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高麗時代 密敎史 硏究」

0
143

나의 학위논문

「高麗時代 密敎史 硏究」

(2012.8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김수연(중세1분과)

‘밀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이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비밀스러움, 장엄하고 화려한 의례, 의미를 알 수 없는 다라니(주문), 독특하고 다양한 만다라, 낯설고 기괴한 모습의 불보살 등 베일에 가려진 듯 신비로우면서도 원색적이며, 경우에 따라 에로틱한 느낌마저 풍긴다. 밀교라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 때문에, 심지어 사이비종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밀교는 다양한 불교사상의 한 흐름이며, 신라시대 이래로 계속 신앙되어 왔다. 특히 밀교는 현세구복적 신앙을 가장 큰 특징으로 가진다. 그 결과 다른 어떤 사상보다도 현실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시대상․사회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고려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하였다.


<그림 1> 철조 천수관음좌상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살피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로, 대표적인 밀교 보살 가운데 하나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고려 불교사의 한 축을 구성하는 밀교가 고려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의 사회적 변화가 고려 밀교사 전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밀교종파, 밀교경전, 밀교의례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밀교에 접근하였다. 이들이 고려시대 밀교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동시에, 유기적으로 고려 밀교사의 제양상(諸樣相)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들 주제에 개별적으로 천착하고 이를 고려시대사의 전개 속에 위치 지음으로써 고려사회와 밀교의 영향 관계를 고찰하였다.

밀교종파는 조직적 측면에서 고려시대 밀교에 접근하는 창이다. 종파는 단순한 승려집단이 아니라, 특정 사상을 연구하고 그에 입각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며 신앙을 확산시키는 바탕이 된다. 고려시대에는 신인종(神印宗)과 총지종(摠持宗)이라는 밀교종파가 존재하였다. 이들 종파를 통해 고려시대에 연구되었던 밀교의 교학, 사회적 활동 및 다라니를 중심으로 한 밀교신앙 등을 살펴보았다.

경전을 비롯한 불교 문헌들은 사상과 신앙을 종적․횡적으로 연계시키는 역할을 한다. 밀교종파가 밀교사상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밀교경전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밀교신앙의 확산 역시 밀교경전을 매개로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인쇄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밀교경전들이 다수 유통되었는데, 이는 당대의 사상 및 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고려대장경과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저술한 불교 장소(章疏) 목록인『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그리고 당시에 간행되었던 각종 밀교경전을 분석해, 고려시대 밀교 사상 및 신앙 경향을 살펴보았다.

의례는 신앙이 구체적 행위로 발현된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여러 가지 재난을 없애기 위해, 왕실과 조정이 주관하는 국가 차원의 밀교의례가 다양하게 개설되었다. 국가적 밀교의례가 개설되면 내적으로는 신앙심을 바탕으로 공덕을 기대하며, 외적으로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적 노력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연출되어, 그 결과 심리적 위안을 가져다준다. 고려시대에 개설된 17종 밀교의례의 양상과 성격을 분석하고, 그 가운데 고려시대 밀교의례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불정도량(佛頂道場), 관정도량(灌頂道場),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심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상의 밀교종파, 경전, 의례는 고려시대사의 흐름 속에서 사상적․정치적․사회적으로 작용하며 고려시대 밀교사를 형성하였다. 밀교교학의 경우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고려전기부터 교학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밀교의 중심 경전 가운데 하나인『대일경(大日經)』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총지종에서는 아자(阿字)를 관상(觀想)하는 관법수행이 행해졌다. 신인종은 티베트불교로부터 유가행중관사상(瑜伽行中觀思想)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종교적 정치행위인 밀교의례는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고려전기에는 밀교의례가 새롭게 개설되고 국가적 의례로서 정착되었다. 밀교의례는 다른 의례들과 차별화되지 않은 채, 고려사회의 위기 극복을 위한 통치의 기제로 활용되었다. 고려후기 무신집권기에는 정치․사회적 혼란과 대몽항쟁 속에서 밀교의 재난 해소 기능이 부각되어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나, 원 간섭기에 접어들어 원과의 정치․외교적 이유 때문에 밀교의례는 대부분 개설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밀교의례 자체는 확산되었다. 선종․천태종 승려들이 밀교의례를 개설하는 사례가 보이는가 하면, 개별 사찰에서 밀교의례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밀교의례의 적용 범위가 국가적 위기 극복 시스템의 테두리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밀교의 다라니신앙은 현세이익의 추구와 정토신앙이 병행되며 전개되었다. 현세구복적 다라니신앙은 밀교신앙의 바탕을 이룬다. 고려후기에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현세구복적 다라니신앙은 더욱 고취되고 다양화되었다. 한편 다라니를 통한 정토신앙은 고려 말에 특히 부각되었다. 고려 말의 불교계는 지옥과 극락을 내세우며 정토신앙이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밀교도 이러한 분위기를 공유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밀교종파와 국가적 밀교의례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만, 현세구복과 극락왕생, 파지옥(破地獄; 지옥에 떨어질 죄업을 없애는 것)을 기원하는 다라니신앙은 불교신앙에 흡수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림 2> 보물 제691호『불정심다라니경』과 경갑(經甲)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라니경전을 작은 경갑에 넣어 휴대하기도 하였다. 다라니경전이 호부(護符)의 역할을 해 각종 재난에서 몸을 지켜줄 뿐 아니라, 경전을 읽지 않아도 몸에 지니고만 있으면 경전에 설해진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밀교는 여러 갈래의 밀교 전통을 수용하였다. 신라의 현세구복적 다라니신앙이 고려로 계승되었고, 송(宋)에서 번역된 밀교경전들이 유입되었으며, 요(遼) 불교계의 밀교적 특징의 영향이 보인다. 밀교의례에서는 당(唐)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으며, 티베트불교의 사상을 수용한 흔적도 보인다. 신라의 밀교전통을 이어받고, 당․송․요․원의 밀교경전과 밀교사상, 의례 등을 수용하여 고려 밀교를 구축한 것이다. 또한 밀교의 다라니신앙은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저류(低流)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라니신앙은 종파와 승속(僧俗)을 넘어 확산되었으며, 이는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하에서도 밀교신앙이 면면히 이어지고 후에 독자적 밀교사상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려시대 다라니신앙이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던 반면, 밀교종파와 밀교의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고려시대 밀교종파의 연원은 신라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아직 독자적 종파로 성립되지는 못하였다. 또 신라시대에도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밀교의례가 개설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특수한 사례일 뿐 밀교의례가 본격적으로 개설된 것은 아니었다. 독자적 밀교종파와 국가적 밀교의례가 아직 대두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가 되면, 사회적 패러다임이 유교로 전환되고 불교는 개인적 종교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불교계를 해체하기 위해 종파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밀교종파도 사라지고, 구심점을 잃은 조선시대의 밀교는 사회나 사상계 전면에 드러나기보다는 불교신앙 속에서 다라니신앙으로 전개되었다. 밀교의례도 불교 자체를 정치의 장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와 조선시대에는 없는 독자적 밀교종파와 국가적 밀교의례는 고려시대 밀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논문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다. 논문 집필 과정에서 맞닥뜨린 가장 큰 어려움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밀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반영하여, 박사학위논문을 보완해 나가는 것을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