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高麗ㆍ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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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高麗ㆍ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2008. 2.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정요근(중세사 1분과)

본 논문에서는 高麗가 건국되는 10세기로부터 《經國大典》의 반포와 더불어 朝鮮의 통치체제 정비가 일단락되는 15세기까지 고려와 조선에서 운영했던 驛制와 驛路網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주로 驛役 담당층, 역로망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구축된 제도적 기반, 역로망 편성으로 확인되는 교통로의 구성, 역로망의 유지ㆍ운영을 보조하는‘院’시설의 설립과 운영 등에 대하여 고려전기와 후기, 그리고 조선초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지속과 변동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역제와 역로망 운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성격을 파악하였다.

  고려전기의 驛은 행정적인 면이나 수취체제의 면에서 상위군현의 하부에 위치하였지만, 상당수의 역은 일반 중소군현의 규모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재정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역역을 담당하는 인원들은 독자적인 지역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내부의 자체 재생산을 통하여 세습적으로 그 직역을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역역 담당층에 대한 신분적 차별 역시 역이라는 지역단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역역 담당층 내부의 신분적 분화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 이후 역로망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기존의 지역공동체적 기반을 복구하는 대신, 다양한 부류의 역 외부인원을 역역에 투입하였다.

  역 내부인원의 자체 충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외부인원의 역역 투입은 조선 개창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노비인원과 역 주변에 거주하는 일반 良人의 驛役 투입이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富實한 양인의 역역 충원은 역과 역역 담당층의 경제기반을 강화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노비와 같이 경제력이 취약했던 외부인원의 역역 정착을 위해서는 고려후기부터 실시되었던 3丁 1戶制의 편제가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역역 담당층에 대한 신분차별이 강화되는 가운데, 역역 담당층 내부에서도 신분적 분화가 더욱 엄격해졌다.


(그림 1) 고려전기 6과체제가 편성되었던 역로망

역로망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역 이용수요를 최소화하고, 역 이용자들의 과도한 이용을 강력히 통제하여 역역 담당층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역 이용의 허가를 제한하고 역 이용자들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 기반의 구축은 모든 시기에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각 시기별로 뚜렷한 차이점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고려전기 각 역도에 파견된 館驛使는 상위 행정단위나 관할 하의 역이 소속되어 있던 군현의 직접적인 간섭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의 관할역도를 관리하였다.

  고려후기부터 역도는 상위 행정단위의 직접적인 예속 하에 두어지는 추세에 있었으며, 조선초기에는 전국의 모든 역도(察訪道와 驛丞道)가 觀察使의 하위단위로 편성되는 역도 운영체계가 성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상위군현과의 행정적 상하관계 속에서도 독자성이 강조되었던 고려전기의 역들은 원간섭기 이후 역로망 복구과정과 선초의 역 운영체제 정비를 거치면서, 15세기에 이르면 소재군현의 실질적인 하부단위로 그 위상이 정립되었다.

  국가경영의 측면에서 시대별로 각 방면 역로망의 중요도를 비교하면 주요 교통로의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대외관계의 변화나 거점도시의 발전 및 쇠퇴는 각 교통로가 지니는 중요성의 유지와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우선 고려전기의 교통로 편성은 이전 통일신라기의 지방편제나 후삼국시기의 지역적 상황을 반영하는 모습이 다수 확인되고 있었다. 즉 이전시기 교통로의 모습을 토대로 개경 중심의 전국적인 교통망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고려초 이래 조선시기에 이르기까지 큰 틀에서는 開京ㆍ漢陽에서 서북 방면이나 동북 방면, 그리고 동남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가장 중시되었지만, 대외정세의 변화와 왕조의 교체를 거치면서 세부적으로는 변화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림 2) 《經國大典》의 내용에 기초하여 복원한 조선초기 한양 이북의 역로망

15세기 험준한 慈悲嶺路 대신 평탄한 棘城路가 강조되었던 사실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북 방면 교통로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군사적 기능보다는 대외교류적 특성이 점차 중시되고 있었다.

  반면 동북 방면의 교통로는 군사적 기능이 지속적으로 중시되었던 가운데, 15세기 한양천도와 더불어 기존의 개경~交州(淮陽) 간 교통로 대신 새로이 한양~회양 간 교통로가 개발되었다. 한편 남방의 경우, 고려중기 南京의 중시와 더불어 개경과 남경을 직접 연결하는 ‘臨津渡路’가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5세기에는 倭人들의 왕래가 증가하면서 동남 방면 교통로의 중요성은 북방 교통로에 필적할 만큼 부각되었고, 한강과 낙동강 수운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선초 군현의 통폐합 및 군현 치소의 이동과 함께 역의 신설과 통폐합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각 지역의 교통로가 재편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院은 역을 이용할 수 없는 민간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시설이었다. 대체로 고려전기에는 원의 설립과 운영에 불교사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중앙정부나 왕실에서도 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가차원의 제도적 틀이 갖추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원’이라는 호칭 또한 통일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말 계속된 외침 속에서 역로망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그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원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토지지급이 이루어지는 등, 원의 설립과 운영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15세기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국가의 토지지급이 이루어졌고, 원의 안정적인 운영은 지방관에 대한 주요한 褒貶 기준이 되었다. 또한 원의 大ㆍ中ㆍ小路 편성을 살펴보면, 역로망과는 달리 북방보다는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남방지역의 비중이 월등히 강조되었다.

  대체로 고려전기에는 개별 역과 역도의 독자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역로망을 운영했다면, 몽골침입 이후 역로망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역로망 운영에 대한 중앙집권적 제어장치는 보다 체계화되고 치밀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모습들은 역 이용수요의 억제나 역 이용자에 대한 감시와 관련된 제도의 강화, 역역 담당층의 충원방식, 역로망을 보조하는 원 시설의 설립과 운영 등 역로망과 관련된 다양한 부분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정제된 역제의 운영은 조선의 개창 이후에도 계승되어,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제도적으로 더욱 안정화되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역제와 역로망 운영의 전반적인 모습은 원간섭기 이래 역제의 정비와 역로망 재건의 결과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 역로망 운영을 고려후기 체제의 연장선상에서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身良役賤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역에 대한 신분적 차별은 이전시기보다 더욱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새로이 역역에 투입되는 인원 중에는 노비층과 같이 신분적 하자가 있는 인원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역역 담당층 내부에서도 신분적 분화가 확대되고 있었다.

  즉 조선왕조의 역역 담당층 확보정책은 외부인원의 꾸준한 투입이라는 측면에서 원간섭기 이래의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역 내부에서조차 신분적 구분을 확대하여 역역이 천역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굳히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5세기 중반 이후 역 주변에 거주하는 일반 양인층의 역역 투입 확대는 역로망의 안정적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방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역으로의 편입이 곧 신분계층적 하락이라는 당사자들의 지속적인 반발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개경을 도읍으로 한 고려의 후삼국통일이 이전시기 경주 중심의 교통로 구성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거란ㆍ여진 등과의 불안정한 대외관계가 역로망의 군사적 기능을 중시하도록 하였다면, 조선초기 한양천도와 군현의 통폐합 역시 기존의 교통로 구성에 적지 않은 변화를 유도하였으며, 명ㆍ일본과의 관계 안정 또한 대외교류를 위한 교통ㆍ통신수단으로서 역로망의 기능을 확대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