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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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因地而倒者 因地而起)”  (1)

한상권(중세사 2분과)

1. 복직운동에서 교육악법철폐 투쟁으로

1997년 5월 24일(토) 한국역사연구회(한역연) 회의실에서는 심각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날 모임은 열두 번째 열리는 대책회의로 복직투쟁의 큰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회의였다. 12차 대책회의가 왜 그토록 중요한 회의였는지 이해하려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해직된 직후인 3월 8일(토) 종로 계동에 있는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사무실에서 한역연의 초대회장 안병욱(가톨릭대)ㆍ 2대회장 안병우(한신대)ㆍ 4대 회장 김인걸(서울대)ㆍ 현임 회장 박종기(국민대)ㆍ 이세영(한신대)ㆍ 이영호(인하대) 교수와 학단협의 김성민(중부대, 철학, 대외협력위원장) 교수등이 모여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복직문제를 논의하였다. 추진위원회는 대책위 결성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양심적이고 유능한 학자가 재단의 횡포에 의해 교단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한국사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인 동시에 훌륭한 학자에게서 교육 받아야 할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일이며, 우리의 양심을 외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상권 교수가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실에 앉아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 철회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노력하는 이유의 전부이다.

1975년 교수재임용제가 도입된 이후 수 백 명의 교수가 재임용탈락 되었지만 학계가 발 벗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길고 험난한 싸움을 한역연이 선뜻 맡아준 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한국사 연구자로서의 자부심도 새삼 가지게 되었다.

  첫 회의에서는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목표는 최소한으로 잡기로 하였다. 재임용탈락처분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직된 교수의 재임용을 강제할 법률적 수단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재임용탈락처분을 철회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재임용제를 악용한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하였다. 복직이 아니라 사회 여론을 불러일으켜 억울함을 푸는 신원(伸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투쟁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 학단협 또는 한역연에서 모여 대책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12차 대책회의에 이르기까지 두달 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역사학계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추진위원회’가 확대 개편되어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및재임용제개선추진위원회’로 바뀌었다. 투쟁목표에 재임용제도 개선이 추가된 것인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학계 서명이 한창 진행 중인 3월 27일(목) 의원회관에서 이수인 의원과 점심식사를 하였다(이수인 의원은 이만열 교수 소개로 일전에 한 차례 만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수인 의원은 이번 투쟁을 한 교수 개인의 문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이번 기회에 교육계 전체가 연대하여 재임용제와 같은 교육악법 철폐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대책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투쟁목표를 사립학교법개정으로 확대할 경우 한 교수 문제가 실종되고 관심의 초점도 흐려질 우려가 있다는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민교협과 학단협, 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사교련) 등 교육민주단체의 조직적인 도움을 얻으려면 교수공통의 관심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이수인 의원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어 재임용제를 개선할 것인가 철폐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재임용제도가 악법 중의 악법이므로 철폐투쟁을 벌이는 것이 맞지만, 국민들에게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으므로 개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4월 19일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및재임용제개선추진위원회’(개선추진위)가 탄생한 것이다.(처음 명칭은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및재임용제개선을위한공동추진위원회’였으나 5월 1일 ‘공동’이라는 명칭을 생략하고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및재임용제개선추진위원회’로 이름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상임공동대표로 김상곤(한신대, 민교협의장)ㆍ 박진도(충남대, 학단협상임공동대표)ㆍ 이재윤(중앙대, 사교련의장) 교수, 공동대표로 강정구(동국대)ㆍ 김대환(인하대)ㆍ 김진균(서울대)ㆍ 박종기(국민대, 한역연 회장)ㆍ 안병욱(가톨릭대, 한역연 전임 회장)ㆍ 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 전 소장)ㆍ 이종수(광주대)ㆍ 하일민(부산대) 교수 등을 모시기로 하였다. 추진위원회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 복직운동조직에서 진보학계를 망라한 교육악법철폐투쟁조직으로 바뀐 것이다.

   2. 기자회견과 가두시위

   다른 하나는 서명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장안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보청문회가 끝난 직후인 5월 7일(수)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강당에서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개선추진위 공동대표를 비롯하여 3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역사학계 원로인 이만열(숙명여대) 교수가 기자회견문을 낭독하였다.


