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16세기 서원의 성립과 국가의 서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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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16세기 서원의 성립과 국가의 서원 정책」

(2013. 8.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신동훈(중세2분과)


선조 11년(1578) 5월 1일, 이이는 선조에게 서원의 문제를 언급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큰 고을의 서원에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동주(洞主)·산장(山長)의 교원(敎員)을 설치하여 녹봉(俸祿)을 주자’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의 제도를 따라 동주·산장을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은 이황도 제시했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녹봉을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오히려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요청하면서도 “감사와 군수로 하여금 다만 그 진흥하고 배양하는 방법과 공급해 주는 물품만 감독하게 하고 가혹한 법령과 번거로운 조목으로 얽매이지 않게 해줄 것”을 청했습니다(『退溪全書』권9, 書, 上沈方伯). 이황의 기획은 사림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서원에 교원을 설치하고 녹봉을 주자는 이이의 제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이가 기획했던 서원은 이황의 그것과 어떠한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이 논문은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원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이이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조 26년(1593) 8월 3일, 비변사는 서원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비변사가 언급했던 서원의 문제들은 17세기 후반에 나타난다는 서원의 폐단과 흡사했습니다. 또, 선조 28년(1595) 7월 12일, 선조는 무(武)를 소홀히 하는 폐단이 심하다는 것을 이유로, ‘비사액서원을 훼철 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때에 실제로 훼철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답변은 차치하더라도, 조정에서 서원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16세기 서원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문제 해결 방안으로 훼철이 논의되었다는 것은 ‘당시 서원이 가지고 있던 폐단의 골이 꽤 깊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서원은 16세기 단계에 이미 조정에서 인식할 정도로 문제가 쌓여있었으며, 이이는 그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와 같은 제안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1]  파주 자운서원. 강인당(講仁堂)에서 바라본 모습.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신사임당 묘와 함께 조성된 공원 안에 있다.
 ⓒ신동훈

   이이의 개선 방안은 서원에서의 교육을 정상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이가 다른 문제보다도 교육 정상화 방안을 제시한 것은 교육이야말로 서원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강학(講學)과 함께 선현(先賢)에 대한 제향(祭享) 기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생(院生)이 드리는 제향은 그 자체로써 실천적 교육이 될 뿐 아니라, 원생에게 선현을 기리게 함으로써 선현의 도(道)를 본받고자 하는 이른바 ‘교육 이념’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재(齋)와 사(祠)가 결합하여 서원이 되었다는 통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강학과 제향은 각각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원에서의 강학과 제향은 물리적 결합이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오늘날의 서원은 사묘(祠廟)가 되어, 학궁(學宮)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은 서원의 본질을 교육 기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비변사는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면 선(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지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대로 말을 못하고, 오히려 관노비를 투속시키고 기선군(騎船軍)을 분급하며 둔전과 속공전을 끊어주기에 분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수령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관찰사가 나서야 한다고 뒤이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원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수령을 핍박하여 관(官)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얻어내고 있던 것입니다.

효종 8년(1657) 6월 21일 충청감사 서필원은 서원의 문제로 네 가지를 언급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서원에 대한 제수관급의 지원이 관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서필원에 의해 지목된 폐단은 16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16세기의 서원은 이미 교육이라는 본연의 역할보다는 교육을 위한 제반 사항(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관에 의한 재정 지원, 서원 배향자를 배출했을 때 올라갔을 문중의 위상 등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원에서 이러한 폐단이 나타난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원이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사액’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액은 사액을 내려달라는 이황의 요청이 경상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전해졌고, 조정의 논의를 거친 후 명종의 승인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사액이 결정되면, 편액·서책·토지·노비가 함께 하사되었습니다. 국가가 편액을 내려주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준다는 것은 서원을 국가의 교육 기관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액서원은 향교에 준(準)하는 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적으로 만들어 낸 교육 기관이 국가 공인을 받아 향교에 준하는 교육 기관, 다시 말해 국가 공적 기관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서원이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을 것입니다. 서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인정은 서원의 위상을 올려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액을 받으면 준(準)공적 기관의 위상을 지닐 수 있다’는 달콤한 열매는 향촌 사림을 서원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국가가 사액을 주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국가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사액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쪽에서 그 근거로 내세웠던 것이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고, 서원에서의 과거합격자를 배출은 이들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향교와 같이 국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상 국가가 사액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의 교육 활동은 향촌 교화와 맞닿아 있었는데, 특히 삼강오륜 가운데 군위신강(君爲臣綱)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군주의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요소였고, 조정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었습니다. 사액을 통하여 교화의 권위가 군주와 조정, 나아가 국가에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기대했던 교육을 통한 향촌 교화, 다시 말해 국가 인재 양성은 출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액서원이 누릴 수 있었던 국가 공적 지위는 향촌 사림을 서원으로 불러 모으는 역할도 했지만, 향촌 사림이 그 지위를 전유(專有)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서원의 문제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문묘종사라는 도통의 국가 공적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서원 배향자를 결정함에 있어 서원 설립 세력의 사적 기준이 우선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서원의 배향 기준은 설립 세력의 사적 기준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았고, 이는 서원 남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두에 살펴보았던 서원에 대한 이이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이는 서원 교육의 태만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녹봉을 주는 동주·산장을 설치하자고 했습니다. 앞서 파악한 바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이는 ‘서원의 공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니 국가 공적 영역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이의 제안은 기본적으로 ‘서원이 인재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국가 기여가 크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방향을 잡아준다면 발전해 나갈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이의 제안은 여러모로 실행되기 어려웠습니다. 이이의 제안은 서원을 국가관리 대상에서 국영사업으로 전환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서원은 향교와의 차별성을 갖기 어려웠고, 이는 곧 서원을 설립한 향촌 사림의 자율성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 향교의 교수·훈도에게도 녹봉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원의 동주‧산장에게 녹봉을 주자는 것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이의 제안은 현실적인 이유와 더불어 서원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이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후, 서원 폐단에 대한 국가 해결 방안은 규제책으로 나아갔습니다. 인조대 불필요한 서원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나(인조 22년,1644) 효종대 충청감사 서필원의 서원 규제 요청에서(효종 8년,1657) 서원 정책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제 위주의 문제 해결 방식은 관의 관리·감독이 느슨해졌을 경우, 폐단의 재발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서원 폐단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듭되었던 것입니다.


[그림2]  경주 옥산서원. 소수·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초기 서원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보이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옥산서원은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석봉 한호와 18세기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모두 볼 수 있다.  ⓒ신동훈

   저는 국가가 사액을 주었다는 것이야말로 —왕대 별로 개수에서 차이가 보일지언정— 서원에 대한 국가의 정책 기조였다고 보았습니다. ‘훼철’도 국가가 택할 수 있었던 정책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훼철은 그 성격상 ‘오도(吾道) 수호’라는 명분을 잃을 수 있었기에 자주 시행될 수 없었고, 시행된다 하더라도 특정 서원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국가는 서원에 대하여 ‘사액을 통한 장려’라는 기조 아래, 훼철을 비롯한 규제책으로 그때그때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서원을 통하여 국가 인재 양성을 기대했던 국가의 정책은 ‘서원 보급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원에서 길러진 인재들이 국가에 기여했는지, 했다면 얼마큼인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또 17세기부터는 붕당과 서원이 연결되는데, 이것으로 인한 서원의 변화 양상과 그에 대한 국가의 대응 과정도 수행되어야할 과제입니다.

끝으로, 사우의 설립은 서원 설립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사회의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실록』을 이용하다보니 국가의 정책과 개별 서원을 밀접하게 연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이 부분들은 추후에 보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