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억을 둘러싼 투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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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둘러싼 투쟁 (2)

한상권(중세사2분과)


4. 기억을 둘러싼 투쟁

 

 구 재단을 추종하는 교수 3단체(덕성여자대학교 정상화 추진교수회/교권수호대책위원회/민주화및정체성수호를위한교수회)가 공동으로 박씨 일가가 ‘사학의 관리권’을 가지고 있다며 족벌세습을 옹호하고 나서자(1999.11.18.), 교육·시민·사회단체가 박씨 일가는 친일·비리·족벌재단에 불과하다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1999.11.23.). 사교련, 민교협, 전교조, 대학노조, 경실련, 흥사단 등이 참여한「교육·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는 덕성여대 개혁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박씨 일가의 모친인 송금선의 친일행적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덕성학원은 독립운동가이며 여성계몽운동의 선구자인 차미리사 여사가 세운 민족학교이다. 덕성학원이 박원국씨의 모친이며 대표적인 친일파인 송금선씨에게 넘어간 것은 1940년이다. 당시 전란이 세계대전으로 치달으며 민족말살정책이 절정에 이르자, 일제는 차미리사 여사가 민족사상을 품은 여성 지도자라는 것을 새삼 문제 삼아 퇴진을 강요하며, 후꾸자와에이꼬(福澤玲子)로 창씨 개명한 후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로 보내는데 앞장섰던 송금선 씨에게 학교를 넘겨주도록 하였다.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와 아무런 연고권이 없는 박원국씨는 모친인 송금선씨가 저지른 반민족인 범죄행위에 대해 참회하기는커녕, 최근까지 설립자 행세를 하며 학내 민주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1990년 성낙돈교수 재임용탈락, 1997년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박원국씨는 새 이사진이 개혁을 추진하여 덕성여대 복귀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교육위원들과 이강혁 총장 그리고 학내에 잔존한 자파 교수들을 부추겨 개혁을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성명서의 ‘박씨 일가는 설립자 차미리사와 아무런 연고권이 없다’라는 주장은 1개월 전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박원국 전 이사장은 1997년 학내분규로 해임된 이후에도 스스로를 ‘학교법인 덕성학원 교주’라 부르고 자신의 형제를 설립자의 가족이라 지칭하면서 이사회에 설립자 지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99년 국정감사에서 설훈 의원(국민회의)이 박원국 전 이사장에게 교주라고 칭하는 근거에 대해 묻자, “내가 붙인 것이 아니라 이문영 이사장이 그렇게 호칭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얼버무렸다. 박원국 전 이사장 스스로 교주가 아님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한 것이었다. 평소 당당하게 교주라고 일컫던 박원국 전 이사장이 국정감사장에서 갑자기 변명하기 급급해하는 태도로 돌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해답은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있었다. 이에 의하면 덕성여대 설립자는 차미리사였다.


<사진 7> 덕성학원 설립자

학교법인 덕성학원은 1934년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 임원은 차미리사(이사장), 윤치호, 독고희선, 이인, 장병량 등이 있었다. 설립자이며 초대 이사장인 차미리사는 1952년 건강상 사임하고, 2대 이사장으로 박원국 씨의 외할아버지이며 송금선 여사의 부친인 송우영씨가 취임하였다.


<사진 8> 덕성학원 역대 이사장 명단

송우영 2대 이사장과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의 특수 관계 여부에 대해 국정감사 자료에는 “없음”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덕성학원 3대 이사장은 박원국씨의 부친이며 송금선 여사의 남편인 박준섭씨(1957-1970)이며, 4대 이사장은 박원국씨의 모친인 송금선 여사였다(1970-1977). 박원국씨는 5대 이사장으로 1977년 취임하여 1997년 임원취임승인취소를 당하기까지 20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덕성학원은 차미리사 여사와 특수 관계가 없는 송우영 씨를 통해 박원국씨의 외가로 전수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박원국씨 역시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와 특수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국정감사 자료는 현재 이사로 취임 중인 박원국씨의 친동생 박원택씨와 그의 아들 박토마스상진씨에 대해서도 역시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와 특수 관계가 “없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정감사를 통해 박씨 일가는 덕성학원 설립자 가족이 아님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설사 박원국 씨가 설립자와 특수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사립학교는 공익재산이므로 사립학교법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데, 하물며 설립자와 특수 관계가 “없는”이가 “교주”를 사칭하였으니 질타를 당해 마땅하였다. 설립자 차미리사와 특수 관계가 없는 박씨 일가가 덕성학원을 세습하려는 것은 법리상·실체상 근거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국정감사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교육·시민·사회단체가 송금선의 친일행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자 총동창회가 발끈하였다. 총동은 “차미리사 여사가 근화학원을 세워 현 덕성학원의 터전을 마련하였다면 박준섭 박사와 송금선 박사는 많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덕성학원을 발전시켜왔으며 덕성여자대학교를 설립하여 평생 동안 여성교육에 헌신해왔음을 우리들은 덕성학원의 80년, 덕성여대의 50년 동안 지켜보아 왔다”며, “80년간 한국여성교육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해 온 덕성학원과 덕성여대의 역사를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시킨 데”대해 왜곡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1999.12.6.).

