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추적60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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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60분 (2)

한상권(중세사 2분과)

4. 회사나 방송국에서 노동조합을 왜 그대로 두는지 모르겠어요

최철호 피디와의 인터뷰가 길어지면서 다른 분야에 대한 이사장의 생각도 자연 드러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동운동에 적대감이었다.


피디: 학내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해직이라는 재임용탈락이라는 조치로 대응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사장: 아니 그럼 이렇게 보겠어요. 만일 회사에서, 관공서나 회사에서나 무슨 방송국에서나 이렇게 회사의 취지에 반대하고 회사의 건설적인 옳게 운영하는데도 파괴적으로 말이에요. 예. 요새 그런 것 많죠. 뭐 방송국에서도 노동조합이고 MBC인가 뭔가 그러고 말이에요. 뭐 그런 거 많잖아요. 노동조합도 그렇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난 왜 그대로 두는지 모르겠어요. 노동운동이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에 무슨 플러스가 됐나요. 고임금 되고 국제경쟁력 없어지고 한국경제 다 망쳤죠. 기업가들 의욕 없어지게 했고 국가적으로 무슨 플러스가 됐나요.


이사장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회사에서, 국가에서 국가질서를 파괴한 사람은 당연히 법의 제재를 받아야 됩니다. 어느 단체에서 어느 조직이건 그 조직을 파괴하고 건전한 운영, 학교라면 면학분위기라든가를 파괴하는 사람 암적인 존재는 제거해야죠.



그 걸 못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첫째, 말하자면 학교라면 총ㆍ학장 들이 지금 총장 이사장 재단에서 비리가 있다거나 그러면 약해서 못합니다. 자기도 당할 테니까 말이에요. 못합니다.

둘째는, 거 뭐랄까 안일무사적인, 뭐 자기 임기만 챙기면 되지 말이야 하는 뭐, 또 학교 경영 열심히 않는 사람들. 이사장이라면. 아 편안히 지내지 뭐 구태여 싸울 필요 있느냐 말이야. 이런 사람들이라면 방치하죠. 그렇지마는 옳게 운영해야 되겠다. 학교가 건전해야 되겠다 말이야. 이럴 땐  어떻게 거 그대로 둘 수 있어요.


이사장은 내부 비판세력을 암적인 존재로 보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재단의 전횡에 따른 교수의 교권, 학생의 학습권, 직원의 노동권 등 기본권 침해에 대한 저항을 불평불만 분자들의 불순한 소행으로 돌리면서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사장은 평소에도 자신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정도(正道)를 걷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사장의 이러한 소신은 1997년 6월 24일 교육부 장관에게 보낸 각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덕성학원 및 덕성여대가 교육의 사안감사를 받게 된 것에 대하여 본인의 부덕의 소치로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동안 이사장 본인은 오로지 학교를 위한다는 일념에서 지나치게 정도를 걸어왔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대학구성원들과 마찰이 생긴 것 같으며…”라고 하였다. 정도경영과 개혁추진을 덕성여대 분규의 근본원인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성여대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을 불온시 하는 이사장의 발언을 접하고 경악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학을 경영하고 있다는 참담한 현실에 분노하였다. 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직의 대표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데에 한없이 부끄럽고 절망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이사장의 행위와 관련해서 사회와 학계로부터 심한 비난과 냉대를 받고 있는 우리 덕성 가족들로서는 앞으로 닥쳐올 관련 단체들의 비난에 걱정이 앞선다.”고 하였다.

  반면 1997년 10월 익명으로 교내에 살포된 이사장을 변호하는 문건에서는, “이사장의 잘못은 크게 보아 교직원 월급을 비교적 적게 주었다는 것과 작은 일까지 간섭했다는 것, 그리고 싫고 좋음을 너무 솔직하게 표시한다는 것 이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이사장은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지나친 솔직함’으로 미화하였다.

  한편 이사장을 변호하는 문건에서조차 “특히 월급 적게 준 것은 곧 고쳐야 할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사장은 교직원들에게 월급을 턱없이 적게 주었다. 덕성여대 교수들의 급여수준은 전문대 가운데 비교적 하위급인 대전의 모 전문대보다도 못했다. 1997년 10월 학교당국이 “개교 이래 최대의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였다”고 실토하면서, 무마책으로 내놓은 처우개선안의 1항이 “교직원의 보수 수준은 서울 시내 사립대학의 평균수준에 달하도록 조정한다.”는 것이었으며, 2항이 “1997.9.1부터 직급별 한계호봉제를 폐지하고 단일호봉제를 시행키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미운털이 박힌 교수는 계속 승진을 안 시켜줄 뿐만 아니라 직급별 한계호봉제를 실시하여 월급 인상을 최소화하였다. 그 결과 대학예산 가운데 인건비로 지출하는 금액의 비중이 ‘94년 34.9%, ’95년 34.7%에 불과하였다. 4년제 대학 대부분이 인건비로 지출하는 금액의 비중이 45-55%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덕성 교수들의 급료수준이 매우 열악한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수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덕성여대에 온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면서 1년이 지나면 통장이 하나씩 생긴다고 자조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통장이란 마이너스통장이었다.

