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올해의 인물, 덕성 사람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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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물, 덕성 사람들 (2)

한상권(중세사2분과)

4. 올해의 인물, 덕성 사람들

  2001년은 사회 각 분야별로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 간의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한해였다. 오마이뉴스가 2001년 오마이뉴스에 등장했던 뉴스의 인물 가운데 우리 사회를 진전시키는데 기여한 3명(단체)을 ‘올해의 인물’로 12월 20일 발표하였다. 오마이뉴스는 2001년을 달군 여러 이슈들 가운데 언론개혁 운동, 인권신장 운동, 사학민주화 운동을 주목했고 그 중 어느 하나를 선정하는데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세 부문의 상징적 인물과 단체를 ‘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고 하였다.(선정 작업은 1차 독자 추천, 2차 편집국 심사로 이뤄졌다. 독자들의 추천은 10일간에 걸쳐 약 150여 명이 추천에 동참했다.)

  언론개혁 운동 부문의 화덕현 이문열돕기운동본부 본부장과 인권신장 운동 부문의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과 더불어 사학민주화 운동 부문에 덕성여대 총학생회와 교수협의회가 선정되었다.


<사진 12> 2001 올해의 인물(오마이뉴스)

‘선정 사진’ 전달식이 12월 20일 오후 7시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열리는‘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송년식’에서 있었다.


<사진 13> 상패 액자 받는 모습


<사진 14> 감사의 인사말

덕성여대 총학생회와 교수협의회에 전달된 상패액자에는 다음 내용이 쓰여 있었다.


덕성여대 총학생회·교수협의회

  24시간 1인 릴레이 시위, 무기한 천막 농성과 단식, 그리고 집단 삭발… 학생, 교수, 교직원이 따로 없었다. 여기에 졸업생들도 큰 힘을 보탰다. 2001년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에서 이들이 보여준 모습은 분규를 겪고 있는 모든 사립학교에 하나의 모범이자 희망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기약 없는 투쟁’을 택했던 이들에겐 참으로 견디기 힘든 한 해였다. 1학기에는 재단 측과 밀고 당기는 싸움 속에 하루하루를 긴장과 고통 속에 보내야 했고 2학기 들어서는 그들의 ‘철저한 무관심’에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10월24일, 사태 해결에 무성의한 재단과 교육부에 맞서 01학번 새내기를 포함한 20여명의 여학생들과 그 스승들이 선택한 것은 눈물의 삭발이었다.

  이들의 아픔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10월말 관선이사가 파견되면서 지난 2월 재단측의 교수협의회 교수 부당해임으로 시작됐던 덕성여대 학내분규는 정상화의 단초를 마련했다.

  물론 이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젠 강의실의 ‘평범한’ 교수와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들의 새해 희망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5. 남해교, 수해로 붕괴되다

  학원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2001년 8월 14, 15일 이틀간 내린 집중호우로 학교 정문 앞 남해교가 붕괴․유실됨에 따라, 다리 통행이 금지되고 학교에서는 임시로 가교를 설치하였다.


<사진15> 집중호우로 남해교 붕괴(덕성여대신문 452호, 2001.8.27)

무너진 다리 남해교는 송금선의 호 남해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덕성학원장이었던 송금선을 기리기 위해 학교 정문 앞 다리 명칭을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남해 송금선은 황국신민화 광풍이 한창인 1940년 8월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이사장은 차미리사였다. 초대 이사장 차미리사가 건강상 사임한 1952년 1월, 덕성학원이 송금선 집안으로 넘어갔다. 이후 송금선의 부친 송우영과 남편 박준섭이 각각 2대, 3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4대 이사장인 송금선은 1970년 8월 15일부터 재직하다 1977년 8월 15일 아들 박원국에게 이사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차미리사 세운 덕성학원이 송금선의 부친-남편-본인-아들로 세습된 것이었다. 박씨 일가는 설립자 차미리사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학내분규로 이사장에서 해임된 박원국씨는 스스로를 ‘학교법인 덕성학원 교주’라 부르고 자신의 형제를 설립자의 가족이라 지칭하면서 이사회에 설립자 지분을 요구하였다. 이에 1999년 11월 3일 국정감사에서 박원국씨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덕성학원 설립자에 관한 추궁이 있었다.

 


〇설훈 위원: 박원국 전 이사장님께 묻겠습니다. 덕성학원 설립자가 누구입니까?