<사진 1>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 복직촉구 기자회견 [교수신문 112, 1997.5.12 ; 백서 2, 286]

  개선추진위는 지난 한 달간 전국 80여개 대학 2,500 여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서명에 동참하였음을 밝히며,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의 즉각 철회 ▶덕성여대 비리 의혹에 대한 교육부 전면감사 ▶교수재임용제의 합리적인 개선 등 3개항을 촉구하였다.


<사진 2> 기자회견장 방청석 

  그리고 기자회견이 끝난 후 다시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교육부 기자실을 방문하여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사진 3> 교육부 기자실

며칠 전 KBS 2TV ‘추적60분’에서 교수재임용제의 문제점이 방영된데 이어 전국 80여개 대학 2,500 여명 교수들의 목소리를 모아 기자회견을 하자 파급력은 예상외로 컸다. 교육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수 재임용제의 대폭 개선을 약속했다. 5월 21 교육부 고등교육실장은 “현행 교수 재임용제가 각 대학에서 시행되는 과정에서 절차와 방법의 미비점이 많아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조만간 개선안을 마련해 하반기 중으로 관련 법규를 바꿀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개정 작업에서는 학교나 재단이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과 방법, 절차 등을 법률 사항으로 규정해 심의과정에 투명성을 보장하는 한편 결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교육부는 현행 교원징계재심위원회를 대신해 새로 구성될 예정인 교원분쟁조정위원회의 심의대상에 교수 재임용관련 분쟁을 포함시켜 부당한 재임용 탈락 사례에 대한 감시기능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 4> 교수 재임용제 대폭 개선 [한겨레, 1997.5.22 ; 백서 2, 289쪽]

문제는 교육부가 밝힌 개선책이 앞으로 재임용제 운영을 엄격히 하겠다는 것이지, 이미 탈락된 교수들을 구제방안은 아니라는 데 있다. 정작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는 권리구제를 받지 못한다는 불합리한 점이 있는 것이다(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육부가 재임용제 개선책을 마련하면서 소급적용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나 소급입법은 법률제정의 원칙에 위배된다. 결국 재임용탈락자가 권리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헌법소원을 하여 위헌판결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날 기자회견 장에는 2,500 여명의 서명 교수 명단과 함께 그 동안의 활동자료를 모은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철회투쟁백서』(Ⅰ)도 공개되었다.


<사진 5> 투쟁 백서 1

투쟁백서는 어차피 싸움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중간정리를 할 필요가 있으며, 교육단체ㆍ 언론기관ㆍ 교육부ㆍ 국회 등에 널리 배포하여 재임용탈락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외부의 움직임으로부터 정보가 차단된 덕성여대 교수들에게 배포하여 학내에서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는 등 다목적을 띠고 발간되었다. 백서를 발간하는데 드는 비용은 성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1997년 해직부터 1999년 복직까지 백서는 4차례 총 5권 발간되었다. 그 동안 모인 성금 총액은 4,384만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백서 발간 비용이 성금의 절반을 약간 넘는 2,217만원이었다.)

  투쟁백서(1)은 1000부 인쇄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다 떨어져 재판을 찍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각종 성명서ㆍ 언론보도ㆍ 국회나 교육부에 제출된 문서ㆍ 인터넷에 올라온 의견 등 모든 자료를 총 망라하여 만든 투쟁백서는 복직투쟁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백서의 발간은 복직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계의 서명운동과 투쟁백서의 발간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한겨레 기자는“투쟁백서를 읽고 문제의 심각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으며 앞으로 관심을 갖고 보도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사진 6> 운니동 집회

마지막으로 장외투쟁을 한 것이다. 기자회견의 여세를 몰아 5월 17일(토) 덕성여대 재단에서 교육부까지 가두시위를 하였다. 재단사무실이 있는 종로 운니동에서 1차 집회를 마친 후, 교육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까지 걸어가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사진 7> 재임용문제 불씨로 9개월 간 지속-덕성여대 사태[교수신문 127호, 1997.12.22 ; 백서 3-2, 506쪽]

