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麗蒙關係의 推移와 高麗의 曆法 運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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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麗蒙關係의 推移와 高麗의 曆法 運用」

(2016. 08.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은혜(중세 1분과)

 

본 논문은 몽골복속기 고려의 역법 운용 양상 분석을 통해 몽골복속기를 거치며 고려의 역법 운용이 큰 전환을 맞이하였으며, 고려-몽골 관계 및 고려-몽골 관계로 인한 고려의 정치적 변화가 고려 역법 운용이 변화할 수 있게 된 직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필자는 크게 두 가지 관심사로부터 본 논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먼저 필자는 학부시절부터 몽골제국과 그 시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에 대한 관심은 곧 동시대의 고려로 옮겨갔다. 둘 중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몽골과 고려를 모두 아우르는 분야를 찾다 결국 고려-몽골관계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석사과정에 입학한 후 고려-몽골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공부하였다.

한편, 필자는 과학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학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기 싫어서 눈을 두게 된 것이었으나 어느새 과학사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마침 학과에 한국과학사를 전공하신 선생님이 계셔 학부 때부터 과학사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분야는 지도 및 천문도와 역법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자가 이에 관련된 논문을 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고려-몽골 관계를 공부하다보니 고려와 몽골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정치적 이슈에 관해서는 이미 선학들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필자는 당시의 정치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려-몽골 관계의 고유한 모습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재를 찾고자 하였다. 이 때 눈을 두게 된 것이 바로 천문과 역법이었다.

몽골복속기 동안 수시력으로의 개력이라는 고려의 역법 운용 상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는 국초 이래 400여 년간 역서를 편찬하면서도 책봉국을 비롯한 중국의 왕조의 역법을 전적으로 따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충선왕 대에 이르러 책봉국 몽골의 역법인 수시력으로 개력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이에 주목하고 이러한 개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려의 역법 운용은 개국 후 400여 년 동안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으나 몽골복속기 초기부터 몽골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하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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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고려사 역지 서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

1260년, 고려는 오랜 항쟁을 끝마치고 몽골과 책봉관계를 맺었다. 몽골은 1262년 정월 고려에 처음으로 역서를 반사한 이후 고려에 매년 역서를 반사하였다. 역서는 대개 고려 사신이 사명을 마치고 고려로 귀환하는 길에 순부되어 11월에서 익년 2월 사이의 불규칙한 시기에 도착하였다. 역서는 제후국의 군주인 고려국왕 개인을 대상으로 반사되었다. 몽골은 책봉관계에 수반하는 의례로서 피책봉국인 고려의 국왕에게 역서를 반사한 것이었다.

1280년 11월, 몽골이 수시력을 반포하였다. 고려는 이에 대응하여 동지원정력(冬至元正曆)을 올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려가 수시력 편찬에 대응하게 된 데에는 첫째, 고려가 수시력의 편찬 과정에서 천문관측이 이루어지는 범위에 포함되었고 둘째, 고려국왕이 ‘부마고려국왕 정동행성승상’이라는 위상으로 표현되는 몽골의 제왕이자 관인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였던 사실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 명령은 역서의 공개적인 진헌을 금지한 것으로 역서 편찬을 비롯한 역법 운용에는 변화 없이 동지일에 이루어졌던 역서의 진헌 의례만이 중지되었다. 고려는 여전히 국초 이래 사용하던 선명력 기반의 역법으로 역서를 편찬하였다.

충선왕은 1308년에 고려국왕으로 복위하였다. 충선왕은 몽골에서 숙위하던 1303-1304년 사이 근신 최성지(崔誠之)에게 수시력을 습득하게 하였고 복위 후 최성지를 서운제점으로 삼아 수시력으로의 개력을 시행하였다. 충선왕은 몽골의 제도를 고려에 체계적으로 적용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관제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수시력으로의 개력은 이러한 제후국 분의(分義)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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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수시력첩법입성, 충목왕 2년(1346) 서운정(書雲正) 강보(姜保)가 편찬한 책으로 수시력으로 역일을 계산하는 방법과 수표를 담았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편 고려에 대한 몽골의 역서 반사 양상은 1280년을 기점으로 변화하였다. 1280년 이전까지 고려로의 역서 반사는 외교적 사건으로 매년 원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칸울루스 전역에 수시력이 반포된 이후 고려로의 역서 반사는 기록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고려로의 역서 반사는 몽골 제 행성으로의 역서 반포와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때에 맞추어 역서를 반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던 몽골 국내로의 역서 반포와는 달리 고려로의 역서 반사는 새해가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상 필자는 몽골복속기 이후 고려의 역법 운용 양상의 변화에 대해 1262년 이후 몽골이 고려에 매년 역서를 반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1280년 몽골의 수시력 반포에 따라 충렬왕이 역서의 진헌을 금지하도록 명령한 것, 1308년 충선왕이 수시력으로의 개력을 시행한 사건에 주목하였다. 또한 몽골의 역서 반사 시스템 상에서 고려로의 역서 반사가 몽골의 직할 행성과는 다르게 이루어졌음도 살펴보았다.

필자는 본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국역사연구회의 중세 국제관계사 연구반에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주제를 전공하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필자가 논문 작성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많은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