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고구려 中裏制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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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고구려 中裏制의 재검토」

(2013.2 동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이규호(고대사분과)

대학원에 석사과정으로 진학한 해 여름방학에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스터디를 한 적이 있었다. 모두 네 명이 함께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고구려사라는 공통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관심사가 모두 달랐다. 그래서 각자 관심 분야에서 읽고 싶은, 혹은 읽었던 논문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기회가 생겼다.

원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정치사에 관심이 있었고, 시기적으로는 6세기 이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개한 논문들은 주로 그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문기 선생님의 고구려 중리제(中裏制)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을 접하게 되었다. 중리제라는 생소한 관제가 흥미를 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예상 밖으로 관련 연구 성과가 많지 않다는 점에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중리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석사 2학기 때였다. 대학원 수업에서 고구려 금석문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고구려 중리제 관련 기초 사료가 되는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던 중리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고 이를 가지고 고구려 후기의 모습을 그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학위 논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었고 본래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를 따라 고구려 후기 정치사에 대해 다루어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미숙한 부분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잠시 잊고 있었던 중리제가 떠올랐고, 주위의 여러 자료들을 뒤적거려 보고 또 선생님들께 조언도 구해가며 고민해 본 결과 논문의 주제는 중리제로 옮겨가게 되었다.

고구려 중리제는 연구 자체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리제에 대한 나름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중리제를 다룬 선행연구들은 대체로 ‘중리’의 의미를 일본의 ‘내리(內裏)’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근시직의 개념으로서 이해하였다. 하지만 중리제가 근시적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확인되고 그 이전의 사례들은 그러한 면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중기의 그것으로 이해되는 중리도독(中裏都督)의 경우 상반되는 개념의 두 용어가 함께하고 있어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각 시기별로 보이는 중리직에 대하여 나름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림 1> 천남생(泉男生) 묘지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중국 소재 고구려 관련 금석문 자료집』)

중리직으로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차대왕~고국천왕대에 나타나는 중외대부이다. 중외대부에 대한 성격파악은 인적구성과 함께 등장하는 관직 혹은 관등과 더불어 진행하였다. 중외대부에 임명된 이들의 인적구성에 대해서는 왕과의 관계, 소속, 보유 관등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이들은 왕실인 계루부와는 소속을 달리하면서도 왕과의 사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측근세력으로서 중앙관직인 중외대부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관등상으로도 대체로 4부에 주로 수여되었던 우태 이상의 관등을 보유했던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외대부에 임명된 자들이 임명 이후에는 소속부를 관칭하고 있지 않다는 점, 임명과정이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추천 후 왕이 재가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중외대부의 중외(中畏=中裏)가 반드시 근시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소속 혹은 지역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으며,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의 기록를 통해 이것이 왕의 소속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중외대부의 역할은『삼국지에서 대가가 대부에 비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각 대가가 자신들의 사자, 조의, 선인을 관리하는 것처럼 중앙의 대가로서 왕의 사자, 조의, 선인을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즉, 당시에는 중리직이 성립하고 존재했지만 근시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중리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리도독에 대해서도 접근을 시도해보았다. 중리도독은 덕흥리 고분군 유주자사(幽州刺史) □진(某鎭)의 벽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래 이 중리도독에 대해서는 국왕 막부의 통솔자이면서 국왕 근시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진의 벽화에 나타났기 때문에 중리도독과 진이 동일인인가 타인인가에 대한 견해차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로는 근시직을 의미하는 중리와 지방장관의 성격인 도독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의 그것처럼 왕의 소속 혹은 거주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중리도독 또한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당시 고구려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에 따라 수도의 규모도 커지게 된 바, 초기의 중외대부 단계에서 더 큰 규모의 행정권 및 독자의 군사권을 지닌 중리도독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렇다면 왜 중리도독관련 기록이 평양지역에 남게 되었는가가 의문시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왕들의 행적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에는 평양에 고구려왕이 머무르는 기간이 길었는데, 이 같은 왕의 이동은 곧 통치기간의 이동, 그에 따른 일련의 조직이동을 상정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중리도독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중국계 유이민 세력이 중리도독 휘하의 장사, 사마 등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았다.


<그림 2> 고자(高慈) 묘지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중국 소재 고구려 관련 금석문 자료집』)

마지막으로는 후기에 보이는 중리직들에 대해 검토하였다. 관련 금석문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우선 후기 중리직은 나름의 승급체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두 가지 갈래로 파악할 수 있는데 먼저 최하위인 선인에서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과 같은 관등에 중리가 결합한 유형, 중리대활(中裏大活)과 같이 관직에 결합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이 위두대형(位頭大兄)부터는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그 마지막 단계는 막리지로 보았다. 특히 이 막리지에 대해서는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에 비정하는 설들이 있는데, 당시 최고위급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위두대형을 상한으로 하고 있고 또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고려하여 보았을 때, 중리직의 최고위인 막리지(莫離支)는 태대형과 같았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같은 후기 중리직의 상한은 적어도 평원왕대로 설정할 수 있으며, 그 인적구성은 왕실 및 일부 귀족에게 제한되었다가 후에는 연씨가문 및 왕실이 독점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고구려의 중리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체계화되고 세분화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하부구조가 확인되지 않고 왕의 하위지배층을 관리하는 중외대부 단계, 도독제를 차용하여 하부구조 및 독자의 군사권을 확보한 중리도독 단계, 그리고 이것이 왕의 근시와 무관계통으로 나눠지게 된 막리지 단계가 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양상은 고구려 왕권의 추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논문을 다시 보니 나름의 생각을 충분히 글로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또 얼마만큼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염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초학으로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정진하여 개선해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