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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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 돌베개)

정병준(현대사 분과)


한국전쟁은 학문적으로 이미 주요 쟁점과 주제가 노출되어 있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일종의 포화상태를 이룬 분야이다. 학문적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계보와 산맥이 형성되어 있고, 그만큼 벽이 높다. 또한 누구든 한마디를 보탤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 관심분야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의 한국전쟁사 도전은 고투의 연속이었다. 자료를 다루는 방법과 자세 때문에, 혹은 학문의 보수성, 혹은 도전과 용기의 문제 때문에 역사학과 사회과학 사이에는 시간지체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현대사의 대부분 주제들이 그러하듯 사회과학자들은 의제를 선점하고 홀연 사라졌고, 역사학자들은 미련하고 우직한 우보천리의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궤적을 밟아왔다. 절망과 도전이 짝하였고, 용기와 인내가 뒤를 이었다. 몇 차례의 계기가 있었다. 역시 가장 큰 도전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학부3학년 때 떠듬떠듬 읽은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직 한국현대사 연구가 밋밋한 평지나 구릉상태에 머물렀을 때, 커밍스는 홀연 솟아난 준봉처럼 학문의 높은 경지를 개척했고, 그를 실현해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읽을 수 있던 현대사 텍스트는 송남헌 선생의 『해방3년사』나 김남식 선생의 『남로당연구』정도가 최상급이었는데, 커밍스가 제시한 사실들, 혹은 그의 자료와 해석은 전혀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해방직후 중앙과 지방에서 벌어졌던 혁명과 반혁명의 정치를 복원한 노련한 솜씨는 경탄을 자아냈다. 몇 년 뒤 나온 제2부의 충격 역시 적지 않았다. 아직 제1부의 학문적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받은 내상은 거의 절망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때 나타난 방선주박사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한국현대사는 커밍스에 대한 일방적 경탄과 불공정한 비난의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30여년간 미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한국자료를 발굴해온 방박사는 향도의 북극성처럼 선연하게 미국 자료의 심연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중후반 그가 쓴 자료해제를 따라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구체성 있는 현대사 연구에 첫발을 내딛었다. 방선주박사는 주한미24군단 정보참모부 군사실문서철, 한국전쟁기 미군이 노획한 북한노획문서철 등 한국현대사 연구의 결정적 자료를 발굴ㆍ해제ㆍ간행함으로써 용기 있는 현대사 도전자들을 격려했고, 이끌었다. 내 연구의 절반 이상이 방선주박사의 선행 연구와 노력에 의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현대사분과의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심포지엄이 개최되었을 때 이 책의 주요한 몇몇 장들이 완성되었다. 이때 한국전쟁 전문가인 양영조선생과 러시아문서 전문가인 기광서 선생의 탁견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깨우쳤다.

  역사학은 시대상황과 시대정신, 공개ㆍ발굴된 자료의 현황, 역사학자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과 필자에게 행운이 함께 했다. 여러 계열의 자료들이 공개되었지만, 누구도 그 자료를 엮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ㆍ러시아ㆍ북한ㆍ한국의 자료들이 평면에서 3차원의 세계로 한국전쟁을 형상화해주었다. 역사의 힘은 씨줄과 날줄의 교직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느꼈다.

  이 책은 2005년 겨울부터 2006년 봄까지 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자료가 이끄는 대로 진실에 다가가려던 순진한 노력은 불면과 번민을 요구했다. 쓰고 싶었던 핵심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1950년의 비극을 통해 형상화된 한국, 한국인, 한국 국가의 실체였고, 그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쓰여진 한국전쟁과 다른 접근방법, 시각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이 내전ㆍ국제전ㆍ국제전적 내전 중 그 어느 쪽이든 1950년대 이래 한국전쟁사는 일관된 전형적 설명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1945년 38선 분단­1945~48년간 미소ㆍ남북ㆍ좌우갈등­1948~50년간 남북ㆍ좌우갈등­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서술구조였다. 이런 구조 속에선 한국인들의 갈등구조와 책임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된 한국전쟁 내전설은 이런 구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한국전쟁은 그 기원들을 1948~50년 시기 남북간의 충돌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아니면 1945년 이후 좌우ㆍ남북간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심지어는 1935년 이후 한국 내부의 좌우갈등으로 그 연원을 소급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이러한 서술구조와 맥락에 동의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책의 출발은 38선 분단이며, 미소의 38선 조사와 대책, 1945~48년간 미소의 38선 정책을 추적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나아가 1949~50년 시기 남북간 38선 충돌 역시 이러한 미소의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되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설명틀은 낯선 구도일 것이다.