그리고 12시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점심시간에 나오는 공무원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이날 가두시위는 준비한 유인물 1000장이 부족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사진 8> 교육부 집회


<사진 9>  「모입시다! 덕성여대 졸업생 모두」
3. 학교가 믿는 두 가지

우리가 기자회견ㆍ 투쟁백서발간ㆍ 가두시위와 교육부 항의방문 등 ‘5월 총공세’를 펼쳤으나 학교는 요지부동이었다. 두 가지 면에서 자신만만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재임용탈락이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점이다. 절차와 내규를 무시한 채 강행된 재임용탈락처분이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불법’은 아니었다. 4월 16일(수) 있은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개소식에서 서울대 한영우 교수가 교육부장관에게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하고 물으니, 장관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제재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5월 8일 교육부 징계재심위원회가 나의 재심청구를 각하하자, 학교당국은 “한상권 전 교수의 재임용제외는 학교 당국의 적법 절차에 따라 취해진 결과이고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서도 한 전 교수의 재심청구를 각하함으로써 그 적법성을 인정받았다.”며, 처분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호재로 삼았다.

  덕성여대 교수들도 “우리는 한상권 전 교수에 대한 조치가 학교가 규정하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정해진 것임을 재확인한다.”며 학교당국을 거들고 나섰다. 재임용탈락처분이 합법적인 법률행위이므로 감독관청인 교육부가 어떤 외압도 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학교당국의 생각이었다.

다른 하나는 학내 분위기가 유리하다는 점이다. 1997년 겨울 덕성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음습한 공안통치의 그림자가 교정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2월 23일「평양학생위원회 서신」이 학내에 게시되면서 총학생회장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3월 12일 사설권ㆍ 편집권자율 요구로 학교신문 제작이 중단되었다.

3월 19일에는「평양학생위원회 서신」과 관련하여 자연대 학생회장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처럼 학내분위기가 암울한 가운데 4월 2일 있은 복직추진위 공동대표단의 학교방문은 학생들에게 커다란 용기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4월 10일 ‘한상권교수님재임용탈락철회를위한 ‘ㅎㆍㄴ비상대책위원회’ 발대식이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있었다. 공안의 탄압을 뚫고 재학생 비상대책위가 출범한 것이다.

발대식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먼저 암울한 대학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지금의 덕성을 돌아보면 어디 하나 시원하게 뚫린 곳 없이 숨 탁탁 막히는 야합과 음모, 그리고 감시 투성이 학원으로 전락한 꼴이다.
학생들은 자유로이 의견 개진할 터를 환경미화와 학내질서 안착이란 이름으로 가로막혔고 우리의 목소리를 담던 언론은 편집권 침해의 그늘에 사장 당했으며 백주 대낮에 학생이 잡혀가는데도 학교 어르신들은 구경만 하고 앉아있는 꼬락서니가 그것이다.
학생 사회가 이토록 꽉 막힌 틀 안에서 순전히 학교 당국의 의도대로 농락되어 온 현실조차 갑갑하건만 우리의 교수님마저 사립학교법의 악의적 운영으로 그 위치가 뿌리째 뒤흔들리는 그러한 곳이었다니.

  이어 방자한 학교당국과 재단, 그리고 썩어빠진 사회에 맞서 양심을 지키는 싸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시대에 양심을 지키고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일 게다. 그것은 덕성학원의 자주와 민주를 일으키는 일이고, 나아가 정권과 사회의 모순을 헤집는 일이며 종국에는 21세기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반역의 역사를 돌려놓은 엄청난 일이기에 일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이 ‘싸움’이 그 만큼 소중한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주인 된 권리를 쟁취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이제 말을 정리하되, 이 자리 모인 우리들이 우리들 가슴에 손 얹고 거듭 다짐코자 하는 것은 이것은 양심을 지키는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한상권 교수님 일개인의 재임용탈락이 던지는 파문이 일파만파로 덕성인의, 사회각계의 가슴을 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게다. 이것에 이르러 우리 더 이상 우리 자치권과 우리가 우리 학원의 주인 된 권리를 더 이상 방기하지 말아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제는 참을 만큼 참았고, 귀를 막고 살았으면 그만큼으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말자. 더 이상 남의 일로 무심히 넘기지 말자. 더 이상 힘들다고 회피하려 들지 말자.
졸업하고 나이 서른이 되는 해에 내 아이 앞에서 당당히 오늘을 떠올려 볼 그날을 생각하며 우리 부끄럽지 않게 싸우자.
그리하여 역사의 한 궤를 이루는 위대한 승리자로 기억되자.

