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조선 초 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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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 초 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편찬」

(2016. 08.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상민(중세 1분과)

 

평소 조선 초기 사상사에 관심을 두던 중 꾸준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16세기의 ‘성리학적 완성’을 전제로 ‘미완’으로 설정된 15세기적 사상·의식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사회는 시대를 거듭하며 성리학이 사회 깊숙히 침투하였고, 그에 관한 사상적 저술을 심화시켜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문화적 변화 양상들은 성리학의 ‘내재화’ ‘심화’등의 양적인 문제로만 설명하기엔 상대적으로 미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심을 두고 자료를 검토하던 중, 태종·세종대 대량으로 명의 교화서들이 유입되었던 사실과, 유입된 교화서들이 세종대의 관찬 교화서 『삼강행실도』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에 착안하여 교화서들을 검토해 본 결과, 비단 일반적인 도덕을 설파하는 내용이지만, 교화서 간의 내용을 시기별로 비교해 볼 때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화서 편찬·내용 분석을 통해 조선 초의 사상적·관념의 특징을 밝혀내고자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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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三綱行實圖』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석사학위논문 「조선 초 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편찬」은 이와 같은 경위로 작성된 논문이다. 논문의 중심 소재가 되는 칙찬권계서(勅撰勸戒書)란 특히 명초에 활발히 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관찬 교화서들을 총칭하는 분류를 말한다. 태종·세종대에는 한번에 수백, 천부가 넘는 대규모의 양이 국내에 유입된 바 있다, 그런데 일찍이 그들에 대해 여러 가지 추론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해당 서적들이 대부분 국내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결과, 일본 內閣文庫(현 日本 國立公文書館)에 그 중 상당수가 소장중인 것을 확인하여,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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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爲善陰騭』 : 태종대 말, 세종대 초를 거쳐 총 1600권 + 22궤(櫃)가 유입되었다. (日本 國立公文書館本. 직접촬영)

학위논문의 중심 내용은 명 초 황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교화서적인 칙찬권계서(勅撰勸戒書)들이 조선에 수용되어 그것이 『삼강행실도』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명 초 홍무·영락제대에는 국내외적 질서 안정을 위해 황제의 명에 따라 교화서인 칙찬권계서들이 편찬되었다. 이들은 유교사상 그 자체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황제 중심의 사상 통일을 목표로 한 명 초 교화관을 기반으로 편찬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경전 중심의 체제에서 벗어나 열전 방식을 포함한 다양한 형식으로 편찬되었고, 華夷를 통합하고 도·불교와 민간신앙을 포용한 인식을 반영하여 내용이 구성되었다. 나아가 동시에 지방 통치체제의 개편과정에 따라 명 국내의 관학을 중심으로 전파되었고, 예교질서의 구축과정에 맞추어 국내에 전파되는 것과 같이 주변국에도 대량으로 전파되었다.

칙찬권계서들은 조명관계의 국면이 전개되는 과정에 따라 태종·세종대 조선에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편입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고자 하였던 조선에서는 칙찬권계서를 교화서로 파악하고 그 활용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검토과정에서는 국내의 기준에 따라 명의 교화서적 수용 여부에 대해 현실의 명 황실과, 유교적 보편성 간의 조율·선별 또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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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孝行錄』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한편 칙찬권계서들은 여말선초의 윤리관 확장·변용과정과 결부되어 수용되었고 조선의 새로운 교화서 편찬에 활용되었다. 새로 건국된 조선에서는 사회 전반의 의식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으로서 다양한 교화의 방편들이 모색되는 가운데, 고려시기 이전까지의 교화관념을 반영한 『孝行錄』 이후의 새로운 교화서 편찬을 기획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孝行錄』 개편과정에서 고려되었던 요소들에 더해, 앞서 수용된 칙찬권계서들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였다. 칙찬권계서들의 편찬형식을 빌어 국가 주도로 관찬을 택하고, 편찬당시 최근까지의 사료를 적극 활용하였고, 나아가 중국사례의 선별과정에서 칙찬권계서들의 내용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용함으로서 당시까지 도래한 다양한 교화서적들의 양상을 집약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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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孝順事實』 : 「三綱行實孝子圖」 편찬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준 서적. 사진의 판본은 대략 만력 40년(1612) 경 중간본으로 추정 (日本 國立公文書館本. 직접촬영)

『삼강행실도』가 편찬된 내용을 통해서는 여말선초를 거쳐 변화된 교화관이 반영되었다. 우선 이전 『孝行錄』에서 강조되던 孝에, 비혈연적인 忠·烈의 가치관이 첨가됨으로서 집권질서 마련을 중심으로 변화한 교화관을 적극 반영하였다. 구체적으로는 「忠臣圖」·「烈女圖」를 통해 군신·부부관계상의 절의·정절 사례와 간언에 대한 사례를 부각하여 사적 결속을 넘어선 보편적인 질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동시에 「孝子圖」 구성에서, 『孝行錄』의 신이적 보응사례들을 배제하는 대신, 칙찬권계서 『孝順事實』의 전폭적인 인용을 통해 정표사례들을 적극 인용함으로서, 교화 문제에서의 지방관의 역할과 관민간의 질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관민·군신간의 명분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논문을 통해 조선 초 체제정비 과정에서 명 초의 제도가 미친 영향의 일부분을 규명하였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들이 미진한 실정이다. 아직 개별 칙찬권계서들에 대한 분석들이 부족하여 본 논문에서도 그 형식·특징들의 기본적인 측면들의 대조에 그쳤으며, 조선 초 명의 영향 이상으로, 고려 말-원으로부터 이어져 온 교화서 전통의 문제에 대해 원만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삼강행실도』 이후의 국면들에서 한글 창제, 불전의 언해로 나아가는 ‘토착적 양상’들이 발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이후로 이어지는 토착적 윤리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향후 이와 같은 문제들이 감안되어 보다 더 확장·심화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