  이번에는 민주동문회가 나섰다. 민동은 송금선의 친일행적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공개토론회를 하자고 제안하였다(12.8.). 덕성 뿌리 찾기 공개토론회가 새천년,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는 모교의 역사적 진실과 전통, 그리고 최근 덕성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와 개혁 작업이 80년의 역사 속에서 가지는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라는 것이 토론회를 제안하는 이유였다. 이어 민동은 송금선의 친일행적에 관해 민족문제연구소에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하여, 다음 내용의 공식 답변서를 받았다고 하였다(2000.1.4.).


  송금선의 일제하 행적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 요청에 대한 회신

   2. 귀회에서 문의한 사실관계 확인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드립니다.
첫째, 송금선 씨가 ‘대표적 친일파’라는 질문에 대해: 식민지기 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송금선씨가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침략정책에 적극 협력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의였던 타의였던 간에 반민족적인 범죄행위임에는 틀림없으며, 더구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역사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송금선씨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정리하여 별도로 우편으로 발송하였습니다.

  둘째, 송금선씨가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로 보내는데 앞장섰던’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 위의 문장에서 말하는 정신대란 식민지 말기 조선총독부가 침략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민중을 동원할 때 흔히 쓰던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즉 온 몸을 던져 충성하자는 뜻의 ‘정신(挺身)’을 쓴 것은 일제가 강제동원을 은폐하기 위해 마치 조선민중이 자발적으로 식민정책에 협력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근로보국정신’ ‘근로정신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강제 동원된 남자들은 전장이나 공장 탄광으로 배치되었고 여자들은 대다수 공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 가운데 약 20만 명 정도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송금선씨가 직접 여성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동원하지는 않았으나, 일제가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는데 적극 협력하였으며, 그 결과 동원된 정신대 가운데 약 20만 명의 여성이 ‘일본군 성노예’로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많은 자료들이 보여주듯이 송금선씨는 김활란, 고황경, 이숙종 등과 함께 식민지기 대표적인 여류명사이자 동시에 말기에는 여성계를 대표하여 친일행위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끝.


  2000년 6월 8일, 민주동문회 주최로 ‘덕성학원 건학 80주년 기념 덕성여대 뿌리찾기 대토론회’가 덕성여대 대강의동에서 열렸다.


<사진 8> 덕성 뿌리찾기 대토론회.

민주동문회는 이번 대토론회를 통해 80년대 후반부터 분출되기 시작한 덕성 민주화의 요구와 그에 근거한 투쟁들의 역사적 의의와 정당성을 해방 전후 한국 사회의 왜곡된 역사 속에 망각되어 왔던 민족 민주라는 건학이념과 전통 속에서 찾아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토론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간 덕성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제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설립자 ‘차미리사여사’와 ‘송금선’씨에 관한 역사적 진실 규명 작업은 덕성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갖은 파행과 독선, 교권과 노동권, 학습권을 저당 잡아 구성원들의 분열을 획책하는 박원국 재단의 ‘소유권’에 관한 주장이 그들의 파행과 독선을 정당화시키는 주요한 근거로 구성원들에게 통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현실과, 민주주의와 대학자치권 탄압에 맞서 싸워온 구성원들의 분노와 저항, 민주화를 위한 기나긴 투쟁의 성과가 다시 재단세력들에 의해 빼앗길 지도 모르는 현실이 우리들로 하여금 모교의 역사 속에서 잊혀있던 차미리사라는 한 인물을 찾아 나서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덕성의 진정한 뿌리와 전통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용기와 사명감을 주었습니다.