이처럼 학생들이 동요할 조짐을 보이자, 학교당국은 4월 14일「한상권 전 조교수의 재임용 제외에 관한 학교의 입장」이라는 유인물을 강의실 곳곳에 살포하였다. 그 이튿날「평양학생위원회 서신」과 관련하여 총학생회 사무국장이 또다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학교는 한국사 교수 신규채용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학과 학생들이 4월 16일 긴급하게 상정된 비상총회에서 신규채용을 분명히 반대하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전공수업과 중간고사 거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학과 교수가 4월 16일 결의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학생들에게 회의를 다시 열도록 압박을 가하였다.

  4월 19일 다시 열린 비상총회에서 수업거부ㆍ 시험거부ㆍ 복직투쟁 등이 부결되자 비대위 학생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무기력감에 빠져버렸다. 학내에는 패배주의와 냉소주의가 팽배하였으며 학생들끼리 서로 만나도 인사도 안하고 본체만체하였다. 이러한 학내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축제기간 중인 5월 20일 민교협 박거용 교수가 ‘재임용과 교육개혁’이라는 주제로 인문사회관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참석인원이 20-30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학생들의 문제의식도 분명하지 않고 해결의지도 없어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학교당국은 학내의 조용함이 학교처분의 정당함을 반증하는 것이라며 기고만장해있었다.

사학과 학생들이 강사들의 수업을 순순히 받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은 정당한 것이다. 지금 외부에서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공연히 떠들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므로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서명 교수들은 소수이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학교가 언론에서 당하고 있는 것은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90년  당시에는 학과가 없는데도 학생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은 학과가 있는 데도 학생들이 조용하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학교의 옳음이 밝혀질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한때는 독재자라고 비난 받았지만 지금은 추앙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 이사장님도 마찬가지다.

학교가 조용하니 조금만 버티면 곧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이 되면 한 학기 동안 싸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학생들과의 오랜 싸움을 통해 학교는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학교는 싸움을 마무리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총무과에서 우리 집으로 5월 30일까지 연구실을 비워달라는 내용증명서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기한 내 비워주시지 않으실 경우 (귀하의 소유물을) 부득이 별도 보관코자 한다”고 하였다.


<사진 10> 연구실 반환 요청 내용증명서[백서 2, 240쪽]

  연구실을 강제 철거함으로써 나의 흔적을 학교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4. 출근투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5월 24일 12차 대책회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열렸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한 교수가 출근투쟁을 하여 학내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그동안 외부에서 확보한 투쟁력을 가지고 학교로 들어가 현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현 시점에서 출근투쟁은 무모한 짓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4불가론이었다.

첫째, 시기상 너무 늦었다. 이제 두 주만 지나면 학기가 끝나고 기말시험으로 들어가며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그러니 1학기 투쟁은 일단 여기서 접고, 새 학기에 다시 본격적으로 싸우자.

  둘째, 한 교수가 학교에 들어가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 교수가 외부에서 활동을 하였기에 학교에서 손을 쓰지 못했지만 출근투쟁을 시작하면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면서 각종 비방과 공격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복직투쟁은 물거품 된다.

  셋째, 투쟁의 동력이 떨어질 것이다. 한 교수가 외부에 있으면서 성명서 작성, 단체와의 협조, 언론사 연락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는데. 학교로 들어가면 그런 활동이 사실상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직추진위 활동도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넷째, 학내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고 학생들도 호의적이지 않아 승산이 없다. 공안탄압으로 학생회는 와해되었고 사학과 학생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수업을 잘 받고 있다. 한 교수가 출근투쟁을 한다고 학교 분위기가 극적으로 반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학교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먹었으면 되돌아 나올 때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근투쟁을 시작하였다가 이내 방학이 되어 아무런 소득도 없이 걸어 나오면 그 자체가 패배이므로 2학기 투쟁마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1학기 투쟁을 여기서 접을 수는 없으니 대책위가 나서서 5월 29일(목)부터 학교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겠다고 하였다.

