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한말 원주의병의 발달과정과 운동방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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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한말 원주의병의 발달과정과 운동방략

(2014. 8.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심철기(근대사분과)

  1885년 원주에서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남한강과 섬강을 끼고 있고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평야인 문막평야가 있는 북창소속의 농민들은 환곡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봉기하였다. 이 북창봉기는 원주시내 영창(營倉), 사창(司倉) 소속 농민들의 봉기를 이끌어 냈고 급기야 원주지역 유생들이 강원감영을 상대로 「原州儒民稟目」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원주농민항쟁은 강원감영에 의해 진압당하고 사그라졌다. 그 후 10년 뒤 북창(안창)지역에서는 을미의병이 봉기하는데 원주농민항쟁에 참여했던 가문들이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농민항쟁과 의병운동,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건에 동일 가문들의 참여는 의병운동을 단순히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서 일어난 민족운동으로만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어보였다. 나의 논문은 농민항쟁과 의병운동의 연결고리를 찾는데서 출발하였고, 그 연결고리를 원주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림1] 원주목 지도(광여도)  ⓒ규장각

 원주는 강원감영, 원주진위대가 소재했던 강원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다. 개항 이후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을미·을사·정미의병이 연속해서 일어난 곳이었다. 또 농민항쟁세력이 의병으로 전환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세 시기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의병에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원주를 통해 농민항쟁,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는 내적 운동역량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고, 을미·을사·정미의병의 변화추이와 운동 방략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1896년 1월 원주 안창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이 원주의병에는 원주농민항쟁을 주도하였던 연안김씨가를 비롯하여 원주, 지평(현 양평), 제천 등지의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지역을 달리하였던 이들이 연합하여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은 「原州儒民稟目」의 작성에서 보이듯이 상호간 학문적, 인적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원주의병 봉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춘영 의병장은 원주농민항쟁의 주모자였던 김택수의 조카사위였다. 이처럼 의병 참여자들은 상호 형성되어 있던 관계망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대한 인식과 저항의식을 공유하면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1896년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세력이 1905년 의병운동 · 1907년 의병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의병운동은 내적으로 형성된 운동역량이 일본이라는 새로운 억압적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의병운동 방략의 측면에서 볼 때 1896년 의병운동에서 형성된 운동 방략이 의병운동의 연속성을 통해 1905년 의병운동을 거쳐 1907년 의병전쟁에서 구현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896년 의병운동의 운동 방략을 잘 나타낸 것은 김사정의 「獻策」이었다. 그 중에서 다음의 몇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서울 사대문 및 각처 도회지에 방을 걸어 역적들의 죄상을 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외국공사들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신을 통해 직접적으로 의병봉기의 목적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외국공사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감안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지만 외국공사관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야의 물망 있는 인물을 추대하여 8道의 의병을 지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통합된 단일 의병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셋째, 서울의 양도(糧道)를 끊어 서울의 인심을 크게 변하게 하여 의병의 입성을 기다릴 것 없이 백성들이 일어나 의병과 호응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내부적으로 혼란을 조성하고, 이에 발맞추어 의병이 서울로 진격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인영 의병장은 유인석 연합의병부대가 제천에서 북상할 때 의병부대를 원주 안창으로 이동시켜 재정비하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7년 의병전쟁 당시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이때 그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 방략은 원주의병의 특징이었으며, 이후 의병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그림2] 1896년 원주의병 전개도 ⓒ대동여지도(편집:심철기)

1905년에 일어난 원용팔의병도 운동 방략에서 1896년 원주의병을 잇고 있었다. 원용팔의병의 운동 방략은 크게 4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강원도, 충청도 일대의 의병을 통합하여 원주진위대와 연합하는 전국단위의 의병부대를 출범시키고 서울에 있는 반일세력과 연합하여 친일정권과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병진압세력이었던 원주진위대와 연합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원주진위대 내부에 반일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주진위대와의 연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의병전쟁에서 원주진위대와 의병부대가 연합할 수 있는 고리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둘째, 의병소모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의병운동의 배후로 거점지역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다. 셋째, 원우상 등 중앙정치세력과 연계 속에서 원주, 여주 등지에서 의병에 대한 후원과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다. 특히, 원주진위대와의 연합 추진은 의병운동을 의병전쟁으로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넷째, 일본의 침략여론 조작(일진회 문제) 등에 맞서 격문, 서신, 상소문 등을 통해 의병운동에 대한 실질적 지원 및 정당성 확보였다. 이러한 4가지 운동 방략은 김사정의 「헌책」에서 진일보 한 것이었다.


[그림3] 원용팔 의병부대 이동경로(원주 주천에서 평창까지) ⓒ대동여지도(편집:심철기)

의병의 운동방략은 1907년 원주의병전쟁에서 한층 더 구체화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 몇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관동창의대장으로 이인영이 추대된 것이다. 이인영이 추대된 것은 그가 원주, 여주 일대에서 학문적으로 명망이 있고, 해산군인과도 연계가 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세력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최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관동창의대가 전국의병으로 확대를 염두에 두고 출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관동창의대는 강원도 일대를 총괄하는 부대로 출범하였지만 연합의병을 추진하여 13도창의군의 주축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둘째, 이인영이 해외동포를 비롯하여 각국 영사관과 통감부에 격문을 보낸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한 조치였다. 셋째, 의병 주도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양반유생, 해산군인 등 다양한 세력이 의병전쟁에 참여하였다. 특히, 민긍호를 비롯한 해산군인의 참여로 의병부대의 무기체제와 전술에 변화가 나타났다. 해산군인은 『步兵操典』, 『戰術學敎程』 등 근대 군사교본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을 통해 근대식 소총의 보급과 화승총의 개량이 이뤄져 의병부대의 기습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의병은 유격전을 기본전술로 채택하였으며, 유격전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형성하였다.


[그림4] 의병 주둔지와 일본군 배치 ⓒ대동여지도(편집: 심철기)

1907년 원주의병전쟁의 운동 방략은 1896년 원주의병과 1905년 원용팔의병의 운동 방략을 잇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시기 전개되었던 원주의병을 통해 의병운동이 분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운동 방략을 구축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원주의병은 이념의 변화, 조직의 변화, 참여층의 변화를 통해 의병운동의 구조적 변화추이를 보여주었다.


[사진5] 경성헌병분대 원주관구 ⓒ軍事警察雜誌제4권 제8호, 軍事警察雜誌社, 1910. 8. 10.

  의병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대응한 민족운동이었다. 특히, 1907년 의병전쟁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독립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근대민족국가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연합의병을 구성하여 서울로 진격해 일제를 타도하려는 운동 방략은 궁극적으로 의병세력을 중심으로 한 근대민족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내적으로 축적된 억압적 지배세력에 대한 운동역량이 일제의 식민침략에 대응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민족국가 건설의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좀 더 명확히 확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