  이날 토론회는 주제발표 1. 반도지식 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송금선의 친일행적(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주제발표 2.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의 생애와 건학이념(한상권, 교수협의회 부회장), 주제발표 3. 사학의 공공성 파괴-덕성여대 사례를 중심으로(박거용, 한국대학교육연구소장․상명여대교수), 주제발표 4.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말하기에 앞서(조송미, 덕성여대민주동문회장, 약학과 87학번) 순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발표문을 통해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는 식민지 조국의 독립과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민족 지도자요 여성교육의 선구자”였음을 밝힌 다음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는 수단으로써 여성 교육의 소중함을 자각한 선구자이며 그의 노력은 교육기관 설립으로 나타났으며 그 구체적인 결실이 덕성학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번에 발표한 내용은 최은희가 저술한『씨뿌리는 여인-차미리사의 생애』(청구문화사, 1957)와 학교법인 덕성학원에서 편찬한『덕성 60년사』(1985)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으로 잠정적으로 작성한 초고에 불과하며 이후 사료 발굴 작업을 통해 주장을 좀 더 정밀히 수정 보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날 발표장에서 한 약속은 8년 만에 결실을 맺어, 2008년『차미리사평전』(푸른역사)으로 출간되었다.


<사진 10> 차미리사평전

5. 송금선이 차미리사 전기 집필을 의뢰한 까닭은

 

차미리사의 창학 이념은, 3․1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혼 발양을 교육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민족주의, “남자와 여자는 양 수레바퀴와 같다”며 남녀평등을 강조한 민주주의, 가난한 가정부인이나 소박데기 등 소외당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민중주의, 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철저히 조선인의 힘으로 자립적으로 학교를 설립․경영한 자주정신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교육을 실천한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다. 민족·민주·민중·자주 이념을 바탕으로 덕성학원을 세운 차미리사와 친일·비리·족벌재단으로 어떠한 역사적 정통성과 도덕적 정당성도 없는 박씨 일가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박씨일가는 차미리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01년 박원국씨가 덕성학원 이사장으로 복귀한 후 내 놓은 다음 두 개의 문건을 통해 그들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덕성학원은 현재까지 매년 차미리사 여사를 기리는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덕성학원의 창립자가 차미리사 여사임을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차미리사 여사가 최초의 학원 창립자라면 그 후 경영 주체인 학교법인 이사회를 대표해 온 분은 설립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협은 혈육과 자손이 전혀 없는 차미리사 선생만이 덕성의 설립자이고 송금선 전 학원장과 박씨 가문은 차미리사 여사와 혈연관계가 아니어서 계승자가 될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 박씨 가문은 퇴진하여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교협이 새삼스럽게 후손이 없는 차미리사 여사를 설립자라 추앙하고 송금선 전 학원장을 민족 반역자인양 매도하는 억지 주장을 일삼는 것은 현 재단의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의도를 극도로 노골화하고 있는 것입니다.(2001년 4월 6일, 덕성여자대학교)


  차미리사가 덕성학원 설립자임은 박원국 이사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여기서 송금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양자를 조화시키기 위해 박씨 일가는 ‘차미리사=창립자, 송금선=설립자’라는 기이한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창립자와 설립자가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다만 송금선을 반민족행위를 언급하는 것은 덕성학원의 경영권을 찬탈하려는 불순한 목적을 드러낸 것이라며 논의 자체를 봉쇄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학이념 및 교육목표

덕성학원의 전신인 근화여학교의 모태는 암울하던 일제시대인 1919년 9월 차미리사 여사에 의해 설립된 여자야학강습소 혹은 여자야학회에 근거합니다. 1940년 무렵 차미리사 여사는 젊고 교장의 자격이 있으며 덕망과 통솔력 그리고 재력이 있는 인물을 물색 중 적임자인 송금선 여사를 후계자로 추대하였습니다. 당시 송금선 여사에게 인수인계된 것은 9백 평의 대지(당시 국유지) 위에 선 낡은 집 한 채와 7천원 상당의 기부증서 뿐이었습니다. 이후 재원 염출은 송금선 여사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지원금으로 충당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안국동에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어 교육의 터전이 확보됐습니다.
송금선 여사는 차미리사 여사의 건학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여성교육을 통한 민족교육을 실현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덕성학원 건학이념이 되었습니다. 이후 학원의 확충으로 덕성여자대학교가 1950년 5월에 개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부 교협교수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본 학원의 건학배경에 대한 비판은 한낱 음해를 위한 허위주장에 불과합니다.(2001년 4월 9일, 학교법인 덕성학원/덕성여자대학교)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송금선이 차미리사의 후계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 주장은 최은희가 저술한 『씨부리는女人-車美理士의 生涯』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은희가 쓴『씨부리는 여인』은 차미리사 서거 2년 뒤인 1957년 청구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사진 11> 씨부리는 여인