  1학기도 거의 다 끝나가므로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 방식을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대한 최종결정은 출근투쟁을 감당해야 할 내가 내려야 했다. 대책위가 덕성여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겠다는 말이 고맙기는 하지만, 머나먼 쌍문동까지 와서 항의시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방학 중에 전열을 가다듬고 2학기에 다시 싸운다는 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기가 한창 고조된 이번 학기에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이제는 현장투쟁을 할 때가 되었으므로 다음 주 월요일(5.26)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출근투쟁을 하려면 여러 장비가 필요하였다. 우선 문서작성을 위해 프린터와 컴퓨터가 필요하였다. 이는 졸업생이 가져오기로 하였다. 또 연구실 전화가 도청될 것이므로 휴대전화가 필요했다.

  당시 이동통신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걸 수만 있고 받을 수 없는 씨티폰이 있었으며 메시지를 받기만 하고 걸지는 못하는 것으로 삐삐가 있었다. 이 둘의 기능을 결합한 핸드폰이 막 선보였는데 가격은 100만 원이 넘는 고가품이었으며 크기도 벽돌만하다 하여 벽돌폰이라고 불렀다.

  우선 아쉬운 대로 반 값 가량 되는 중고 핸드폰을 구입하였다(내가 1997년 5월 27일부터 핸드폰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아마 역사연구자 가운데서 핸드폰을 가장 먼저 쓰지 않았나 싶다. 이 핸드폰은 1999년 복직 되면서 해지했다).

5. “여름 방학이나 되면 나오세요”

호기롭게 출근투쟁을 하겠다고 선언 하였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학교 교문 앞에 오니 숨이 턱 막혔다.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출근투쟁을 하자니 여간 무리가 아니었다.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이 출근투쟁을 하는 장면을 이전에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꽉 닫힌 교문을 사이에 두고 학생과 교사가 서로 마주 보며 손을 내미는 극적인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덕성여대 교문은 훤히 열렸으나 나를 반기는 학생도 없었고 알아보는 이도 없었다.(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근투쟁을 시작하였다. 토요일 출근투쟁을 결정하였으므로 학생들에게 알리려 해도 알릴 수도 없었다.)

교문 안으로 들어서려니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2,500명 서명교수의 염원을 실현하러 덕성여대에 온 것이다. 나는 개인이 아니다. 자존심과 체면 따위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과감히 잊어 버려야 한다.

이렇게 굳게 마음먹고 종종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하여 연구실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인문사회관 게시판에 한겨레신문을 스크랩하여 붙여놓은 것이 눈에 띠었다. 이날 한겨레에는 「교수재임용제도 개선 절실하다」는 사설과 함께「비판적 교수 ‘괘씸죄’ 탈락악용 많아-한상권 교수 탈락계기 교수재임용제 개선 여론-」이라는 기사에 내 사진이 실렸다.


<사진 11> 「교수재임용제도 개선 절실하다」는 사설과 함께「비판적 교수 ‘괘씸죄’ 탈락악용 많아-한상권 교수 탈락계기 교수재임용제 개선 여론-」[한겨레 1997.5.26 ; 백서 2, 290쪽]

압핀 하나로 고정된 채 게시판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신문기사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 새]를 연상케 하였다. 잠시 멈춰 게시물을 바라보며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학생이 있구나. 나를 믿는 학생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더 씩씩하게 행동해야지”하는 생각을 하였다.

연구실로 들어와 총장 비서실로 면담신청을 하니 11시 30분쯤 오라고 하였다. 잠시 후 내가 학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손효진, 김민정, 정금희, 박문선, 박혜영, 유길자, 이범정, 조혜진, 곽혜은, 김성희, 홍재현, 김미라 등 사학과 학생들과 김은희(총학생회장) 등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양과에서 조교를 하고 있는 성재도 찾아 왔다. 연구실로 찾아온 학생들에게 앞으로 출근투쟁을 할 것이며 매일 10시까지 학교에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학과 김용자 교수 외에 평소 친하게 지냈던 몇 명의 교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김용래총장을 면담하면서 전날 작성한 성명서를 드리고 “앞으로 매일 학교에 나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총장은 학생들이 동요하니 곤란하다며 “여름방학이나 되면 나오세요.”하였다. “방학이 되면 뭐 하러 학교에 나옵니까?”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총장실을 나와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었다. 참으로 긴 20분이었다.

