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19세기 후반 朝鮮의 對英정책 연구 (1874~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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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19세기 후반 朝鮮의 對英정책 연구 (1874~1895)

: 조선의 均勢政策과 영국의 干涉政策의 관계 정립과 균열」

(2015. 08.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한승훈(근대사분과)

 

19세기 후반 조선과 영국의 외교관계는 어떠했을까? 이 질문은 필자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 가졌던 문제의식이었다. 조선과 영국 관계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였다.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국가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1차 중영전쟁을 시작으로 청과 일본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불평등조약체제를 관철시켰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한 영국과 조선의 외교관계를 파악한다면,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고,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필자는 조영수호통상조약(1883)의 체결 과정을 밝힌 석사논문을 시작으로 조선과 영국의 외교관계 연구를 본격화하였다. 주사료는 영국외교문서(FO)였다.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서 생산한 문서가 주요 분석 대상이었다(FO 228). 하지만 주청·주일 영국공사관에서 생산한 문서(FO 17, 405 : 중국; FO 46, 410 : 일본)를 빼놓고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주청 영국공사가 조선 공사를 겸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의 대조선정책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들이 베이징과 도쿄에서 주재하는 영국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외교문서는 한국 사료에서 찾을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제공해 주었다.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새로운 소재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박사학위 논문을 구성할 수 없었다. 선행 연구와의 차별점을 부각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의 틀로 개념화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필자의 논문 주제가 대외관계사 영역에 포함된 만큼, 개념화의 핵심은 외교정책의 기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조선의 대영정책 기조와 영국의 대조선정책 기조를 개념화해야지만, 조선과 영국의 상호관계 속에서 조선의 대영정책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먼저 필자는 조선의 대영정책을 “균세(均勢 : balance of power)정책”으로 개념화하였다. 본래 균세는 『만국공법』에 수록된 단어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한문 번역어였다. 그런데 『만국공법』의 번역자 윌리엄 마틴은 원본에 없는 ‘균세지법(均勢之法)’을 개념화하였다. 그 내용은 강대국들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상황을 억제하는 사회를 구축하고, 약소국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사회에 편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틴은 균세를 약소국이 독립을 보전하는 규범적 원리로 정의 내렸던 것이다.