반면 자신은 돈 씀씀이가 헤퍼 1996년 해외 과소비자로 지목돼 검찰로부터 자금출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해외 과소비 사범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에 따르면, 1996년 10월 29일 이사장이 최근 1년 여 사이 해외여행 중 숙박비 및 식비로 지불한 것으로 드러난 22만 달러(약 1억 6천만 원)의 출처에 대한 추적조사에 나섰다. 이사장은 1995년 6월부터 10여 차례 호주ㆍ하와이 등을 드나들며 최고급 호텔에 투숙, 하루 평균 150만 원 정도를 쓴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봉급이었다.


<사진 8> 서민 주눅 들게 하는 해외호화쇼핑, [서울신문 1996.10.30, 백서 1, 370쪽]

당시까지만 해도 이사장은 독신이었다. 학내에 살포된 그를 변호하는 문건에서는 독신인 까닭을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이사장은 일찍이 1950년대에 미국 죠지 워싱턴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학교를 키울 안목을 직접 보고 배운 뒤에 1960년대부터 덕성여대에서 교수 생활부터 시작하여, 1970년에 학장이 되고, 1976년에 쌍문동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확정하고 그 때부터 학생 500여 명의 작은 단과대학을 현재 5000명 재학생이 있는 종합대학으로 키워왔습니다.

이사장은 유학하다 돌아오니 이미 혼기가 늦었고 중매로 들어오는 혼처는 자신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인지 재산이나 지위를 넘보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이래저래 미루다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대신 학교를 가족처럼, 자신의 전부로 여기고 학교일에 모든 열정을 바쳐왔습니다. 또 고령에도 외국의 유수 대학에 학생으로 수업을 들으면서 그곳에서 배운 것을 덕성 대학 교육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국내 어떤 대학 이사장이 몸소 학생도 되어 나이를 잊고 공부해 가면서 학교 일을 합니까?



  독신인 이사장은 신라호텔에서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이사장은 신라호텔에 머물면서 학교와 관련된 각종 업무를 총장에게 직접 지시하였으며, 매주 화요일 “법인ㆍ대학연석회의(참석: 총장, 법인국장, 대학의 기획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사무처장)를 주재하고, ‘96.9.1부터 ’97.6.17 사이에 신라호텔에서 수시로 “대학교과과정 간담회”, “대학입학전형관리소위원회” 등을 개최하여 학교운영에 관한 사항을 지시ㆍ 협의하여 왔다.


<사진 9> 이사장이 신라호텔에서 총장에게 보낸 팩스, 백서 2, 255쪽)

  이사장이 호텔에 머물면서 대학 학사행정에 간섭한다는 데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덕성여자대학교와 학교법인 덕성학원은 다음 내용의 해명서를 조선ㆍ 중앙ㆍ 동아ㆍ 한국일보 등 중앙 일간지에 5단 광고로 실었다.


<사진 10> 덕성학원사태의 진실을 밝힙니다, [조선ㆍ중앙ㆍ동아ㆍ한국일보 1997.10.7, 백서 3-1, 637쪽]


◎ 이사장의 호텔 장기투숙은 경제성과 제반 여건을 고려하여 선택한 사생활에 관한 사항입니다.

1. 이사장이 외국에서 돌아온 후 호텔을 숙소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현재 본인 소유의 주택이 하나도 없으며 또한 독신이고 노령이기 때문에 편의상 호텔에 묵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사장이 머물고 있는 호텔 방의 사용료는 장기 투숙에 따른 할인을 적용하여 85만원이 아닌 35만원이며, 이사장 개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3. 경제적으로 주택구입에 따른 이자비용과 주택관리를 위한 인건비, 관리비, 각종 세금 등을 감안하면 호텔에 머물고 있는 것이 더 싸기 때문에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10억 원에 상당하는 주택이라면 위의 제 비용을 합산하면 월 1,600만 원 정도가 소요되나, 월 호텔 사용료는 약 1,000만 원 정도이므로 월 600만 원 정도가 저렴합니다.


