 몰두했던 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 모르고 옛 생각에 갇혀서 ‘쓸데 없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 동시대의 세계사를 보면, 당연히 그 행위는 ‘쓸데 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대의 조선 지배층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웃지 못할 희극이었을 뿐…. 아니, 그 결과는 희극이 아니라 참담한 비극이었다.

“외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잘못되면 너와 내가 다 죽는다”며 백성을 동원하여 힘들게 부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쓰러져가는 권위를 부여잡는 한편 숨을 깔딱거리던 지배력을 연장시켰을 것이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현실의 지배를 관철하는 것. 따라서 이런식의 성쌓기는 토목공사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정책이었다고 보는 편이 바르다.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이 대목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좌파와의 투쟁”을 내걸고, 안되는 것은 모두 “친북좌파 때문”이라면서 꿋꿋하게 밀어부친다. 극우정권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노선이다. 실제와 무관하게, 자기를 선(善)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가상의 악(惡)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러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이유나 배경을 불문하고 선택적인 증오감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약효가 있다.
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자수성가하던 시절의 <오래된 생각>에 사로잡혀 토목공사에만 몰두하고 있다. 수십조원의 예산을 거기에 퍼붓고….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이 나라의 앞날이 어둡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21세기 이 나라의 미래를 삽질로 개척하려는 자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