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원 간섭기 국외流民 정책과 伊里干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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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원 간섭기 국외流民 정책과 伊里干 설치

(2016.08.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진곤(중세1분과)

 

필자는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 어떠한 주제를 가지고 석사논문을 쓸지 고민이 많았다. 석사논문을 쓰기로 했을 때 논문의 주제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논문주제를 바꿔야만 했다. 처음에는 동녕부(東寧府) 설치의 의미를 일본 원정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동녕부를 공부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원 간섭기의 유민(流民)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당시 사료들을 검토해보니 과연 내가 이 주제를 가지고 석사논문을 쓸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던 중 『高麗史』 권28 충렬왕 4년 7월의 한 기사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 기사는 충렬왕이 충렬왕 3년(1277) 발생한 김방경 무고사건의 해명을 위해 원에 입조했을 때 원에 요청한 사항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동녕부의 반환뿐만 아니라 원으로 넘어간 고려 유민의 쇄환 등의 내용이 있다.

 

曾奉聖旨, 己未年已來驅掠人, 許令放還, 年前又有省旨, 北京·東京路·東寧府, 庚午年已來, 逃誘擄掠之人, 亦令推刷還之, 目今, 還者未見一二. 伏望更令推刷, 其有累世居住, 不便移徙者, 於東京路地圓聚, 以充公主行李厮養之役.

 

김진곤 noname01[사진1] 『고려사』권28 충렬왕 4년 7월 이리간 설치 요청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

김진곤 2[사진2]  『고려사』 권28 충렬왕 4년 7월 이리간 설치 요청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

 

위 사료에서 충렬왕은 기미년(1259, 고종 46)과 경오년(1270, 원종 11)에 원 황제의 성지(聖旨)와 중서성의 성지(省旨)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쇄환되어 돌아온 자가 열의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다시 쇄환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쇄환 대상 중 연한이 오래된 사람들은 따로 동경로(東京路)에 모아 공주가 원에 사행할 때 그 역을 담당케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종래 연구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이 공주 사행의 역을 담당하는 것을 고려에서는 이리간(伊里干)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당시 유민의 쇄환 문제와 이리간의 설치 요청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종래 유민 쇄환이나 이리간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순히 유민들을 이리간의 운영에 동원했다고만 설명할 뿐이었다. 유민의 쇄환과 충렬왕의 이리간 설치 요청 및 그 운영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인가? 또는 이리간의 설치 요청 및 운영은 고려의 유민 쇄환 정책과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체 원 간섭기 유민 쇄환에서 이리간 설치 요청과 그 운영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의문점이 석사논문의 주제를 결정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 간섭기 국외 유민에 대한 쇄환 문제 전반에 걸쳐 다루고자 했다. 그래서 이 논문의 제 2장은 충렬왕이 이리간의 설치를 요청하게 된 배경을 고려와 몽골(원) 강화 이후 양국의 유민 쇄환 문제의 검토를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이어서 제 3장 1절은 이리간의 설치 요청과 유민 쇄환 문제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2절에서는 이러한 이리간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검토했다.

 

고려는 몽골(원)과 고종 46년(1259) 고려 태자(원종)의 입조를 계기로 긴 전쟁을 마무리하고 강화를 맺었다. 양국은 강화를 맺으면서 1259년 2월을 기점으로 몽골(원)로 넘어간 고려인을 쇄환하거나 원종 원년(1260년) 8월 이후 고려인의 몽골 투항을 금지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1259년 2월 이후 몽골(원)로 넘어간 고려인의 귀속권은 고려가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고려가 강화의 전제조건인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깨지고 만다. 동녕부의 설치 이후인 원종 11년(1270) 3월 이후 고려는 유민 쇄환 문제의 원칙을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경오년(1270) 이후 발생한 고려 유민에 대한 쇄환을 약속받았다. 이것은 몽골(원)이 고려에게 스스로 쇄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몇 차례의 유민 쇄환은 원 지방 관료들 및 토호들의 방해 및 원 조정의 방조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충렬왕은 충렬왕 4년(1278) 7월 김방경 무고 사건의 해명을 위해 원에 입조했을 때 여러 가지 사항들을 요청했다.

 

충렬왕은 동녕부의 반환 및 재차 유민 쇄환을 강조하고, 연한이 오래되어 쇄환하기 어려운 유민들을 공주 사행의 역에 동원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즉, 이리간(伊里干)의 운영에 유민을 동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결국 이리간의 설치 요청은 유민 쇄환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리간은 중국어로 취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부족, 씨족의 구성원 및 지배대상인 영민(領民)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능으로 보자면 몽골(원)의 소리(掃里)와 유사하다. 따라서 몽골(원)의 소리는 고려에서 이리간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원)의 소리가 제왕, 부마, 공주 등이 원 황제를 알현하러 갈 때 숙박시설로 이용하기 위해 스스로 설치했다는 사실로 보면 원 황제의 부마인 충렬왕도 설치 할 자격은 되었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충렬왕은 부마의 자격을 내세워 이리간 설치를 요청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현실적으로 쇄환하기 어려운 유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조정이 기본적으로 유민을 쇄환하면서도 일부 쇄환이 어려운 유민은 이리간의 설치를 통해 지배권을 확보하는 모습은 13세기 국내 유민에 대한 현거주지 부적 정책과 비슷하다. 이것을 통해서 국외 유민에 대한 고려조정의 정책 변화도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충렬왕 5년(1279) 정월 세조 쿠빌라이는 심주(瀋州)와 요양(遼陽) 사이 지역의 토전을 주어 영성이리간(營城伊里干)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한 고려의 요청이 없었지만 압록강이남(동녕부)에도 고려 스스로 이리간 2개소를 설치하도록 명령한다. 이 조치는 고려의 동녕부 반환 요청 거부에 대한 고려측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세조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영성이리간이 동경로의 유민과 각도의 부민을 동원하여 운영한 것과 달리 동녕부 내 고려인을 이리간 운영에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동녕부 내 고려인 중 일부를 이리간의 운영에 동원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한편, 고려의 입장에서도 동녕부 전체의 반환은 어렵지만 일부 민에 대한 지배권을 이리간 설치를 통해 확보하여 후에 있을 동녕부 반환에 대비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앞서 충렬왕의 이리간 설치 요청과 세조 쿠빌라이의 동녕부 내 이리간 설치 명령은 모두 고려와 몽골(원) 양국 사이에 발생한 유민 쇄환 문제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충렬왕대 이리간의 설치는 동녕부 반환과 유민 쇄환 문제에 대한 고려와 몽골(원) 양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반영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비록 이 논문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다. 특히 제2장에서는 이리간의 설치를 요청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제3장에서는 유민 쇄환 문제에 초점이 잘 맞추어지지 않았다는 논평도 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이리간의 설치를 통해서 고려가 어떠한 효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은 이리간에 대한 사료가 적다는 것이다. 이것은 차후 석사학위논문을 수정하여 투고할 논문에서 해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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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고려사』 권82 병2 站驛 충렬왕 5년 6월 이리간 설치와 관련한 도평의사사의 주청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

김진곤 4

[사진3] 『고려사』 권82 병2 站驛 충렬왕 5년 6월 이리간 설치와 관련한 도평의사사의 주청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