〇증인 박원국: 설립자라는 뜻이 애매한데요. 내가 그래서 이상규 변호사한테 조금 아까도 물어 보았습니다. 설립자가 뭐냐 하니까, 내 입지가 뭐냐 ‘설립자의 장손’이다 이것입니다.

〇설훈 위원: 설립자의 장손이라고 그랬어요? 알겠습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차미리사 여사가 설립자로 되어 있습니다. 맞습니까?

〇증인 박원국: 그렇지요. 맨 먼저 운영권을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〇설훈 위원: 차미리사 여사 하고 송씨 집안하고는 어떤 관계지요? 모친이 차여사 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〇증인 박원국: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이날 국정감사에서 설훈 의원이 박원국 전 이사장에게 교주라고 칭하는 근거에 대해 추궁하자, 박원국 씨는 “내가 붙인 것이 아니라 이문영 이사장이 그렇게 호칭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얼버무렸다.

  학원민주화투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송금선은 덕성학원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총동창회는 21세기 교육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교육재정 확보가 중요하다고 믿은 박준섭 박사와 송금선 박사가 많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덕성학원을 발전시켜 왔으며 덕성여자대학교를 설립하여 평생 동안 여성교육에 헌신해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송금선 박사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대교협 대학종합평가(1998년) 및 언론사(중앙일보, 1997년)등으로부터 재정분야 최우수대학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는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많은 교육재단과 교육기관에 귀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송금선에 대한 찬미는 박원국 이사장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 학교발전의 또 하나의 원동력은 박원국 이사장이라는 주장이다. 덕성여대가 대학설립기인 50-60년대를 거쳐 70-80년대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박원국 이사장의 영도력 덕분이다. 이처럼 학교를 위해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까지 한 박원국 이사장을 두고 독재라 부르며, 탄압 운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며, 그를 비교육적이며 반사회적인 인사로 낙인찍는 것은 학교의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소산이라는 게 구 재단을 지지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학원민주화 투쟁이 일어나면서 박씨 일가가 반세기 동안 운영한 덕성학원은 친일비리족벌재단임이 드러났다. 동토의 왕국 덕성학원이 민족사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들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 이듬해 다리 복구가 완료되자 ‘남해교’ 명칭 변경에 대한 공청회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5월 28일 오후 7시 대강의동 204호에서 열렸다. 이에 앞서 총학생회는 2001년 수해로 무너진 남해교의 5월 달 완공과 동시에 교량 명칭을 변경해 달라는 요청을 5월 2일 도봉구청에 접수했다. 이에 대해 도봉구청이 학생회와 학교 주변 주민들의 상호 합의된 의견을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해옴에 따라 이날 공청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덕성여대 학생과 노조위원장을 비롯하여 이웃주민, 학교 앞 상점  주인 등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공청회에서 ▲현재 ‘남해교’라는 교량 명칭이 친일명단에 오른 전 이사장 송금선 여사의 호에서 따온 점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학원의 이름을 이어받고 국화인 무궁화의 옛 이름으로 애국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화교’로 명칭을 개정하는 것이 올바르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청회에 참여한 이들이 합의된 의견을 도봉구청에 제출한 결과 교량 명칭이 송금선을 기념하는 남해교에서 차미리사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근화교로 바뀌었다.


<사진 16> 근화교

6.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을 칭송하라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가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1년 4월 26일 종묘집회에서였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교협 교수와 학생 1,200여명은 차미리사 초상화를 들고 명동성당까지 행진하였다.


<사진 17> 4.26종묘집회를 마치고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는 모습 ⓒ 오마이뉴스 김미선

  이즈음 문헌정보학과 3학년 안수영 학생이 교보문고 입구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였다. 안수영 학생은 덕성여대 설립자이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차미리사 여사가 즐겨 입은 흰색치마와 흰저고리를 입고 왼쪽 가슴에 ‘박원국 일가 퇴진’이라는 검은 리본을 달고 시위를 하였다.


