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근대 한국의 제당업과 설탕 소비문화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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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근대 한국의 제당업과 설탕 소비문화의 변화」

(2012. 8.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이은희(근대사분과)

   누구나 압록강 철교를 건너본 사람은 가질 경험이나 대안인 안동현(安東縣)으로부터 인력거를 타고 신의주를 건너오려고 할 때는 철교의 근방으로 가까이 이를 때 팔 구세 십여 세 된 동포소년 소녀들이 십여 명씩 열을 지어 종이에 싼 뭉치 한 개씩을 손에 들고 ‘좀 건너다주서요! 아무 일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애원적으로 연발하면서 인력거 뒤를 따라오는 그들을 볼 것이다. 처음은 기자도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듣고 보니 그들의 손에 든 뭉치는 砂糖봉지요 그들의 요구는 강 이편까지 가져다달라는 부탁이다.(『중외일보』 1930. 8. 27)


바로 이 ‘설탕 한 근과 눈물 한 되’라는 신문기사를 접하면서부터 ‘설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왜 어린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설탕을 밀수하려고 했을까하는 궁금했다. 다른 상품도 아닌 설탕이라는 점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급격한 우리의 태도변화가 느껴졌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명절선물로 네모난 캔에 담긴 설탕을 받고 매우 기꺼워했는데 몇 십 년 지난 오늘날에는 설탕을 건강을 해치는 천덕꾸러기로 취급하고 있는 모습이 스쳐갔다. 설탕이라는 상품을 통해 근대 이후 한국인의 생활변화를 되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림1] 『백색공포-설탕』 ⓒ MBC 2012년 4월 9일 방영

일단 시론으로 1920~1930년대 조선과 만주 사이에 설탕밀수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탐구했다. 밀수가 일상화될 정도로 양국 간의 설탕 가격차이가 컸던 배경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제국주의 열강이 동북아시아 설탕 상품시장을 놓고 벌인 각축전이 있었다. 영국, 네덜란드령 자바 같은 선발 서구제당자본이 동북아시아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고, 일본·독일·러시아 같은 후발 제당자본이 자본 및 상품수출을 통해 맹렬하게 뒤쫒고 있었다. 식민지와 반식민지라는 상이한 국제적 처지에 놓인 조선과 중국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들 열강의 상품시장으로 편입되었다. 대공황이 닥치자 제국주의 열강 간의 가격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양국 간의 가격차이가 현격해졌다. 그 틈에 일어난 균열이 신의주 국경에서 설탕밀수였다.

이를 조사하면서 설탕이 개항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화, 근대화, 산업화가 농축되어있는 상품임을 깨닫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단 맛을 좋아하는 본능을 설탕의 상품화로 구현할 수 있었다. 단 맛 중에 세계적 무역품으로 가장 적당했던 설탕은 근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가장 급격하게 생산과 소비가 증가한 상품이었다. 설탕산업은 각종 먹을거리와 결합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식품업 발달을 견인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설탕은 세계인의 입맛을 지배하면서 체형까지 바꾸어 놓아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엄청난 상품이었다.

특히 주목하게 만든 것은 제당업 및 설탕 가공 산업 발달 뒤에는 서구자본과 근대 국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열강은 과거 아열대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소비되던 설탕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 보호했다. 사탕수수와 사탕무는 무역용 상품작물이었고, 설탕은 세계적으로 열량이 부족했던 시대에 고열량 영양상품이었기 때문에 제당업은 국가기간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근대 국가 보호를 받으며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사탕무 농장, 원료당과 정제당 간의 무역, 산업용 및 가정용 소비가 국제적 분업화하며 사슬처럼 엮여있었다.


