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18세기 國王의 ‘文治’ 思想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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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18세기 國王의 ‘文治’ 思想 硏究」
  – 祖宗 事蹟의 재인식과 ‘繼志述事’의 실현 –
(2007. 8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윤 정(중세사 2분과)

  본 연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걸쳐 재위한 숙종과 영조, 정조의 사상을 文治의 범주를 통해 조망한 것이다. 이들은 선조의 사적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그 본뜻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논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120여 년에 걸친 재위만큼이나 장기적이고 다양한 양태를 띠고 전개되었는데, 본고에서는 국왕의 정치적 위상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君·臣·民과 연계된 사상적 흐름을 다루었다.   


사진 1)  영조 어진(국중유물전시관 소장)

  中興主의식은 국가의 운영의 주체로서 정책 방향을 왕조의 중흥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창업주 태조와 창업 사적을 재인식하고 표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숙종대 태조 시호의 추상은 威化島回軍을 尊周大義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의 창업은 명 태조에 대한 尊王의 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현실에서 좌절된 효종의 북벌은 태조의 창업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영조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터만 남아 있던 法宮의 상징성에 주목하여 景福宮 遺址에서 조선전기의 사적을 기념하는 행사와 의례를 배설하였다. 여기서 영조는 자신에 대한 忠이 先祖에 대한 진정한 孝임을 강조하는 한편, 黨習의 척결을 중흥의 핵심과제로 제시하였다.

  정조는 永興本宮의 제의를 정비하여 『本宮儀式』을 편찬하였으며, 사도세자를 현창하는 사업과 연계하여 환조를 영흥본궁에 追躋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을 태조와 동일시하도록 유도하고, 창업의 이념을 재현하는 중흥주로서의 위상을 극대화하였다. 이는 건국 이후 3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 건국의 사적을 재해석하여 인조반정 이래의 정책을 합리화하고, 尊周(尊王)論의 구심체로서 국왕의 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君臣分義론은 군신관계를 절대적인 가치로 규정하는 것으로, 절의의 상징인 사육신과 그들의 군주인 단종의 사적을 복구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숙종 17년 사육신의 복관과 24년 단종의 복위는 어린 원자의 책봉에 대한 비판을 명분으로 일으킨 기사환국과 이를 다시 뒤집은 갑술환국 등 일련의 정국운영을 합리화하고, 후계자(경종)의 위상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경종과 자신을 준거로 忠逆의 是非를 확대하며 대립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金宗瑞 등 계유정난 당시의 三相을 추복함으로써 노론사대신과 소론대신들의 忠逆에 대한 현 국왕의 규정력을 전면화하였다.

  정조는 莊陵에 配食壇을 세워 단종과 諸臣을 함께 제사하였고, 이들의 사적을 취합 정리하여 『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이는 時勢와 生死에도 흔들리지 않는 군신관계를 표상하려는 것으로서, 원자(純祖)의 위상 강화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이처럼 18세기 국왕들은 세조 즉위 후 2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단종과 신료들의 군신관계를 이상화하였다. 이것은 弊政을 자행하는 국왕은 公論에 따라 교체할 수 있다는 중종·인조반정 이래 신료들의 논리에 대항하여 국왕의 절대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君師이념은 世道를 회복하고 백성 교화의 주체가 되는 국왕의 역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는 『聖學輯要』의 道統論에 대한 수용과 이해를 매개로 진행되었다.

  숙종은 환국 과정에서 李珥의 문묘 종향과 출향, 복향의 모순적인 조처를 거듭하였는데 갑술환국 이후 이를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이의 『小學諸家集註』를 저본으로 御製序를 첨부한 『소학』을 간행하여 세자의 학습교재로 삼는 한편, 『성학집요』를 처음으로 진강하여 군주 성학을 정비한 이이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표장하였다.

  영조는 蕩平과 均役, 濬川을 추진하는 시기에 『성학집요』를 진강하였는데, 紀綱의 수립이 安民의 실현에 전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周 文王의 사적을 재현함으로써 국왕이 직접 백성 구휼에 나서는 군사를 자임하였다.

  정조는 자신이 세손 시절 『성학집요』를 통해 후계자 수련을 받은 것에 대응하여 『大學類義』를 편찬하고 이를 세자에게 직접 전수하여 국왕 주도의 聖學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반면 入學禮는 배제하였는데, 이것은 師道의 권위를 국왕 아래로 귀속시켜 국왕은 물론 후계자까지 군사로 규정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18세기 국왕들은 찬진 120여 년만에 『성학집요』를 독자적으로 해석 활용함으로써 학문과 사상에 대한 국왕의 규정력을 확보하는 한편 신민 전체를 포섭하는 義理의 주재자로서 통치를 적극화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