최은희가 집필한 전기는 차미리사와 직접 만난 적이 있는 당대인이 썼던 최초의 글로 이후 차미리사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서술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가 하는 점이다. 최은희는 차미리사의 독립운동가, 교육운동가로서의 애국적인 풍모를 한껏 강조하였다. 물론 차미리사의 애국적인 활동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예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선생은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 석탄광속에 몸을 숨기었다. 때는 단기 4238년(1905년) 5월 선생의 나이 26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차미리사는 1901년 2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한 후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② “선생은〈쌘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 씨를 만나 국권을 잃어버리지 않을 여러 가지 운동에 힘을 썼으나 국운이 다하였는지라 경술년(庚戌年)-서기(1910년)…한일합병조약이 발표되고…차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여 애통한 나머지 입으로 붉은 선지피를 토하고 그 날부터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필경은 귀먹어리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다시 용기를 내어 안창호와 같이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차미리사는 미국에서 안창호와 같이 활동한 것이 아니라,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와 이념적으로 대립되는 단체인 대동보국회에 가입하여 문양목, 장경 등과 활동하였으며, 〈독립신문〉이 아니라 대동보국회의 기관지〈대동공보〉발간에 힘썼다. 차미리사가 청각장애인이 된 것은 중국유학시절 뇌막염을 앓은 후유증 때문이었다.

③ “단기 4246년(1913년) 3월에 미국 〈캔사스〉시 〈티스칼 칼레지〉신학과에 입학하여 일심전심 신학을 연구하며…선생이 4년 만에 외국인의 칭송을 받아 가며 그 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4250년(1917년) 8월 미국 선교회에서 우리나라로 보내는 미국선교사 여덟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귀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차미리사가 미국 중부에 있는 스캐리트 신학교에 입학한 해는 1910년 8월이며, 그는 2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1912년 8월 귀국하였다.


  다음, 더 중요한 문제는 전기 집필 동기와 관련된 점이다. 이 책은 덕성여자중고등학교장·덕성여대학장인 송금선의 부탁으로 집필되었다. 이러한 때문인지 이 책은 송금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송금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필자가 송금선의 친일 행적을 모를 리 없다. 송금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언급이 없다는 점은 송금선을 의도적으로 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송금선의 교장 취임식 광경에 잘 드러나 있다.

  단기 4273년(1940년) 8월 26일 송금선 여사의 교장취임식이 있었다.…재단 이사장 윤치호는 “교육을 하려면 물론 좋은 건물과 설비도 필요하지마는 반드시 그 것만으로 표준으로 볼 것은 아니다. 일본에 유명한 교육자 길전송음(吉田松陰)의 사숙(私塾)을 가보면 촌 농가와 같았지마는 일본에 일류 정치가와 실업가와 문학가의 대부부분이 다 이 사숙문을 거쳐 나온 사람들이다. 송 교장은 길전숙장과 같이 우리나라에 동량지재(棟樑之材)를 배출시킬 것이다.” 하는 환영사를 말하였다.

  그러나 최은희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윤치호는 덕성학원 재단 이사장이 아니었으며,『윤치호일기』를 보면, “1940년 8월 26일 집에 있었다”라고 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최은희가 쓴 윤치호 환영사는 송금선의 교장취임을 미화하기 위해 창작한 가공의 기록을 가능성이 높다.

송금선의 덕성여실 교장 취임식 광경은 매일신보에 보인다.