<사진 18> “잡혀 가지 않을 만큼만 하라”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는 안수영씨는 교보문고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국문과 학생회장 함윤정도 차미리사 복장 차림으로 박원국 이사장 등 박씨일가 퇴진과 간선이사 파견을 촉구하면서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정문 앞에서 5월 10일부터 18일까지 9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7월 말 조계사 농성을 시작한 이후로는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이 “관선이사 파견하라” “청원경찰 물러가라”고 쓴 칼을 목에 쓰고 인사동 거리에 나섰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전국 35개 교육·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차미리사 선생이 세운 순조선적인 학교 덕성여대가 자랑스러운 민족사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교법인덕성학원설립자차미리사선생기념사업회] 창립준비모임을 가졌다. 순 민족사학 덕성여대가 비리·분규 사학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현대사의 왜곡과 굴절 때문이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의 덕성여대 민주화·정상화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학교법인 덕성학원을 설립한 이념을 계승하여 민족사학의 정통성을 정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①차미리사 선생의 건학정신을 이어 받아 덕성학원을 민족사학으로 바로 세우는 일 ②차미리사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장하여 독립정신을 현양하는 일 ③차미리사 선생 동상을 교내에 세우고 장학 사업을 벌여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고취하는 일 ④차미리사 선생의 교육이념인 민족·민주·자주·통일정신 계승과 관련된 기념사업을 하는 일 등 4개항을 결의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이 해 11월 30일 민족교육운동가 덕성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 동상 건립 기공식이 쌍문동 캠퍼스에서 있었다. 덕성여대가 친일파 송금선의 손으로 만들어진 친일족벌사학이 아닌 순수 민간인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민족사학임을 널리 알리며, ‘설립자 바로 찾기’를 통해 덕성분규를 최종 마무리 하고 재발을 방지하자는 의미로 마련된 행사였다. 이날 동상 건립식에 모인 교수, 학생, 졸업생 등 50여 명은 학교 뒤편에 있는 차미리사 선생 묘소를 참배하였다. 참석자들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02년은 덕성인들에게 뜻 깊은 한 해였다.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그의 동상이 교내 민주마당에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이 해 8월 15일 정부는 광복 57 돌을 맞아 차미리사 선생 등 일제에 맞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하였다. 정부는 차미리사 선생을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애족장)에 포상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진 19> 차미리사 훈장


<사진 20> 차미리사 훈장증


  차미리사 여사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하였고, 귀국하여 배화학교 사감으로 3․1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역설하였고, 1923년 근화학원(槿花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차미리사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세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덕성여대가 민족사학으로서의 정통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8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덕성학원의 뿌리는 3․1운동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세운 근화학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1912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었던 차미리사는 3․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여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종다리[宗橋] 예배당 종각을 빌려 야학을 열었다.


<사진 21> 종다리 예배당 종집

1919년 9월의 일로, 그의 나이 마흔 한 살 되는 해였다. 차미리사는 낮이면 배화학당 사감으로 근무하고 밤이면 코 흘리는 종종머리(끝을 모아 땋아서 댕기를 드린 머리) 여자아이, 소박데기 젊은 부인들을 모아 놓고 자정까지 가르쳤다.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는 수단으로써 교육의 소중함, 특히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자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하 차미리사 선생이 펼친 교육구국운동은 “암흑을 뚫고 솟아오르는 광명이며 조선사회의 희망”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학교를 철저히 조선인의 힘으로 자립적으로 설립하고 또 스스로의 힘으로 경영하였다. 이는 외국 선교사 또는 유지에 의해 설립되거나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학교와는 구별되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덕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그가 설립한 ‘순 조선적인 학교’ 덕성학원의 건학 이념은 민족·민주·자주였다. 차미리사 선생의 교육이념은 근화학원의 교훈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덕성학원 설립자는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며,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덕성학원을 운영해온 박씨 일가는 물론 그를 추종하는 구 재단세력은 이 점을 소홀히 하거나 애써 외면해 왔다. 덕성학원이 개인의 사유물이라는 낡고 그릇된 관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사회와 학교 당국 그리고 교수, 학생, 직원, 졸업생 등 구성원 모두는 덕성학원이 공공의 교육의 장이며 나아가서 “민족의 공기(公器)”라는 차미리사 선생의 숭고한 뜻을 겸허하게 받들어 사학의 공익성을 높이는데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사학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되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사립학교는 근대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을 그 이념적 기반으로 하여 출범하였다. 19세기말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구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들은 손상 받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교육을 진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근일 국권회복을 논하는 자로서 학문 교육을 말하지 않는 자들이 없다”라는 지적처럼, 나라를 되찾는 일을 논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사립학교에서 인재양성 실력양성 계몽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지만 최고의 이념은 비운에 빠진 조국과 고통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고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었다.