월 1천만 원의 호텔 사용료가 경제적이라고 주장하는 신문광고를 접하고, 덕성여대 교수들은 “학교를 설립ㆍ경영하는 자가 장기간 일류 호텔에 투숙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인데, 일인의 일 개월 투숙비만도 천만 원씩 지출하면서 이를 근검절약하는 생활이라 하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웃을 일이 아닌가?”라며 허탈해했다.

5. 학원의 소요 배후에는 전부 이북의 공작원들이 있다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교수를 학생을 선동하고 학교를 파괴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매도한 이사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수협의회 활동을 공산화운동이라 하고, 조선대학처럼 해방대학 공산주의 대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거침없이 말하였다. 교수협의회를 조직하여 학원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은 겉으로는 민주화를 내걸지만 실상은 공산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피디: 교수협의회를, 평교수협의회를 조직해서 만들어서 주장하던 교수들의 민주화는 좀 잘못된 민주화다…

이사장: 그게 어떻게 민주홥니까. 내 생각에는 거 공산화지 거 민주화 아닙니다.…학원을 파괴해서 조선대학같이, 그 사람들 목적은 조선대학 같은 해방대학을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해방대학이 뭡니까? 모델이 조선대학이라구요. 예. 말하자면 공산주의 대학이에요. 해방대학은 대한민국의 치외법권적인 해방구 만드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들의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거예요. 그것이 민주화로서의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입니까? 그 결과 뭐가 플러스 됐어요. 대한민국 민주화에 뭐가 플러스 됐어요.


   요컨대 교수협의회 등 학원민주화를 추진하는 세력들은 전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산주의 대학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도가 성공한 좋은 예가 조선대학이라는 것이다. 박철웅 일가의 족벌체제를 무너뜨려 학원 민주화에 성공한 조선대학이 갑자기 공산주의 대학이 되고, 전국의 각 대학마다 조직되어 있는 교수협의회가 졸지에 북한의 지령을 받아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단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사장: 거 황장엽씨 얘기하는 거 보세요. 학원의 소동이 전부 이북의 공작원들의…대부분일 거라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 뒤에 배후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대한민국에서는 공작원들 손에 놀아나서 전부 학원 소요로 학교가 전부 뒤집어져야 합니까?


이사장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아니 난 또 확고한 신념이에요. 난 나이가 일흔인데 삼십 육칠년 동안 학교를 경영해왔어요. 난 속속들이 압니다.”라고 장담까지 하였다. 그러니까 이사장의 ‘확고한 신념’이란 학교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하여 교수의 교권ㆍ학생의 수업권ㆍ직원의 노동권 등 인간의 기본권을 철저히 짓밟고 비판적인 교수는 빨갱이로 몰아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유신시절이나 5공 시절의 독재자를 뺨치는 극우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덕성여대가 ‘동토의 왕국’이니, ‘동물농장’이니 ‘정신병동’이니 하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교육관을 가진 사람이 학교를 경영하기 때문이었다.

1997년 10월 23일 조선대학교 교수협의회는 덕성여대 이사장의 발언을 전해 듣고 사과요구서를 발송하였다. 이에 대한 이사장의 사과문이 1998년 3월 1일 조선대학교『교수협의회보』에 게재되었다.


<사진 11> 사과, [백서 3-1, 591쪽]


 사  과

조선대학교 자치운영협의회 대표의장 김영규 귀하

1997.10.23자 귀하의 공개해명요구서를 받아 보았습니다.
먼저 귀 대학과 귀 대학 구성원 여러분들에게 본인의 발언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치게 된 결과에 대해서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이 KBS 기자와의 대담 중에 귀 대학에 언급을 하게 되었던 것은 본인이 법인 이사장으로 있었던 덕성여자대학교의 분규사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학내분규가 발생하였던 여러 대학들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수년 전에 귀 대학이 정상화되기 전 일시 혼란 상태에 있을 때 항간에 떠돌던 말이 상기되어서 특별한 뜻 없이 발언한 것에 불과하며, 현재의 귀 대학을 지칭해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결코 현재의 귀 대학이 소위 해방대학이거나 공산주의 대학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는 만큼 본인의 발언이 본의 아니게 귀 대학의 명예나 귀 대학 구성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불미스러운 영향을 초래하였다면 거듭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1997.11.
OOO