  부내 안국정에 있는 덕성여자실업학교(德成女子實業學校) 교장 차리미사(車美理士) 여사는 이번 현역으로부터 은퇴하고 신 교장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전수과 과장으로 있는 송금선(宋今璇) 여사를 맞이하기로 되어 경기도 학무과에 인가 신청 중 지난 24일에 인가되어 26일 아침 열시 반에 학교에서 이임식을 거행하였다. 전 교장 차미리사는 40년 전부터 여성지도에 헌신해 오던 바 이번 덕성학교를 든든한 재단으로 만들어 놓고 제일선으로부터 은퇴하여 교주로 또는 명예교장으로 있어 뒷일을 보게 되었고 앞으로는 송 교장이 다시 이 학교의 부흥을 위하여 더욱 노력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 교장 송씨는 숙명 고녀 동경여고사(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마치었고 동덕 고녀를 거쳐 이화여자전문교수로 있으면서 부인문제연구회와 기타 각 여성단체의 중진으로 노력하는 수완 덕량이 아울러 출중한 여류 활동가인데 취임식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포부를 말하였다.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학교요 오래인 역사 속에서 새 출발을 기약할 우리학교이므로 전 교장의 큰 뜻을 받들어 총후의 학원으로 황국신민교육의 완성을 위하여 미력을 다하고자 하며 사회 여러분의 지도를 바랄 뿐입니다.”

(매일신보, 1940년 8월 27일) 


 

  송금선은 취임사에서 “길전숙장과 같이 우리나라에 동량지재(棟樑之材)를 배출시킬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 아니라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했다. 황국신민이란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여 오로지 천황을 위해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황국신민화 교육정책이 지속되는 한 조선인은 철저하게 일본인 즉 황국신민이 되거나 비국민(非國民)으로 항일세력이 되어야 했다.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었다. 

  1940년대 황국신민화 교육의 구체적인 실천내용은 학교 교육의 군사체제화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더욱 확대됨에 따라 일제는 학교 교육을 전시 동원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일제는 국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높이기 위해 체력 단련 교육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체력은 전투력과 노동력의 기본 전제가 되기 때문에 정신력 배양 못지않게 체력 단련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후꾸자와에이꼬(福澤玲子)로 창씨개명한 송금선 교장은 학생들이 인고 단련으로 체력을 길러 전시에 황국신민의 도를 선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체력 훈련을 강화하였다. 전투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체력 단련 이외에도 결전 체제에 필요한 전시 훈련이 필수적이었다. 송금선 교장은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여학생에게도 군사 교련을 시키고 있었다.

  군사 훈련은 학생들에게 국체적(國體的) 국가 관념, 즉 일본은 만세 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이니 제국 신민은 이러한 국체를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본분 수행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관념을 주입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천황제 파시즘으로 학생들을 세뇌시켜야만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이라는 신념을 갖고 전쟁터에 기꺼이 나아가 천황을 위해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송금선의 친일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차미리사 전기 집필을 의뢰한 까닭은 황국신민화 교육을 수행하였던 치부를 은폐하려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차미리사로부터 송금선으로 덕성학원이 넘어가는 과정을 외압이 없이 자발적으로 승계한 것인 양 서술한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송금선이 차미리사의 승계자가 될 경우, 자신의 최대 약점인 친일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된다. 송금선은『씨부리는 여인』서언(序言)에서, 자신을 “나는 이 숭고한 정신과 빛나는 전통을 오붓하게 계승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이 원고가 되기 전까지에는 몇백부 박어서 비매품으로 적당히 분배하고저 하였으나 너무도 사실(史實)이 소중하고 아까워서 만천하 인사의 일목에 이받이 하고저 하였음을 밝히어 두는 동시에…”라 하여, 자신이 차미리사 승계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을 출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6. 승계인가, 탈취인가


2001년 복귀한 박원국 이사장은 학내 민주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이 해 10월 임기만료로 물러났다. 덕성을 떠난 지 한참 뒤인 2004년 3월, 박원국 전 이사장은 교수협의회 회장단[회장(신상전, 독문과) 부회장(한상권, 사학과)]을 비롯하여, 운영위원[성낙돈(교직과), 오영희(심리학과)] 등 교수 4인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명예훼손], [사자(송금선)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이 건에 대해 3월 11일 성북경찰서에서 조사를 시작한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 끝에, 2005년 7월 29일 서울북부지방검찰청(북부지청)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명예훼손]은 ‘혐의 없음(증거불충분)’으로 [사자명예훼손]은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하고 그 결과를 통지하였다. 그러나 2005년 12월 7일(수)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대리 선동희 검사가 피항고인들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의 점에 대해서는 항고를 기각하고,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및 명예훼손의 점에 대하여는 재기수사를 명하였다.

