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 『한국고대사회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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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
– 『한국고대사회경제사』(2006, 태학사) –

                                                                                              전덕재(고대사분과)

학부시절에 왠지 모르게 사회경제사는 재미없고,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1980년대 초반의 암흑같은 시절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사회경제사 연구를 비판하던 일부 선생님들의 영향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선배·동료와 함께 시대를 고민하고, 참된 역사연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을 알게 되었고, 사적 유물론과 사회구성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도리어 역사연구는 사회경제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버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덧 학위논문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사회구성체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다. 그와 관련된 고대 일본과 중국의 연구성과들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石母田正의 『日本の古代國家』(岩波書店, 1971년)를 매우 감명깊게 읽었다. 한일관계에 관한 그의 시각은 무척이나 눈에 거슬렸지만, 사회구성체적인 시각에서 일본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고대사회의 공동체적인 관계가 철제농기구의 보급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해체되었음을 설파한 대목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이후 본인은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경의 보급에 초점을 더 맞추었다.

70~80년대에 나의 고향 강원도 산골마을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논ㆍ밭을 갈기도 하고, 경운기를 이용하여 논ㆍ밭을 갈기도 하였다. 특히 경운기를 이용하면, 훨씬 품이 적게 들고, 더 넓은 면적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경으로 밭갈이를 하기 전에는 삽과 비슷한 모양의 따비로 밭을 갈아야만 하였다. 그러하였을 때보다 우경으로 밭같이를 할 때, 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더 넓은 면적의 갈이작업이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나아가 퍼뜩 그로 말미암은 읍락공동체의 해체를 전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농업사와 고고학 관련 연구성과들을 조사하면서 삼국시대에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으로 읍락공동체가 해체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석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였고, 후에 이것을 수정 보완하여 「신라 주군제의 성립 배경 연구」(『한국사론』22, 1990)로 발표하였다.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하였다. 널널한 군대생활(?)이어서 사회경제사 연구를 더 진척시켜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바로 잡으려는 준비에 몰두하였다. 군 생활을 하던 중에 울진봉평신라비와 영일냉수리신라비가 발견되었다.

군 제대 후에 먼저 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두 비문에서 특히 신라 6부에 관한 문제가 필자를 사로잡았다. 1990년대 초반에 사회경제사 연구는 잠시 뒤로 미루어두고 신라 6부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였고, 마침내 『신라 6부체제 연구』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였다.

신라 6부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에 세상도 참 많이 변해있었다. 공산주의 본산으로 자처하던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도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의 실험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도 이와 더불어 지나치게 사적 유물론이나 사회구성체론에 경도된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한 역사연구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필자의 연구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한국고대사 체계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새삼 갖게 되었다. 신라 6부 연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에 본인은 새로운 시각에서 사회경제사 연구를 더 진척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본인 역시 통일신라를 중세사회로 보는 학설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때 읍락공동체가 해체된 삼국 중반기부터 중세사회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이와 같은 섣부른 입론은 주변 나라의 조세제도와 경제제도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깨지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통일신라=중세사회론이 촌락문서나 고려시대의 경제제도 연구에 기초하였는데, 고대 중국이나 일본의 적장제도, 조세제도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국내의 연구 수준이 매우 초보적이라는 인상을 짙게 받았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제기된 통일신라=중세사회론의 기반이 매우 허약하다는 생각에 미쳤다.

본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통일신라의 수취제도와 경제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특히 촌락문서에 보이는 호등(戶等)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였고, 나아가 녹읍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때 주변 나라의 연구성과와의 비교 검토를 연구방법론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에서도 삼국과 마찬가지로 인신적(人身的)인 지배가 중심이었고, 고려시대에 비로소 결부제(結負制)에 입각하여 조세를 부과하는 전조제(田租制)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할 수 있었다. 즉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토지세의 비중이 크게 증가되었음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공납제적인 수취구조가 삼국 중반기에 개별인신적인 조세제도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신라 품주(稟主 ; 租主)의 성격 변화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책은 바로 부세제도의 변천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고대의 사회경제사 흐름을 체계적으로 조망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여기서 본인은 삼국초기에 공납제적인 수취구조가 삼국 중반기에 개별 가호의 경제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가호마다 균등하게 부세(租와 調)를 부과하는 개별인신적 조세제도로 전환되고, 통일신라기에 가호의 경제형편을 고려하여 호등(戶等)을 설정하고, 호등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부세(租와 調)를 부과하는 세제를 실시하였다가 나말여초 농민들의 항쟁으로 인신적(人身的)인 지배에 기초한 고대의 세제(稅制)가 부정되고, 고려시대에 결부(結負)에 따라 수확량의 10분의 1을 부과하는 전조제(田租制)가 확립되었음을 논증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수취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식읍이나 녹읍제, 나아가 지배체제도 그에 조응하여 변화되었음을 추적하려고 하였다.

본 책에서 필자는 나말여초가 고대와 중세의 기점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3시기 시대구분법이 갖고 있는 규정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사회경제사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한계와 부족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으로서는 본 책이 지난 20여 년에 걸친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는 점에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