그러나 진정성이 결여된 이사장의 사과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덕성 구성원들을 빨갱이로 몰기 위한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2학기 들어 학내 민주화열기가 고양되자 이사장은 위기 타개책의 일환으로 용공몰이를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6. 노동신문에 기사가 났다는 사실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1997년 11월 6일 저녁 9시경 학부모 공청회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교수협의회 교수들은 출입문 밑으로 10월 15일과 18일자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복사물이 들이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대학 교수들 어용 리사들의 해임을 요구하며 철야 롱성」「시민단체 회원들과 대학생들 어용 리사장 퇴임 요구」라는 제목의 노동신문 기사는 덕성여대 교수들이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는 내용과 시민단체들의 시위내용을 담고 있었다. 교수협의회 교수들은 즉시 경찰에 신고하는 한편, 어떻게 이 복사물이 교내에 유포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2학기 들어 학내 민주화 열기는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0월 1일 재학생 5,000명 가운데 3,141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총회가 열려 찬성 3,093명 반대 46명으로 무기한 수업거부가 결의되었다.

10월 말 경 사회각계 원로들이 관선이사 파견과 한상권 교수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으며, 교수들은 총장실 점거 철야농성을 하고, 직원노조는 총파업을 진행 중이었고, 학생들은 도심 한복판에서 1,000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연일 개최하였다.  덕성여대 본부 1층 행정실은 학생, 2층 총장실은 교수, 3층 회의실은 직원이 각각 점거하고 농성을 하여 학교 운영은 파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11월 6일 철야농성 팀은 수학ㆍ전산ㆍ통계학과 등 숫자에 밝은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밤새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니 유인물 상단에 반쯤 잘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나 해독하자며 모여 앉았다. 머리를 맞대고 밤새 논의한 끝에 마침내 새벽에 이르러 해독에 성공하였다. 팩스용지 상단에 절반쯤 지워진 채 인쇄된「FROM DUKSUNG SCHL FNDTN」과 발신전화 번호(734-3215)는 학교법인사무국이며 수신자(901-8386)은 약대 위생화학실내 덕성여대 동창회 사무실이었다. 이 방은 모교 출신으로 학생처장인 약대 정 아무개 교수의 사무실이기도 했다.


<사진 12> “재단서 로동신문 복사물 뿌려” [한겨레 1997.11.8, 백서 3-2, 478쪽]

  철야농성 팀의 밤샘 노력으로 노동신문을 학교에 살포한 주체가 법인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이사장이 교수 학생들의 학교 정상화 요구를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음해하려는 의도로 북한 노동신문 기사를 입수ㆍ 유포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음날 아침 빨갱이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 교수협의회 교수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준 철야농성 팀에게 너도나도 수고했다며 덕담을 건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재미로 한 팩스번호 해독이 왜 그렇게 대단한 일로 칭찬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한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한편  교양학부 모 여교수는 7일 교내의 한 연구실에서 로동신문을 대량으로 복사하다 교수협의회 측에 꼬리가 잡혔다. 무비카메라에 의해 현장이 잡히자, 이 교수는 “왜 내 자유를 침해 하느냐.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든 말든 상관 말라. 고발하려면 하라”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았다.

덕성여대의 학내분규 내용이 담긴 노동신문 복사본이 덕성여대 교내에서 발견된 것과 관련, 경찰은 신고를 받은 다음날인 7일 서둘러 공안상의 혐의점이 없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노동신문 기사 복사본은 전 성균관대 교수 이모씨가 덕성여대 전 재단이사장의 요청에 따라 법인 사무국에 보내준 것이며, 이씨가 합법적으로 노동신문을 구독하고 있고 이를 유포할 의사도 없었기 때문에 수사를 종결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용공사건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법대로’가 아닌 ‘멋대로’인 것이었다.

교수협의회는 학교가 교수와 학생들이 농성과 수업거부 행위를 북한의 지령을 받는 용공으로 몰기 위해 재단으로부터 팩스로 받은 내용을 복사해 교내에 뿌렸다고 판단하고, 11일 이사장과 총장직무대리 등 2명에 대해 국가보안법위반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학생 500여명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 북부지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사진 13> 덕성여대 교수협, 전 이사장 등 고소, [한국일보, 97.11.12, 백서 3-2, 483쪽]

이 건에 대해 이듬해 1월 14일 서울북부경찰서는「민원사건 처리결과」를 고소인에게 통지하였다. 경찰이 밝힌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이사장은 성균관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이 아무개로부터 덕성여대 분규사태가 북한 노동당 신문에 보도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여 팩스로 받아보고 폐기하였으며 위 기사를 학교에 보내라고 지시를 한 일이 없으며 학내에 위 기사가 배포된 경위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변소하였다.