일제 강점기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많은 민족사학이 해방 이후 ‘비리사학’ ‘부패사학’으로 전락하였다. 이는 많은 사학들이 봉건적 혈연성·폐쇄성에 의거하여 운영되면서 사유화·세습화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암담한 사학 현실에서 그것도 지난 수십 년간 분규사학의 대명사처럼 불려왔던 ‘동토의 왕국’ 덕성여대에서 설립자를 복권시키고 독립유공자로 포상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실추된 사학의 명예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차미리사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기리는 동상 제막식이 9월 27일 민주동산에서 열렸다.


<사진 22> 차미리사 선생 동상 제막

차미리사 선생의 교육이념을 재건하고 실천하는 의미에서 세워진 동상은, 그가 전국을 순회강연하면서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운 정신에 따라 교수·직원·학생·졸업생 등 덕성 사람들이 낸 성금으로 제작되었다. 동상 제작은 학원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이반(서양화과) 교수가 제작하였다. 그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 위에 차미리사 선생을 안치한 동상에 대해, “알 바위에서 부활한 차미리사 선생의 모습”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이 조형물 속에 한복 입은 한 여성이 일제의 잔인한 찬탈과 벅찬 해방이라는 경계선의 공간에서 비바람 눈보라 세파를 헤쳐 가며 민족의 앞날을 고뇌하고 절규하는, 그 시대의 대표적 한국의 고귀한 여인상의 구국적 사상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이미지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고심하였다며, 동상 제작 후기를 학교신문에 기고하였다.


<사진 23> 차미리사 선생 동상제작 후기 2(덕성여대신문 2002.12.9)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을 칭송하라. 무수한 물방울이 억만년을 두고 떨어져 바위를 뚫고 그 고요하게 반복하여 맞닿음이 마침내는 노도 같은 함성으로 변하여 거대한 물줄기로 몰아쳐 바다를 이루다-그러하면 그 바위는 불가피하게 또는 필연적으로 계란바위로 화하여 지친 우리들을 살포시 미소 지으며 힘 받쳐 밀어주리니……(계란바위 위의 차미리사 선생의 눈동자를 ⨆방법을 사용치 않고 동공을 사실적으로 각인해 살려낸 것은 공허한 표정을 피하고 시공간을 냉철한 시선으로 직시하도록 한 이유이며 ‘아르카익 스마일(archaic smile-그리스 조각상의 미소 띤 듯한 표정)’ 을 적용시켜서 굳게 다문 입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부드럽게 한 효과이다.) 차미리사 선생의 그러한 표상을 그 계란바위 형상 위에 안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념물들의 흉상의 좌대는 본체를 올려 떠받치기 위한 구조물의 구실에 불과 한 것이나 필자가 선택한 계란 형태의 좌대는 흉상과 더불어 조형성을 함께하는 조각적 앙쌍불라쥬(assemblage)로써 생태조각성에 다가가려는 작가의 순수 조형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는 안치된 것이 아니라 그 계란바위로부터 부활한 것이다. 그 바위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석물 파는 곳을 십여 군대 헤맨 끝에 찾아낸(150m 150cm 200cm) 자연석이다.(그것은 감탄할 정도로 거의 계란형에 가까운 것이나 필자가 그것을 기계로 깎아 볼륨을 보완한 것이며 그 표면의 곳곳에 마치 별자리 같이 무수한 혈을 뚫어 팽창력과 팽창률을 극대화할 것으로 뚫는 작업은 지속될 것이다. 그 돌을 판매한 사장은 그것은 자신도 처음 보는 공룡의 알이라고 칭하였다.)

필자의 욕심 그대로라면 차미리사 선생이 가슴 아래를 묻고 있는 알 바위를 백운대 인수봉 꼭대기(정기)에 올려놓고(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근화학원의 딸들을 내려다보게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민주광장’의 가장 높은 공간에 자리 잡게 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광장의 동서남북에서 수평을 그을 때 가장 높은 좌표 지점에 학생들이 항상 가장 삼삼오오 많이 모여 있는 것이 필자에게 관찰되곤 했었다. 그것은 우연히 아니라 자연현상의 볼륨의 정점이나 깊은 곳은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기 때문이며(동양은 ⨆ 서양은 凸의 속성) 생태학적으로 그곳이 가장 편안한 우주적 시야의 표징점이기 때문이리라.