‘균세’는 1870년대 초반 만국공법의 도입과 함께 조선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대서구정책의 기조로 ‘균세’를 고민한 시기는 1880년이었다. 김홍집의 수신사행이 그 시작이었다. 일반적으로 김홍집의 수신사행이 갖는 의미를 ‘조선책략’의 연미론,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로 보고 있다. 그런데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이 김홍집에게 소개한 외교정책 기조는 ‘균세’였다. 하여장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만국공법의 균세에 입각해서 조선이 서구를 향해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조선은 1882년 미국을 필두로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1884년에는 러시아,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서구를 향한 문호개방을 단행한 것이다. 그 후 조선 정부는 대외적 침략에 직면했을 때마다 서구 열강에게 거중조정을 요청하거나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 대상은 미국과 러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 영국을 비롯해서 독일, 프랑스 등 조약 체결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다. 즉 ‘균세’는 조선의 대서구정책 기조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이에 필자는 조선의 대영정책 기조를 ‘균세정책’으로 정의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균세정책에는 19세기 후반 약소국으로 조선의 현실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약소국 이론을 조선의 대서구정책에 접목시켜 보았다. 국제법과 조약에 의존해서 독립을 유지하려는 약소국. 약소국 정치세력들이 강대국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모습. 약소국의 개혁세력들이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외세의 위협과 더불어 정권의 대외정책을 실패로 규정하려는 시도 등. 약소국을 조선으로 바꾸어도 무방해 보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서구정책을 설명하는데 적합해 보였다. 그 결과 필자는 조선의 균세정책을 대외적 목적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 상황이 반영된 정책으로 개념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균세정책과 접점을 이루는 영국의 대조선정책 기조는 무엇이었는가? 학위 논문 심사 전까지 필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결코 영국은 조선에 무관심하지 않았으며, 청과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해석과는 차별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필자의 설명은 영국의 외교정책이 갖는 보편적 특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필자는 19세기 영국의 외교정책이 갖는 보편성을 파악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영국의 외교정책의 핵심은 고립정책(Isolation Policy)과 이에 기초한 간섭정책(the policy of intervention)이었다. 영국의 고립정책은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고립정책에 기초한 간섭정책은 모순처럼 느껴졌다. 고립정책의 사전적 정의가 타 국가와 동맹 등을 맺지 않으며, 다른 국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의 경우는 달랐다. 영국은 동맹이나 정치적 협력의 형태로 유럽의 세력균형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고립정책을 추구하였지만,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손상을 입는 경우에 개입을 통해서 간섭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영국은 고립정책과 이에 기반을 둔 간섭정책을 동아시아에 적용시켰다. 군사적·외교적 간섭으로 청과 일본에 불평등조약체제를 관철시킴으로써, 동아시아에 자유무역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영국은 조선과 조약 체결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 범위를 조선으로 확대시켰다. 영국은 조선에서도 조약체제와 러시아 견제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다. 두 사건은 국내 개혁을 둘러싼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충돌하였다. 조선 내정 문제가 동아시아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영국으로서는 조선의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을 둘러싼 정세 불안이 러시아의 개입을 가져올 것이며,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가 자국의 동아시아 무역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영국으로서는 조선에 대한 ‘무관심‘보다는 ‘이익’ 유지를 위한 치밀한 간섭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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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갑신정변 발발 직후 거문도 순찰을 건의한 파크스의 1884년 12월 14일자 보고서, No.320, FO 27/2719, ⓒ The National Archives in UK(이하 TNA)

 

이상과 같이 필자는 19세기 조선의 대영정책 기조와 영국의 대조선정책 기조를 각각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이 만나는 접점을 통해서 19세기 후반 조선과 영국의 관계를 규명해 보았다.

필자는 논문을 3부로 구성하였다. 1부는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의 정립”으로 조선과 영국이 제2차 조영조약을 비준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시기로는 19세기 중반부터 1884년까지이다. 필자가 1부에서 주목한 점은 조선과 영국이 조약 체결을 구상하게 된 배경이었다.

지금까지 연구는 1882년 조선과 영국이 제1차 조약을 체결하게 된 배경으로 조미조약 체결을 들고 있다. 조미조약의 체결 소식을 들은 영국이 청에게 중재를 요청함으로써 조선과 영국이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설명이다. 선행 연구는 조선과 영국의 조약 체결을 조미조약에 딸려온 부록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지점은 조선의 ‘대외적 위기’였다. 1870년대 초반 서계문제로 조선과 일본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일본 내부에서는 정한론이 제기되었고, 대만 출병을 단행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청국과 일본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1880년에는 러시아가 청국과의 이리 국경분쟁을 유리하게 조정하기 위해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제기되었다. 조선을 둘러싼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 때 조선 내부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조약 체결로 대외적 위기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오경석과 이동인이었다. 오경석은 1874~5년에 북경의 영국영사관을 방문하였다. 이동인은 1880년에 도쿄의 영국공사관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영국외교관과 만난 자리에서 영국이 함대를 동원에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포함외교에 입각한 조선과 영국의 수교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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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1874년 3월 유럽 열강의 대조선 포함외교를 희망한 오경석의 발언 내용, Confidential, No.49, FO 17/672 ⓒ TNA

 