6. “땅에서 넘어진 사람,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김용래 총장에게 드린 문건은 왜 내가 외부에서 복직 투쟁하다가 연구실로 돌아와 출근투쟁을 하는가를 밝힌 내용이다. 나는 그 당위성을 도탄에 빠져 있던 고려 불교를 중흥시킨 보조국사의 법어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 데서 찾아냈다(내가 이 말이 보조국사의 법어인 줄 알은 것은 한참 뒤였다).

  출근투쟁을 시작하기 바로 전날 성명서를 쓰면서 이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야말로 돈오(頓悟)였다. 나한테 일어난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되며,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정직하게 맞설 때 해답또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의 주체성과 투쟁의 현장성을 이보다 더 적실하게 표현한 말은 없었다. 나는 이 말을 주제어로 삼아 아래 성명서를 써 내려갔다.


<사진 12> 나는 왜 연구실로 돌아와 복직투쟁을 하는가? [백서 2 ; 14-15]



나는 왜 연구실로 돌아와 복직투쟁을 하는가?

존경하는 김용래 총장님, 그리고 교수님 여러분, 저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염려해 주신 교직원 여러분, 제가 학교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 주는 덕성여대 학생 여러분! 

  저는 5월 26일(월)부터 학교에서 재임용탈락처분 철회투쟁을 벌이기 위해 연구실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그간의 경위와 까닭을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학교 측으로부터 재임용탈락 통보서를 받은 것은 개강 하루 전날인 3월 1일 아침이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해직 통보서를 받아 들고 저는 다음 두 가지 다짐을 하였습니다. ‘나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악법인 교수재임용 제도를 개정하도록 한다. 악법을 악용한 덕성여대의 재임용탈락 처분을 철회시키고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

  저는 3월초부터 지금까지 학교 밖에서 교수재임용제도의 악법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개정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은 험난하였지만 엄청나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학계의 동료ㆍ선배 교수분들이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원로 교수님들이 대표를 맡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전국 역사학과 교수님들의 80% 이상이 저의 복직과 교수재임용제의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명 작업에 동참하여, 현재까지 전국 80여 개 대학의 2,500 여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서명에 동참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까지 합세하여, 대학교육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조직이 거의 망라되다시피 하였습니다. 한 개인의 재임용탈락에 이처럼 영향력 있는 단체와 교수님, 그리고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성원한 것은 전례에 없던 일입니다. 이 분들은 격려 전화, 성명서, 서명, 성금, 기자회견, 더 나아가서는 거리시위까지 벌이면서 교수재임용제도의 개정과 저의 복직을 위해 노력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교육부는 올 하반기부터 교수재임용제를 대폭 개선하기로 공표하였습니다. 재임용의 기준‧절차를 법으로 명시해 ‘악용’을 방지하기로 한 것입니다(한겨레신문, 1997.5.22). 그간의 교수재임용제도 운영이 잘못되었음을 정부도 시인한 셈입니다.

교수재임용제도의 개선이 약속된 이상, 남는 문제는 잘못된 법에 의해 박탈당한 저의 권리를 되찾는 일입니다. 격언에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를 내친 것은 덕성여대이므로, 덕성여대에 들어가 저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많은 분들이 ‘다른 대학도 많은데 싫다고 내쫒은 대학에 왜 굳이 돌아가려 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제가 덕성여대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덕성여대는 저의 재임용탈락 처분을 철회하는 결단을 내려야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덕성여대측은 악법인 재임용제도를 악용하여 저를 재임용탈락 시켰기 때문입니다. 재임용제도가 아무리 악법이라 할지라도, ‘임기만료’라는 사유 하나만으로 재임용탈락 시킨 대학은 전국에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둘째, 정부도 기존의 교수재임용제도가 악법임을 시인하고 개정을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덕성여대는 이제 ‘악법도 법이다’는 궁색한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만일 덕성여대측이 재임용탈락처분의 정당성을 계속 고수 하고자 한다면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여 시시비비를 가릴 것을 제안합니다. 만일 덕성여대측이 저의 충고와 제안을 거절한 채, 차일피일 시간만 끌면 분노가 저절로 가라앉을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한다면 학내외적으로 엄청난 반발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 이후 발생하는 사태의 책임은 ‘結者解之’의 원칙을 저버린 학교당국에 있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1997년 5월 26일