  이 책은 1949~50년 시기가 한국전쟁을 배태한 자궁이자 전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38선 충돌이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단언했지만, 놀랍게도 미국ㆍ북한ㆍ소련의 자료들은 이 시기의 충돌이 전쟁을 형성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1949년의 기억을, 남한은 1950년의 기억을 전쟁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38선 충돌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1950년의 대폭발을 이뤄냈다.

  이 책은 일종의 군사사이자 전쟁사로 쓰여졌다. 이런 선택은 군사사가 미소의 영향력과 결정력, 전쟁의 실체를 잘 드러내주는 분야사이기 때문이며, 기존의 정치사적 설명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한 미스테리들을 해명해주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는 이미 극한까지 검토된 바 있으며, 남북한 정치사를 강조할수록 내전적 면모가 강조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은 논쟁적이지만 특정한 대상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다만 브루스 커밍스의 해주북침설 혹은 남침유도설에 대해서는 현재의 자료수준에서 그 오류와 진실을 해명했다고 자부한다. 소련 해체 이전에 쓰여진 커밍스의 저작들은 시대적 상황과 자료적 한계, 저자의 시각에 의해 그가 이룩한 학문적 성취를 빛 바래게 하는 오류들을 범했다.

  첫 번째는 가장 설득력있는 모자이크로 제시된 소위 남침유도설이었다.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이 가설은 한국정부가 신문기자의 오보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많은 이들을 지적으로 매혹시켰다.

  그렇지만 이는 1950년 6월 25일 옹진반도의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군은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해 방어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방향에 대한 북한군의 공격이 정점에 도달할 경우, 주공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옹진주둔 17연대와 8사단의 북진공격을 상정했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된 6월 25일 아침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해주공격계획이 상정되었지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오전 중 옹진 17연대는 전투서열이 붕괴되어 철수 중이었기 때문이다.

  후퇴하던 17연대는 양분되었고, 통신이 두절된 1개 대대급 병력은 6월 30일 오전까지 행방불명되었다. 혼란스런 전황 속에서 17연대 지휘부ㆍ육군본부ㆍ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 부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발표했고, 이들이 인천항에 입항하는 6월 30일까지 맥아더사령부의 정보상황판에는 이 부대가 해주를 점령한 것으로 표기되었다.

  신문기자의 오보도, 그렇다고 해주공격이 실재했던 것도 아닌, 방어와 선전,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과 오판, 북한의 잘 기획된 선전의 3자가 기묘하게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의 기원들을 추적한 미덕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은 던져져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개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시작이자 끝인 주제였으며,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다.

  진실은 북한이 1949년 3월이래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전쟁 개념 하에 1950년 6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한국군의 선제공격 혹은 북침을 위장하는 정교한 기획을 수립했다는데 있었다. 또한 이는 대외적으로 표방된 위장된 개전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주민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짓 진술이었다.

  이 책은 1949~50년 시기 동안 남북간의 38선 충돌을 통해 형성된 북한의 한국전쟁관ㆍ개전계획과 그 실체를 한편으로 남한과 미국의 한국전쟁관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 책은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불현 듯 폭발했다고 보지 않는다. 1948년 정부수립 전후부터 이성적 판단력이 있는 한국지성들은 전쟁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전쟁사들은 모두 남북ㆍ좌우갈등만을 강조해 온 결과, 이미 1948년부터 전쟁이 “확정적 예견”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김구는 1949년초 유엔한국위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한에 상반된 정권과 군대를 만듦으로써 전쟁의 씨앗을 뿌린 미소가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철수하는 것은 “남의 洞里에 와서 싸움을 붙여놓고 슬쩍 나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1949년 7월 김구의 암살 직후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과 만난 김규식은 남북간의 전쟁을 회피할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 한국에 부임한 지 불과 1년도 안되었던 햇병아리 외교관 헨더슨 역시 김규식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누가 선제공격을 할 것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전쟁이 임박했으며, 현상태로는 회피할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남ㆍ북한, 미국의 입장은 비역사적이거나 주관적이다. 이 책은 북한의 전쟁관을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으로, 남한의 전쟁관을 ‘진정한 불의의 기습남침’으로, 미국의 전쟁관을 ‘정보의 실패’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모두 1949년과 1950년 중 특정 시점을 강조하는 주관적 판단과 정치적 해석의 결과였다.

  이 책은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한국의 목소리들을 중시했다. 1948년 문화인 108인 선언은 분단정부 수립이후 “민족상호의 혈투”가 있을 것이며, 이 전쟁은 “內爭같은 國際戰爭이요 外戰같은 同族戰爭”이라고 규정했다. 즉 남북분단에 뒤이은 전쟁이 있을 것이며, 그 전쟁은 내전(內爭)같은 국제전쟁이요, 국제전(外戰)같은 내전(同族戰爭)일 것이란 예견이었다.