그런데 오경석과 이동인이 ‘포함외교’를 요청한 이면에는 국내 정치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경석과 이동인은 현 집권층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현 집권층은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부패한 세력이었으며, 대외정세에 무지한 채 쇄국정책을 통해서 권력 유지에만 집착하는 집단이었다. 오경석과 이동인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포함외교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현 정권을 타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의 대외적 위기’는 비단 조선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도 조선의 대외적 위기에 주목하였다. 1875년 7월 조선과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고, 일본이 러시아와 연합해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는 본국 외무부에 거문도 점령과 더불어 조선과 조약 체결을 건의하였다. 그는 영국이 간섭정책을 통해서 조선을 둘러싼 대외적 위기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크스의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위협이 소문에 불과하다는 본국외무부의 판단과 더불어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조선을 둘러싼 위기가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크스가 그렸던 대조선정책이 갖는 의의는 크다. 조선에 대외적 위기가 발생하면 러시아의 진출이 예상되며, 영국이 그 위기에 개입해야 한다는 정책적 기조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1880~1년 러시아의 조선 침략설이 대두되는 과정에 영국은 조선과 수교를 맺고 궁극적으로 조선의 대서구 문호개방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제1부에서 필자는 조선과 영국이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책을 정립하는 과정을 보았다. 조선의 대영 수교 정책에는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안과 외세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조선 정치세력들의 의도, 즉 균세정책이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영국의 대조선 수교 정책에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독점적 진출을 막기 위한 외교적, 군사적 간섭정책이 내재해 있었다. 즉 조선과 영국은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이라는 정책 기조로 상호 조약 체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2부는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의 추진과 파행”으로 갑신정변과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격변기에 조선의 균세정책과 영국의 간섭정책의 상호 작동과정을 살펴보았다. 선행 연구는 갑신정변을 전후로 전개된 조선과 영국의 상호 관계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변 진압을 전후로 영국이 조선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갑신정변 시기 조선과 영국이 상호 정책을 추진하였음을 밝혔다. 정변이 발생하자, 정변 주도세력과 반대세력들은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총영사 애스턴과 교섭하였다. 정변 진압 이후 친청 정권은 정변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일본과의 갈등을 조선 측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목적에서 영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했다. 조선 정치세력들은 국내외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영국의 지지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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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조선의 거중조정 요청을 수락한 에스턴의 보고서, No.53, FO 228/750, ⓒ TNA,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영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총영사 애스턴은 서울에서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친청 정권이 거중조정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애스턴은 조선 측에 적극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조정하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애스턴이 조선의 거중조정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대일강경론을 펼쳤던 친청 정권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는가? 사실 일본 측 거부로 애스턴은 거중조정을 행사하지 못하였기에, 그가 거중조정을 통해서 의도한 바를 확인하기란 어렵다. 다만 애스턴이 친청 정권의 대일강경론에 회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조선의 대일강경론을 배제시킨 채 조선과 일본이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는데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청 영국공사로 주조선 공사를 겸직했던 파크스는 청과 일본의 확전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중재를 진행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대외적 갈등이 러시아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파크스는 일본과 협상 개시뿐만 아니라 조선 주둔군의 철수에 부정적이었던 청국을 협박하고 설득하였다. 주일 영국공사 플런켓 역시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서 청과의 교섭을 이끌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영국은 청국이 일본과 회담에 참여하고, 텐진조약을 체결하는데 일조하였다. 즉 조선과 영국은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에 입각해서 갑신정변으로 발생한 조선의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영국은 텐진조약 체결 직전인 1885년 4월 15일에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명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의 대립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이라는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 새로운 위기를 조장하였던 것이다. 기존 연구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철수 과정에서 조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과 결합하면서 약소국 조선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설명 속에서 영국은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갑신정변 직후, 영국은 중재자의 모습으로 동아시아 정국을 주도하였다. 