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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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2006, 고즈윈) –

                                                        박종기(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1987년 당시 학부 4학년인 제자 홍석화군이 헌 책방에서 한적본 『고려사』 1책을 표지만 보고 얼른 줏어들고 필자를 찾아왔다. ‘고려사’라는 표지를 본 순간, 고려사 전공이니까 당연히 가지고 읽어셔야 할 것이라는 스승에 대한 갸륵하고 애정어린 생각이 필자의 연구실을 두드린 것이다. 그러나 제자의 생각과 달리 그 책은 단순한 『고려사』가 아니었다. 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 고려편을 저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보완할 만한 내용을 책의 여백에다 빼곡히 적어 놓은, 순암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수택본 『고려사』였다. 전체 50책으로 묶인 책 가운데 1책이었다. 1993년 이 내용을 학계에 발표하였다. 그 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나머지 수택본의 소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면서 적지 않은 발품을 팔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06년 1월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자료 검색을 하다, 1933년 촬영된 『고려사』 조충(趙冲) 열전의 첫 장을 찍은 유리원판 필름을 확인하였다. 책의 여백에 주기(註記)된 필체는 필자의 눈에 그토록 익숙한 순암 선생의 필체였다. 순간적으로 몸과 정신이 멈추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나머지 수택본의 단서를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나머지 49책의 수택본을 모두 규장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연하게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를 방문한 것은 아니다. 이미 장서각과 국립도서관 등의 사이트를 모두 뒤진 후였다. 지난 해 하반기 모 언론사의 문화부 기자가 순암 안정복의 수택본을 분석한 필자의 논문을 흥미있게 읽었다면서, 이 과정을 쉽게 대중에게 소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기자의 감각은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떠밀리다시피 출판을 하기로 결정을 한데에는 동료 연구자들조차도 발표 사실을 모르는, 『성곡논총』이라는 그야말로 깊숙(?)한 곳에 발표한 글을 찾아서 읽고 격려를 해준 사실에 대한 감격(?)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수택본의 존재를 알 수 없는 한 글을 쓴다는 일은 좀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약속을 한지 6개월이 훌쩍 지났다. 다시한번 나머지 수택본의 존재를 찾는 시늉이라도 하고, 그 사실을 한 두 줄 담아야 글이 될 것만 같아, 주요 도서관과 기관의 홈페이지를 뒤지는 작업에 매달리다 결국 단서를 잡게 된 것이다.

금년 연초에 쓰기 시작하여 1학기가 끝날 무렵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수 십여 편의 논문과 몇 권의 저서를 써보았지만, 이번만큼 신나게, 그리고 단숨에 글을 써 본적이 없다. 그 심정은 부모님이 사준 새 신발에 감격하여 지친 줄도 모르고 냅다 심부름길을 단숨에 달렸던 필자의 어린 시절 감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줄곧 찾으려 했던 자료를 찾아내었다는 감격은 아직도 여전하다.

대중역사서로 집필을 시작한 이상, 무언가 볼거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조선시대사에 문외한이라 ‘조선왕조의 역사가 안정복’ ‘안정복과 동사강목’이라는 주제는 너무 부담이 되었다. 필자가 확보한 수택본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까닭에 ‘고려사 연구자 안정복’이라는 제한된 시각에서 글을 쓰는 편이 편할 것이고, 또한 고려와 조선왕조를 넘나드는 글쓰기가 오히려 독자들에게 신선한 느낌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한편 250년 전 역사가 순암 안정복 선생과 만나면서 필자가 느꼈던 생각과 연구실 생활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욕심도 이 책을 저술한 또 다른 동기가 된다. 다음의 얘기는 필자의 지나친 욕심이지만, 이 책을 통해 평범한 한 역사연구자의 일상을 진솔하게 그려내면서, 이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이나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역사연구의 한 단면을 맛보기로 보이려고 했다.

수택본을 통해 순암 선생과의 잦은 대화를 하면서 선생의 역사학이 250년 후의 우리들에게 남긴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어떤 식으로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필자는 순암 선생의 역사연구를 살피면서, 예전부터 즐겨 읽던 명저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가위와 풀의 역사’라는 단어를 종종 떠올리곤 하였다. 현실을 모르는, 앞  뒤가 꽉 막힌 답답한 역사가에게 경멸의 뜻으로 붙여준 단어로만 생각했던 것이 순암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이 단어가 새로운 이미지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철저한 고증과 수많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실증 작업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지만 역사연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이 작업에 꼭 필요한 도구가 바로 가위와 풀이다. 순암 선생은 ‘가위와 풀’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활용한 역사가이다. 이 단어를 잘못 읽거나, 아예 무시했던 것이 그간의 우리 역사학이 아닌가? 순암 선생이 필자에게 남긴 무언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