그곳에 석관을 넣고 타임캡슐을 묻었다. 그 속에 진리와 정의에 불타는 근화 딸들의 진실한 청춘열기의 정의로운 함성 즉 한상권 교수의 덕성 민주화 백서와 이 기념물을 위해 정성을 모은 동문, 학생, 직원, 교수들의 흔적, 이 조각의 발상과 미학, 조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모두를 담았다. 그 초점의 동서남북으로 일자석을 네 개 배치해서 십자가가 되게 하고 그 중심에 알 바위를 놓은 것이다.(근화·덕성이 기독교학교는 아닐지라도 차미리사 선생의 거룩한 업적은 만해 사상의 토대 위에 이룩한 그 분 나름대로의 토착적 종교정신의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는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암울한 이 나라의 교육 민주화를 위하여(차 선생의 정신을 이은) 근화의 딸들의 땀방울과 발자국 그리고 외침이 범벅되어 흠씬 배어있는 이 공간에 알 바위의 진동기운을 확고히 더하여 지축을 모으고, 민주광장에 우이동 계곡으로부터 우주를 안개처럼 걷어내고 말끔히 깨우치기 위해 아침마다 자욱하게 운무피어 내려오나니……. 이제 알 바위를 힘껏 껴안거나 올라타고 아니 거기에 올라서서 차 선생님과 어깨동무하고(기존의 권위적 기념물과는 달리 기념물의 높이나 구성을 일반인들에게 친근감을 갖도록 배열했으므로) 저편 인수봉 꼭대기에 울려 퍼지도록 소리쳐 메아리치면 근화·덕성의 앞날의 추구와 열매가 온 세계에 펑펑 쏟아지리니……

드디어 민주광장이 <알바위 마당>으로 승화한 것이며 그것은 이 땅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고 끊임없는 비전을 제시하여 온 누리에 번져 가리니 껍데기들도 겁쟁이들도 이곳을 보라, 참배하라-떨리는 여린 손으로 계란을 던져 바위를 치던, 그래서 지금도 바위를 어루만지며 그 알 구멍에 귀를 대면 역사(歷史)의 역사(役事)가 재추구하는 차미리사의 팔딱이는 가냘픈 숨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알 바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진정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의 외침의 되살아남이요 곧 생태의 뿌리가 살아 심호흡하는 그 메아리(The eco-eco)가 아닌가!

이것은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환원하고자 증언한다. 차미리사는 살아 있는 구국의 증인이라고, 어느 누가 이 광활한 메아리의 파장을 피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차미리사 선생이 산화한 초석이 없이는 이 땅을 받쳐서 구할 수가 없다. 그래도 스스로의 순수한 생태환경본능의 섭리를 도피하려 발버둥쳐-그나마도 그것은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한 가닥 잠재성이리니-차미리사 선생의 정신을 매도하여 악용하는 자들은 결코 저 생명의 바위에 짓눌리리라.…


7.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려할 만한 상황들이 대학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과부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반 교육적 원칙에 따라 온갖 사학비리를 저질러 대학을 황폐화시킨 사학비리인사(구 재단)들이 속속 학교운영에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립대학이 사실상 사유재산으로 공인되고, 어떤 사학비리를 저질렀다할지라도 다시 학교 운영권을 되찾는다는 ‘사학비리 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분규사학의 이사진을 선임하거나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구가 교육부 산하에 있는 사분위다. 사분위 위원들의 성향에 따라서 학교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현재 전체 위원 11명 중 10명이 보수우익 인사들로 꾸려져 있는 사분위가 구재단의 복귀를 돕는데 앞장서고 있다. 사학 민주화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조선대와 세종대의 경우, 지난 2월 사분위의 지원을 받으면서 비리를 저질렀던 구 재단이 버젓이 복귀함으로써 학내 갈등이 조성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 분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재단 측의 비리와 전횡 탓이다. 따라서 분규 사학의 정상화를 꾀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점은 비리 전력자를 학교 운영에 다시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러 학교에서 쫓겨난 옛 재단의 복귀를 허용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다시 맡기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사분위의 결정은 결코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상지대의 경우 구 재단 복귀 움직임에 맞서 교수, 학생, 직원들이 240여 일째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교육의 정상화와 대학민주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최전선에서 힘겹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지대 구성원들의 대학민주화를 위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4월 29일(목) 사분위는 과거 비리로 물러난 상지대 옛 재단에 학교 운영권을 넘기는 쪽으로 결정했다. 정이사 9명 중 5명은 옛 재단 쪽 인사로 선임하고 나머지 4명은 학내 구성원과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천하는 2명씩으로 선임키로 한 것이다. 사분위의 이런 결정에 상지대 학생과 교수, 교직원들은 물론 동문들까지 강력 반발하고 있어 분규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사분위가 분규 ‘조정’을 통해 대학 정상화를 꾀하기는커녕 분규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현재 학내 분규로 임시이사가 파견돼 있는 사학 20여 곳도 비슷한 결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이후 국내 사학비리의 상징처럼 여겨져 온 상지대에서 옛 재단의 복귀가 허용된 마당이기 때문이다.