(2) 총장직무대리는 11월 6일 재단사무국 고문으로부터 덕성여대 사태와 관련한 기사가 노동신문에 났는데 노동신문 기사 복사본을 팩스로 약대로 약대학장실로 보낸다는 연락을 받고 조교를 통하여 이를 받고 11월 7일 교무위원회 소집하여 학내문제가 북한신문에 난 사실을 교무위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조교에게 위 기사 내용을 5-6매 정도 복사하라고 하여 교무회의를 하면서 위 문건을 회람하도록 하고 다시 수거하여 폐기하였다고 변소하였다.

(3) 교양학부 교수는 11월 6일 16시경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온 위 기사를 보고 이를 복사하여 하단에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입니다’라고 기재하였는데, 이는 학내사태와 관련하여 교육부에 알려주려고 한 것으로 교수ㆍ 학생들을 용공세력을 물려거나 북한의 주의ㆍ주장에 찬동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변소하였다.

  경찰은 교수협의회 측의 고소사건을 불기소 처리하였다. 처리사유를 보면,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범죄로 수사한 바, 북한 노동신문은 이적표현물이라고 볼 수 없고, 동 신문기사의 출처가 분명하며, 피의자들이 교내에 살포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하고 또 증거가 없으므로 북부지청 이두희 공안검사에 지휘 받아 불기소의 의견으로 송치하였다고 하였다.


<사진 14> 서울북부경찰서, (민원사건 처리 결과 통지), [백서 3-2, 148쪽]

노동신문 살포 사건은 재단 관계자들이 복사 시 송수신자의 번호부분을 삭제하는 완전범죄를 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덕성여대 학내분규는 또 한 차례의 엄청난 용공조작으로 발전하여 끔직한 결과를 가져올 뻔 했다. 교수협의회는 “우리가 먼저 로동신문 기사 복사본을 발견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뜻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불순세력으로 몰릴 뻔 했다”며 “일부 교수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재단측 앞잡이 노릇을 한 걸 생각하면 서글퍼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사장은, 앞서 최철호 피디에게 한 발언처럼, 덕성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북한 공작원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이는 이사장 측근 인사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혼란이 있는 곳에는 불순세력이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농성하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배후에는 불순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노동신문에 기사가 났다는 사실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남한 사회에 혼란을 조장하려는 북한의 음모에 놀아난 꼴이 됐기 때문입니다.”

  노동신문을 교내에 반입ㆍ살포토록 총지휘한 사람은 이사장이었다. 그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두기 위해 노동신문을 교내에 반입ㆍ살포하였다.


<사진 15> 덕성학원 재단의 노동신문 학교 내 반입ㆍ살포를 통한 용공조작 음모를 규탄한다, [교수신문, 1997.11.24, 백서 3-1, 75쪽]

하나는 이사장직에서 해임된 직 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목적으로 용공조작을 기도한 것이다. 1997년 10월 10일, 교육부는 8개월 동안 파행을 거듭해 온 덕성여대 학내분규에 책임을 물어 이사장의 이사 및 이사장직 임원취임승인을 취소하였다.

  교육부 감사 결과 이사장은 교수재임용제를 악용하여 한상권교수를 부당하게 재임용탈락 시켜 교권을 유린하였으며, 총장의 권한을 침해하는 등 대학의 자율성을 파괴하였고, 교무행정 및 학사행정에 개입하는 등 학교운영의 위법부당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임당한 이사장은 현 덕성여대사태가 자신의 위법부당행위로 인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외부 불순세력이 학내에 침투하여 파괴공작과 선동을 일삼은 결과라고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사실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노동신문을 교내에 살포토록 지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내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민주화열기를 단숨에 잠재우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사장의 전횡으로 인해 덕성여대는 ‘동토의왕국’, ‘동물농장’, ‘정신병동’, ‘노예사회’ 등으로 불리어왔다. 그러나 2학기에 들어 덕성여대의 교수와 학생, 직원, 조교들이 지금까지의 굴종과 침묵을 깨고 분연히 일어나 이사장의 전횡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이사장은 해임되고 학내에서의 입지 또한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는 위기국면을 일시에 반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용공몰이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사장은 학내의 저항세력을 용공으로 몰아 부침으로써 자신의 불법비리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민주화 열기에 위기에 몰린 이사장은 학내 민주화 운동을 공산화 운동으로 여론몰이를 함으로써 수세국면을 탈출할 목적으로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학교 구내에 살포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