  이에 2006년 1월 11월 북부지청 356호 실에서 피고소인 재조사를 받았다. 수사관이 “추가로 더 하고 싶은 말은 있는가요” 묻기에, 나의 심경을 피의자신문조서(2회)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 덕성여대 사태의 발단은 (2001년) 교수 부당해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인은 1997.2-1999.2 해직되었기에, 교수 해직의 부당함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복직될 때 많은 우리사회의 민주세력과 교수, 학생, 졸업생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인도 부당하게 해직된 동료교수의 복직을 위해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하였다고 자부합니다.
학자적 양심에 따라 한 본인의 공익적인 행동이 설사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당당히 맞설 것이며, 본인의 활동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건은 2006년 3월 8일 기소되어 1년 여 동안 재판이 진행된 끝에 이듬해 4월 26일 심리가 종결되었다. 검사는 피고인 모두에게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되었다.(2007.6.7.)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한 이후 1심 판결까지만 3년 3개월이나 걸렸다.

  검사의 항소 제기로 또 다시 항소심이 진행되었다. 9월 3일 항소심 재개 이후 5개월 동안 8차례 공판이 진행된 결과 2008년 1월 24일 항소심에서도 무죄판결이 났다. 2008년 4월 24일 대법원 상고심 판결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1심, 2심의 무죄판결을 확정지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4년여 동안 재판이 진행된 셈이다.

박원국 전 이사장의 고소 건을 특별히 거론하는 이유는, 사자(死者) 즉 송금선의 명예훼손 여부를 둘러싸고 법정공방이 오간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보자.


피고인 신상전, 한상권은 공모하여
2001.3.30. 경 위 대학교 355호실에서, 위 협의회 제4기연도 활동백서상의 피고인 신상전 명의의 머리말을 작성함에 있어, 사실은 박씨 가문이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덕성학원을 탈취하였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교협은 지난 해 거센 탄압 하에서도 덕성여대 정상화를 향한 괄목한 성과를 쟁취하였다. 첫째, 친일 재단으로서 덕성학원의 실체를 밝히는데 성공하였다. 역사의 기록에 근거한 연구와 토론의 결과 교주 노릇을 해온 박씨 가문은 덕성학원의 설립자이기는커녕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으로부터 덕성학원을 탈취하였음이 확인되었다.…”라는 등의 내용을 포함시켜 유인물을 작성한 다음, 위 유인물이 첨부된 활동백서 300여 장을 같은 해 5. 중순경 교수협의회 회원과 총학생회, 타 대학 교수협의회, 시민단체 등에 배포하여 출판물에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위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라 하였다.


  검찰은 박씨 가문이 덕성학원을 ‘탈취’하였다고 쓴 부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주장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송금선의 친일 행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1심(판사 최한돈)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증거조사결과에 의하면 피해자의 어머니 송금선을 친일파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이를 사실로 단정할 정도의 자료가 축적되고 연구가 완성되었다고 볼 정도는 아니나 송금선의 친일행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상당히 많다. 게다가 덕성여자학교의 설립자인 차미리사가 1940년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지 않고 조선총독부 또는 경기도 학무과 등의 압력으로 교장에서 물러 난 사실에 관하여도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여러 자료가 있다. 여기에 당시 민족교육을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의 교육정책 등을 보태어 판단하여 보면 송금선이 조선총독부 또는 그 하부기관 등의 후원이나 양해 없이는 덕성여자실업학교를 인수하기란 불가능하였거나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심과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여기에 우리민족이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일제와 관련된 부분에 관하여서는 좀 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는 점 등을 함께 고려하여 보면, 피고인들이 이 부분을 공소사실과 같이 표현한 것(특히 탈취하였다는 부분)은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로부터 친일행적이 의심되는 송금선으로 덕성학원의 지배권이 조선총독부 등의 비호하래 넘어간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보지 못할 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 공소사실도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사 피고인들의 위와 같은 표현이 허위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피고인들에게 허위사실에 관한 인식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증거조사결과에 의하면 2000.6.8. 덕성여대에서 열린 대토론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이 송금선의 친일행적에 관하여 연구하여 이를 발표한 사실이 있고, 피고인들은 그러한 연구내용과 발표를 믿고 신상전이 머리말을 쓴 것이어서 그에게 허위사실에 관한 인식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진 12> 1심 무죄판결문

재판부는 송금선을 친일파로 볼 수 있으며, 송금선이 덕성여실을 인수한 것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독립운동가가 세운 학교가 친일파 손으로 넘어간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탈취’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송금선이 차미리사의 승계자라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주장이 일거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