  한국전쟁사를 본 이래 가장 가슴아픈 대목이자 비수같이 예리한 지적이었다. 즉 한국전쟁의 성격을 둘러싸고 외국학계와 국내 학자들이 수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당대의 한국인들은 전쟁의 임박과 불회피성, 전쟁의 성격과 책임 등에 대해 일종의 합의된 공론을 갖고 있었다.

  학자들은 한국인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었던 전쟁의 성격을 애써 다른 방향에서 찾고자 했을 뿐이다. 이 책의 입장은 전쟁이 개전 당시부터 내전과 국제전적 측면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내전적 외형이 강조된 국제전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데 있다.

  이상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뼈대이자 핵심이다. 그 외의 많은 논쟁점들이 이 책에서 다뤄졌다. 1949~50년 시기 정치사ㆍ전쟁사와 관련된 수많은 사실의 발굴, 교정, 복원, 평가가 시도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지금까지 한국전쟁 연구가 50년이 되었지만 정부 수립이후 남북한의 정확한 병력규모, 개전시의 병력규모조차 알지 못했다. 통계에 따르면 1949년 초부터 8월까지 한국군의 병력ㆍ화력이 북한군을 압도했고, 1949년 8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군 병력ㆍ화력이 대등해지기 시작했고, 1950년 5월에 이르러야 역전이 가능해졌다. 개전초기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한국군을 능가했지만, 공격자에게 통상 요구되는 2~3배의 압도적 규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둘째 개전 초기 북한군의 실상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북한군은 1950년 5월에도 대남공격용 작전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이를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 주요 작전ㆍ정찰계획은 소련군사고문단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후 번역해야 했다. 북한군 지휘ㆍ참모부의 무능력과 실체는 북한노획문서와 구소련문서를 통해 잘 드러났다.

  셋째 1949년 2월의 해주방화사건, 5월 옹진ㆍ개성전투와 육탄10용사, 국회프락치사건의 진상, 7월의 북침설과 호림부대 북파, 주요 38선 충돌지점의 전투실상, 1950년 북한의 38선 충돌강조 등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그 실체가 규명되었다. 주제와의 긴장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논쟁적 사안들에 대한 해명이었다.

  이 책은 그간의 한국전쟁사와는 달리 매우 미시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북한군의 공격작전계획의 出自와 다양한 버전의 검토, 노획문서를 통한 북한군의 실체 접근 등은 전쟁사 연구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한다. 북한군의 단대호나 전투서열, 병력규모, 전투상황 등에 대한 접근도 이 책의 주요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전쟁에 미친 스탈린과 소련의 영향력ㆍ역할에 대한 평가이다. 지금까지 구소련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이를 주도한 ‘신전통주의’ 학자들은 내전설을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의 주된 책임을 김일성ㆍ박헌영에게 둠으로써 역설적으로 내전설의 입지를 강화시켜왔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개전결정, 화력ㆍ병력의 강화, 공격계획의 입안 등 주요 정책결정 과정을 분석하며 김일성ㆍ박헌영의 주도 하에, 스탈린이 결정한 것으로 판단했다. 북한과 소련이 담당하는 책임과 역할의 범위가 달랐다는 생각이다. 이는 확장된 추가 연구성과를 필요로 할 것이다.

  많은 한국전쟁사 연구들이 자신의 정치지향에 따라 학계보다는 언론에 의해 평판을 얻고, 때론 잃었다. 그렇지만 불과 수 년 내에 엉터리 주장의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이 책을 쓰는 내내 자부심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사실과 자료의 두터운 방벽을 세웠지만, 형형한 안목으로 뚫어볼 진정한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이제 한국전쟁사 연구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은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엔 두려운 주제이다. 300만이 살상되었고, 한반도는 유혈의 바다였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후 삼국유민(三國遺民)의식은 12세기까지 지속되었고, 1980년 광주항쟁의 핏값은 한국현대사에 20여 년의 시간을 요구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여파는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더많은 고통과 희생, 인내와 결의의 시간을 요구할지 모른다. 두렵고 삼가는 마음뿐이다.

  목전에 임박해 회피할 수 없는 전쟁을 우려하던 김구의 투박한 호소와 이성적이지만 병약했던 김규식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바로 보고 똑바로 나아가는(正觀邁進)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치열한 학문적 도전과 비판이 더불어 함께 한다면 이 길에서 외롭거나 쉽게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