덕성여대의 경우도 사분위가 독단적으로 결원된 임시이사 파견을 강행하여 구성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지난 2008년의 덕성학원 임시이사 추천과 선임 절차에서는 대학 구성원(교수, 직원, 학생) 및 동창회의 의견이 원만히 개진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지난 해 정운찬 이사가 총리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또 한명의 이사 역시 공직을 겸임하게 되면서 2명의 결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올 3월 18일 사분위는 그간의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의사소통 절차를 무시하고, 덕성 구성원의 의견 또한 배제한 채 결원된 임시이사를 선임하였다. 결원이사 선임 시 관례화되어 있는 대학 구성원의 의견청취 과정을 사분위가 무시한 것이다. 덕성학원 이사회(이사장 고숙희) 또한 사분위에 임시이사 선임을 요청한 사실을 대학 총장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덕성학원 이사회는 지난 2월에도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하는 감사 1인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 구성 시 이사회가 추천하는 자 6인을 이사회 내부구성원으로 추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외부인사 3인을 포함시켜 추천위원회를 구성한 후에 감사추천 과정을 진행시킨 바 있었다.

  사분위의 인적 구성과 지금까지의 행태로 미루어 볼 때, 오는 9월 2일 임기가 만료되는 덕성학원 임시이사들의 후임으로 구 재단측 인사들이 대거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총학생회는 4월 8일 비상총회를 열어 새롭게 구성되는 이사회에 구 재단 세력의 복귀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사진 24> 학생비상총회(2010.4.8)

구 재단은 차미리사 선생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1년, 그 동안 박씨 일가의 학교로만 여겨졌던 우리 대학의 진정한 설립자가 차미리사 선생님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대학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민족사학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구 재단 세력은 차미리사 선생님을 설립자로서 인정하지 않으면서 총독부를 등에 업고 덕성을 빼앗은 친일파, 송금선을 설립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차미리사 선생님의 교육이념을 제대로 계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차미리사가 덕성의 뿌리라는 총학생회의 주장에 대해 구 재단은 “덕성여자대학교는 1950년 유서 깊은 운현궁 터에 교육학자인 송금선 박사가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면서 출발하여 1952년에 덕성여자대학으로 승격되었다”며 맞서고 있다. 덕성여대 설립자는 송금선이며, 1950년 5월 17일 설립되었으므로 올해로 개교 60주년이 된다는 주장이다. 구 재단의 주장에 대해 총학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사진 25> 덕성의 뿌리를 지키자

 


  차미리사 선생님을 대학의 설립자로 인정하지 않는 구 재단 세력 측에서는 우리대학의 창학 90주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학이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은 1950년이지만, 인가를 받은 5월 17일은 정부에서 행정적으로 대학설립 인가를 일괄통과 시킨 날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대학설립인가를 공식적으로 받은 것 이외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대학의 뿌리인 조선여자교육회가 야학 강습을 시작한 1920년 4월 19일을 덕성의 출발로 보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실제, 2004년 1월, 5월 17일이었던 개교기념일을 4월 19일 창학 기념일로 재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가 야학을 열었던 것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는 올해, 창학 9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9월 초 임시이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덕성에서도 구 재단의 복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송금선-박원국을 추종하는 구 재단세력은 권토중래를 위해 세력을 규합하는 등 전의를 불태우고 있으며, 이에 맞서 학생들은 덕성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차미리사를 덕성인의 가슴속에 부활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진 26> 덕성의 뿌리 지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