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조선 태조~세종대 土産貢物 구성과 戶等制를 통한 공물 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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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조선 태조~세종대 土産貢物 구성과 戶等制를 통한 공물 분정」

(2014. 8.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김창회(중세2분과)

  내 학위논문의 문제의식은 대학원 진학이 결정된 학부 4학년 수업 때 지금은 은퇴하신 선생님의 수업주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수업의 주 목표는 「공납제가 대동법으로 개혁되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수업 중에 느낀 가장 큰 의문은 「도대체 조선은 왜 호구를 조사하였는가?」라는 점이었다.

통설적으로 조선시대의 호구 조사는 군역제도, 부세제도와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군역제도와 호구 조사, 혹은 호적과의 연관성은 이미 많은 부분이 밝혀졌지만 부세제도와는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떤 관련성을 가진 것인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이후로 호구와 부세제도, 군역제도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림 1]  1444년(세종 26)권준 준호구 ⓒ문화재청

우선, 초기의 연구 목표는 조선 초기의 호구수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는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료상의 제약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는 없는, 호의 등급을 매긴 「호등제(戶等制)」의 존재는 당시 단성호적대장 연구로 인하여 방대하게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호적 연구를 이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다. 결론적으로 조선 초기 호구의 성격 문제는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주제는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좌절 뒤에 결국 선택한 문제는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이었다. 「조선은 왜 호구를 조사하였는가?」 이 부분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한 것이 바로 지금의 학위논문이었다. 이 논문의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태종 대부터 세종 대까지의 공물 수취는 요역제와 무관한 호등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그간 공물 분정은 주로 요역제와 연결하여 설명되었다. 즉, 노동력 징발을 통하여 공물을 채취하고 이것이 국가에 의하여 수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에 따라 호등제도 요역 징발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았다. 호등제가 요역 징발에 이용되었다고 보는 근거는 태조 대의 호등제 제정 기사이다. 그 이후의 호등제는 모두 태조 대의 경우에 근거하여 요역 징발에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태종 이후, 특히 세종 초년에는 요역이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징발되었다는 점은 사료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았겠지만 호등제가 민호에 공물을 나누어 정하는, 즉 분정(分定)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명확하게 기록된 사료 역시 세종 대에 단 한 건 뿐이었다. 이러한 조건으로는 호등제와 공물 분정을 연관시키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태종 대의 호등제와 세종 대의 호등제를 병렬시키면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이 눈에 보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황이었고 세종 대의 사료를 태종 대의 상황으로 연결시킬 만한 사료가 필요했다.

석사학위논문 작성 기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서 학위논문 작성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나 스스로도 점차 지쳐 공부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하나의 사료가 눈에 띄면서 논문에 활로가 열리게 되었다. 바로 세종과 김익정, 김종서가 나눈 대화가 기록된 사료였다.


[그림2]  세종14년 12월 18일 김종서 기사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이미지

이 사료에서 김익정이 제시한 공물 분정 개선론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김종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익정의 개선론이 타당하다고 세종에게 조언한 부분은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태종 대에 지방관을 역임한 김종서가 재임 당시에 호등제를 가지고 공물을 분정했다고 언급한 부분이었다. 이로써, 세종 대의 호등제와 태종 대의 호등제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세종 대의 호등제가 공물을 분정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한다면 태종 대의 호등제 역시 공물을 분정하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그 결과 호를 대상으로 하고 호등을 기준으로 하는 호납공물(戶納貢物)이라고 하는 공물이 존재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태종 대 제정된 호등제가 어떻게 세종  대로 연결되었는가 하는 문제, 공물 분정의 기준으로 언급되는 「토지의 넓고 좁음과 인구의 다소」·공물의 총액인 공액(貢額)과 호구수의 관계, 호구수와 호등제의 관계, 호를 나누는 분등 기준이 지속적으로 변화한 원인, 당시 각 호에 공물을 분정하는 양상, 각 호의 수입에 대한 전세와 공물의 대체적인 세율 등을 미숙하나마 나름대로 해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조선 초기 호구수의 성격은 선행 연구에 의하여 해명된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다. 또, 세조 대 이후 사료에 호등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아 호등제가 폐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인데 정말로 그러한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조 대 이후 공물 분정의 양상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요역으로 수취되는 공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요역제와의 관계도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는 조선 전기에 공물 제도가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 즉 당시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대동법 시행 이후의 조건과 비교하여 그 차별점을 살펴보고 조선 전기와 비교되는 후기의 발전상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