한상권 드림


7. “한 교수님, 사필귀정입니다” 

   출근투쟁 다음 날인 5월 27일 이른 새벽 시간에 집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김용래 총장이었다. 김 총장은 어제 내가 총장실에 찾아왔을 때 공연히 힘 빠지는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면서, 주위의 감시와 도청이 심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노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한 교수님, 사필귀정입니다”라며 열심히 싸우라는 격려의 말까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제의 냉랭함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여서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출근할 시점에서 총장과 이사장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총무처장관, 서울시장 등 33년간 봉직하였던 관계(官界)를 떠나 경희대학교 산업정보대학원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김용래 총장은 1997년 덕성학원에서 덕성여자대학교 총장을 공채함에 응모하여 4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김용래 총장은 총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덕성여대가 너무도 비정상적이고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사장은 대학 학사행정에 제도적ㆍ관행적 간섭을 하였다. 실례로 이사장은 신임교수 연구실 배정에도 간여하였다. 그 증거로 ‘96년도 2학기 “신임교수실 배정”에 있어 ’96년 8월 24일 총장이 결재한 후 결재서류를 법인에 전송하여, 이사장 지침에 따라 일부 교수실을 변경하고 8월 28일 다시 총장이 결재한 후 이사장의 결제를 받아 시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이사장이 간여하였다. 그 증거로 “‘97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행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97년 1월 30일 총장이 결재한 서류를 법인에 송부하고, 이사장으로부터 설명을 요청받아 ‘97년 2월 4일 설명 자료를 제출한 후, 이사장이 보았다고 첫 장과 마지막장에 사인한 동 계획안을 송부 받고 난 후에 당초계획대로 실행하였다.

김용래 총장이 대학 학사 행정에 관한 총장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고 반발하자, 이사장은 갖가지 방식으로 모욕을 주었다. 실례로 신라호텔에서 회의를 주재하면서 총장이 다른 의견을 말하면,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한다며 총장과 자신의 의견을 앞에 적어놓게 하고 보직교수들에게 거수하도록 하였다. 총장 의견에 손드는 교수가 한명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총장은 아예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사상은 총장이 왜 학교운영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느냐고 닦달하였다. 심지어 보직교수가 탁자를 치면서 총장에게 모욕을 주는 일까지도 있었다. 총장실 전화가 도청된다는 사실도 비서의 양심고백으로 뒤늦게 알았다.

이사장은 교직원 임용에서도 총장의 제청권 행사가 무색할 정도로 제청을 철저히 무시하였다. 학장, 처ㆍ실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과장, 연구소장, 학보주간, 전공주임, 촉탁, 임시직원, 수위, 청소반장에 이르기까지 임명권은 물론, 전보ㆍ 파견ㆍ 겸임도 이사장이 행사하였다.

  김용래총장이 나의 복직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사장은 전ㆍ현직 보직교수들로 하여금 총장퇴진 서명운동을 벌이도록 지시하였다. “한상권 전 교수의 문제에 대해 김용래 총장은 취임 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사안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는 등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면서…재임용 제외 조치된 한상권 전교수의 신규임용을 주장하는 일부 교수들의 서명운동을 촉발하고 선동하였다는 것”이 퇴진사유였다.

  7월 27일 이후 일부 전ㆍ현직 보직교수들이 주동한 총장퇴진 서명 작업, 전ㆍ현직 보직교수들의 총장 면전에서의 사퇴요구, 이사장의 3회에 걸친 이사회에서의 해임결의 기도(8월 13일, 8월 28일, 9월 4일), 제3자를 통한 총장직 사퇴 회유 등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9월 30일 김용래 총장은 총장직에서 자진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