조선주둔군 철수를 반대한 청국의 주장을 무력화시킨 국가가 영국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자 조선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청국과 일본으로부터 확실한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결국 영국은 청국에 의존해서 러시아로부터 조선 영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외교적 간섭으로 동아시아 정세 안정을 추구하였던 영국이 거문도 점령 외교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였지만, 균세정책에 의거해서 영국의 철수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필자는 균세에 입각한 조선의 철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현실과 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철수과정을 관계의 ‘파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제3부는 “균세정책과 간섭정책의 균열”로, 영국의 거문도 철수 이후부터 청일전쟁이 끝나는 1895년까지 조선과 영국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현행 연구는 이 시기 조선과 영국의 관계가 특별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런데 조선은 청일전쟁 이전까지 서울과 런던에 상호 공사 파견을 추진했다. 그 이유는 청의 내정간섭이 노골화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조선의 상호 공사 파견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 주재한 영국 총영사들은 원세개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영국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지지하였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에서 특권을 향유하거나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차단하였다. 이를 통해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으로 남하하는 경우를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이를 빌미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했다.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가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자 조선정부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거중조정을 요청하였다. 표면적 목적은 청일 군대 철수에 있었지만, 그 핵심은 제물포와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내정에 개입하려는 일본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의 왕궁 포위를 우려하였던 고종은 영국 총영사관으로 파천을 의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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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1894년 7월 초, 고종의 총영사관 파천 의뢰를 보고한 영국외교문서, July, 5 1894, Separate & Confidential, FO 228/1168, ⓒ TNA,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갑신정변 직후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조선의 거중조정 요청을 수용하였다. 영국은 청국과 일본에게 조선주둔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영국이 강력히 철수를 요구한 이유는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청국은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자 했지만, 일본은 청국이 더 이상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영국의 철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였다. 영국의 외교적 중재가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관철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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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영국 외무부 장관의 한반도 분할론, No.110, FO 405/60 ⓒ TNA,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의 개입이 가시화되었다. 러시아는 청과 일본을 중재한다고 나섰으며, 청은 러시아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결국 영국은 러시아를 포함해서, 프랑스, 독일과 공동으로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동시에 영국은 청과 일본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는 일본, 북부는 청국이 점령하는 안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전쟁으로 초래할 수 있는 러시아의 개입과 영국의 경제적 타격을 미연에 차단하려고 했다. 영국이 추진한 간섭정책에는 균세정책을 통해서 독립 보전을 추구했던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의 대영정책에 관련해서는 갑오정권과 고종 및 대원군이 추진한 대영 교섭의 이원화 과정을 분석하였다. 먼저 갑오정권은 해관의 운영권 등 주로 실무적 차원에서 영국과 교섭하였다. 반면에 고종과 대원군은 영국에게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주기를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균세정책을 통해서 영국이 일본의 침략을 억제해 주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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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청일전쟁 중 영국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한 고종, No.130, FO 405/61 ⓒ TNA,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하지만 영국은 점차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 간섭을 통한 견제보다는 고립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영국외무부는 청일전쟁부터 서울 주재 총영사에게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에도 총영사에게 서신을 보내서 사건의 처리과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밝힌 영국이었지만, 정작 조선을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했다. 조선 역시 영국보다는 미국과 러시아와 관계 강화를 모색하였다. 즉 조선과 영국의 관계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균열’하였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상으로 본인의 학위논문을 정리하였다. 부족함이 많은 논문이다.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조선과 영국의 관계가 사실상 1895년을 기점으로 쇠퇴하는 측면을 부각시켰다. 그러기에 1895년 이후의 조선과 영국의 외교관계를 다루지 못한 점에서 한계도 뚜렷하다. 아울러 조선과 영국의 관계에 집중하였기에, 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함께 아울러서 서술하는데 미흡하였다. 이 부분은 차후 연구를 통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석사, 박사과정 동안 19세기 후반 대외관계사, 혹은 외교사 분야를 주로 연구하였다. 필자의 연구는 ‘국가’가 중심이 되었고, 국내 문제보다는 대외적 상황을 주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오히려 대외정책의 출발은 내치라는 사실이 절실히 와 닿았다. 내치 없는 대외정책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국가보다는 국가라는 테두리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그 해답을 찾는다면, 개항기 국제관계 연구가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