[그림2]  파고다 공원의 아이스크림 장수 ⓒ『조선일보』1934.4.17

뿐만 아니라 설탕은 사회 문화적으로도 서구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 상품이었다. 서구는 세계 각국에 한 나라의 설탕소비량 다소(多少)가 문명수준의 우열을 나타낸다는 설탕 문명화·영양담론을 유포시켰다. 한말 대지주와 같은 최상류층이 일본식 중국식 설탕가공식품 소비자로 포섭되었고 이후 상류층을 중심으로 과자섭취를 영양 간식으로 간주하면서 소비량이 증가했다. 1930년대가 되면 ‘아이스케키’같은 저렴한 설탕가공식품이 인기를 끌면서 소비층이 중소도시민에게로 확대되었다. 이 무렵부터 가정용 요리법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상류층 여성을 대상으로 위생, 영양을 앞세운 ‘생활개선운동’의 일환이었다. 가정용 설탕 소비를 부추긴 것은 대외적으로 제당회사·설탕 가공식품업자·식료품상회와 대내적으로 한말 문명개화론 토양 위에서 성장한 일본 유학생 출신 여성이었다. 이에 동조하여 가정용 설탕소비자가 된 것은 현모양처에 기초한 근대적 주부로 여성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젊은 상류층 도시민이었다. 이 속에서 불과 100여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전통 음식문화가 변용되었다.


[그림3]  모리나가(森永) 초콜릿 신문 광고  ⓒ『동아일보』1930년 12월

짧은 논문 1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울러 설탕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간 한국근대사 강의를 하면서 느꼈던 부족함을 해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와 불가분한 관계 속에 연동되는 한국근대사, 누구나 친숙하게 사회경제구조가 개인 일상에 미치는 역사적 변화를 다루고 싶었다. 설탕은 이런 갈증을 해소하기에 아주 적격이었다. 다행스럽게 한국사에서는 생경한 소재였기 때문에 아직 손길이 닿지 않은 자료들이 산재해있었다. 여러 교수님께서 시론적인 연구를 응원해주시는데 힘을 얻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근대 이후 소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한국에서 설탕 수입과 소비행태와 대조했다. 개항 이전 자료를 통해 설탕의 용례 및 요리책을 조사했다. 그 결과 설탕이 왕실에서 귀하게 사용하는 귀한 약재였고 음식 만들 때는 설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꿀과 엿과 같은 감미료를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4]  제일제당 광고  ⓒ『여원』 1967년 3월

근대 이후는 한말, 일제하, 해방 이후 1960년대 초로 세 시기로 나누었다. 각 시기별로 생산, 설탕 가공 산업, 소비문화를 동일하게 배치하고 소비문화는 설탕가공식품과 가정용을 구분했다. 생산에서는 세계무역동향에 대응해 국내 설탕가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지를 살피고 국내제당회사 설립과정을 고찰했다. 일제하 유일한 제당회사인 대일본제당회사(大日本製糖會社) 조선지점 설립·육성 및 해방 후 1953년 제일제당을 비롯한 7개 제당회사가 경쟁적으로 설립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설탕 가공 산업에서는 제과업과 빙과업 같은 설탕가공식품산업이 성장하면서 민족별 자본별로 어떻게 편제되는지를 조사했다. 소비문화에서는 계급차이를 반영하는 사치품이었던 설탕소비를 둘러싸고 사회구성원간의 갈등과 선망이 어떻게 교차되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를 장려하면서 시장이 확장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아울러 공공성이 결여된 채 식품시장이 확대되면서 발생한 위생공백이 사회 문제화 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를 통해 필자는 개항 이후 세계경제 동향 속에서 한국사회에 일어난 소비문화 변화를 조망했다. 국제무역, 공권력(식민권력 포함)의 제당업육성책, 제당업과 제과·빙과업자간의 상호 견제와 공생, 외래 설탕소비문화의 전통음식문화로의 침투와 수용, 설탕소비를 둘러싼 계급격차와 민족차별, 근대 여성의 정체성, 식품과 공공위생과 같은 사회현상을 다루었다. 하지만 논문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식생활의 서구화가 보편화되는 단계까지 미처 다루지 못했다. 앞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경제구조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더욱 밀착하면서 설탕소비가 대중화되는 과정을 조사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근대적 소비문화가 정착되는 역사적 과정을 통시대적으로 새롭게 정리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