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高麗前期 京畿制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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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高麗前期 京畿制 硏究」
(2008. 2. 건국대 사학과 박사논문)

정학수(중세사 1분과)

이 논문은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을 위해 설정된 공간인 경기(京畿)와 그 통치제도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도읍이 중요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도읍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개경과 그 주변 일대를 특별구역으로 하는 경기통치제(京畿統治制)(이하 ‘京畿制’로 줄임)를 실시했다. 고려의 경기는 왕실(王室)을 보위(保衛)하고 왕경(王京)을 보익(輔翼)하는 기보지역(畿輔地域)으로서 지방과 달리 특별시되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다른 도(道)와 마찬가지로 일반 광역행정구역이 되었다.

  경기는 도읍으로 인해, 도읍을 위해 생긴 제도였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경기의설정배경이념을 고려하면서, 고려의 경기는 개경의 주된 기반지이자 배후지였고, 따라서 경기는 개경 사람들의 ‘일상 생활권(開京圈=王京圈)’이었다는 인식을 갖고 고려 경기제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대체로 지금까지 고려 경기제에 대한 이해에 혼란을 준 것은 “고려 경기제를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들은 “왜 고려가 중국의 경기제를 수용하여 시행했는가”라는 문제와 닿아 있다. 필자는 “고려정부가 어떤 목적에서 경기제를 시행했는가에 유념하여, 그 통치이념과 제도의 원리를 실현할 제도적 장치[통치기구]를 통해 나타난 통치행위의 실상”이 고려 경기제의 관점이자 내용이라고 파악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개경과 경기 군현을 아울러 관장했던 ‘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를 주목하고, 이를 주축으로 삼아 고려 경기제의 운영과 변화상을 살펴보았다.『고려사』지리지의 항목 이름으로 등장하는 ‘왕경 개성부’는 특히 문종대의 개경과 주로 경기 통치기구로서의 개성부와의 연관성을 해명하는 매개로, 또한 고려시기 ‘왕경권=개경권’ 인식을 보여주는 통치기구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려 왕조사회의 중심지에 대한 연구는 개경을 중심으로 하나의 시야에서 체계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개경의 기반지요 일상권역으로 기능했던 경기를 ‘왕경권=개경권’이라는 입장에서, ‘왕경 개성부’가 통치했던 고려 경기제의 실상을 검토하여, 지방과 대비되는 고려시기 중앙지역 통치제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했다.

  전체 4장 중 제1장에서는 고려 이전 시기 경기(京畿) 이해와 경기제(京畿制)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국사 속에서 전개되었던 왕기제(王畿制)와 경기제(京畿制)의 운영원리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기 왕기제가 갖는 의미와 특징을 검토하여 고려시기 이전 경기 인식과 전통을 살펴보려 했다.

  제2장에서는 고려 건국 초 경기제의 토대와 그 범위를 검토하였다. 특히 개경과 그 외곽지역이 어떤 배경에서 왕도의 특별구역이 되었는지 그리고 통치제도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개경의 기본 영역과 국초 개주(開州)의 행정편제 내용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림1> 대동여지도에 표기한 개경과 경기 13현 위치

  제3장에서는 995년(성종 14) 적기제(赤畿制) 시행‘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 설치를 살펴보았다. 성종대의 ‘왕경 개성부’ 설치와 적기제〔경기제(京畿制)〕시행은 정치적ㆍ명분적 성격이 강했고,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대왕경제(大王京制)’에 입각한 경기제를 시행한 것임을 논증하였다.


<그림2> 성종 14년 왕경 개성부 개념도

제4장에서는 1018년(현종 9) ‘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의 폐지와 이에 따른 경(京)ㆍ기(畿)의 분리의 의미를, 그리고 1062년(문종 16) 개성부(開城府) 복치(復置)와 경기제 운영을 살펴보았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전근대 왕조사회에서는 통치대상을 대부(大夫) 이상은 예(禮)로 다스리고 서민(庶民)은 법(法)으로 다스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국가의 통치영역[공간]을 중앙(中央)과 지방(地方)으로 구분한 의미는 인간을 신분(身分)에 따라 예(禮)와 법(法)으로 통치대상을 차별한 것과 같이, 영역도 그러한 질서의식에 따라 통치행위가 적용되는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왕권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신분적 질서의식을 영역〔공간〕에 반영, 설정한 데서 출발한 중앙과 지방의 구분의식에는 따라서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보천지하 막비왕토 솔토지빈 막비왕신)”이라는 제민일치(齊民一致)를 추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차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경기는 이러한 중앙과 지방을 구분하는 이념에서 나온 것이며, 도읍이 포함된 경기는 국왕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중앙의 범주였다.

  고려국가의 통치영역은 공간적으로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되고, 중앙은 다시 도읍(都邑)인 개경과 그 주변의 경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는 수도인 개경으로 인해 설정된 도읍의 배후지였다. 고려는 上下 질서의식이 담긴 경기의 이념을 국가의 통치체계에서 실현하려 했다. 그 통치기구가 ‘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였다.

  ‘왕경 개성부’는 해당시기의 경기 인식과 현실에 따라 변화했는데, 그 과정은 경기의 기능들이 처음에는 통합되었다가 점차 ‘왕경 개성부’ 통치체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다른 통치제도로 분화, 정비되는 방향이었다. 경기와 경기제가 신라 때는 개별ㆍ분산적으로 이해되었는데, 고려시기에는 통합과 동시에 기능 분화의 단계이고,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다시 광역의 도제(道制)로 자리잡아 거경시위(居京侍衛) 사대부의 물적 토대가 되는 한편, 국가의 재정ㆍ경제적 기능과 군사적 기보지역(畿輔地域)으로서 기능 등이 재확립된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경기의 이념과 제도는 중국사에서 제민일치(齊民一致) 사상에 따른 급전방식인 균전제(均田制)가 경기의 제도적 완성을 보이는 당(唐) 현종 때(712~756) 붕괴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봉건적 질서의식으로 재무장하는 역사단계에서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고려는 신라의 왕경(王京)과 경기(京畿) 인식의 전통을 계승하여 고려국가의 권위와 위상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사회는 이른바 문벌사회로의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이전의 (고전적) 경기제 운영을 지속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고려전기 경기제 운영은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고려 국왕권의 위상과 변화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전까지 경기에 집중한 개경 지배층의 매장지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그 상징성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기제의 원리에 따른 기능 가운데 왕실의 기반지, 거경시위자의 물적 토대라는 최소한의 기능은 유지한 채 변화의 내용은 다른 방식으로 제도화하였다. (왕경) 개성부를 통한 경기지배 방식의 틀이 고려시기 내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은 고려가 개경 중심의 사회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몽골과의 전쟁, 원 간섭기를 거친 고려후기의 사회변화는 더욱 경기제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무인정권에서 회복된 왕정은 원의 간섭이라는 요인으로 말미암아 왕권중심의 사회, 왕조사회의 중심 지역, 지배층의 (활동공간의) 저변확대를 가로막았다. 고려 말에 이르러 그간의 꾸준한 성장을 해왔던 새로운 사회의 주도세력이 정권을 잡자 경기는 이전과 다르게 해석, 확대되었다. 이는 그만큼 지배층의 저변확대를 의미한다. 사대부의 물적 토대로서의 기능이 과전법(科田法)의 종말과 함께 없어지게 되자, 경기는 더 이상 왕조사회 테두리〔범주〕라는 바로미터의 구실은 상실한다. 결국 이를 통해 보면 거경시위자들의 물적 토대로서 경기제가 기능했을 때가 한국의 중세사회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