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祖교수’, ‘父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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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교수’, ‘父교수’

한상권(중세사 2분과)

1. 반성 및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아 재임용 탈락시켰다.

개강 첫날인 3월 3일(월), 나의 발걸음은 쌍문동 교정이 아닌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새 작성한 진정서를 교육위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사진 1)  여의도 국회의사당

이날 국회 방문에는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교권국장인 상명여대 박거용 교수가 동행해 주었다. 우리는 먼저 국민회의 설훈 의원실에 들렸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설훈 의원은 이해찬 의원으로부터 한 교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받았다고 말하였다. 당시 이해찬 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이었다. 김인걸 교수가 이해찬 의원에게 내 문제를 부탁하자 자신 소관 사항이 아니므로 교육위원인 설훈 의원에게 넘긴 것이다.

  며칠 후 설훈 의원은 직접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교육분과 상임위원회 질의를 위해 관련 자료를 덕성여대에 요청하였으며, 모레 있을 교육위원회에서도 대학교원 기간제임용제에 대한 교육부의 대책을 질의할 예정”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덕성여대는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 「경과서」를 3월 7일(금) 국회에 제출하였다. 나의 재임용 탈락 사유를 확인할 수 있는 첫 공식문서였다. 경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진 2) 출처:『백서』1. 11쪽

1997년 2월 25일 교원인사위원회는, 한상권 교수는 1991년 7월 31일 교내질서를 문란케 하여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계속 반성 및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아 재임용 대상자로서 부적절하므로 임기만료자로 재임용 제외를 제청하였으며, 2월 26일 열린 이사회에서 임기만료로 분류된 한상권 교수의 면직을 결정하였다.

평교수협의회 활동과 동료 교수 복직운동 등이 해직사유였던 것이다. 1991년에 받은 정직 3개월의 징계가 해직 사유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으나 혹시 내가 모르는 사유가 더 있지나 않을까 하여, “왜 해직되었냐”는 주위 사람들의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모르겠다”고 답변해 왔다. 1991년에 있었던 징계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먼저 그동안 덕성여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자네가 한번 가보지”

나는 1983년 2학기에 덕성여대에 부임하였다. 당시 덕성여대 사학과에는 김용자 교수 한 분만 있었다. 원래 이사장은 동양사 전공자를 한 사람 더 충원하려고 하였다. 그로 하여금 한국사도 가르치도록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사장은 한국사 교수를 따로 뽑는 것은 재정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양사 교수가 한국사도 가르칠 수 있고 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이사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한국사는 텔레비전 사극을 보면 다 되는데 왜 따로 선생을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덕성여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나는 장시에 관한 연구로 1982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원 연구실에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지진 관련 기사를 뽑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실록 한 권을 다 마쳤기에 지진 기사를 발췌한 카드를 들고 한영우 선생 연구실에 들렀다.

  그 때 마침 김용자 선생이 한국사 강사를 구하기 위해 한영우 교수 연구실에 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사가 교양필수이며 또 졸업정원제 실시로 입학생을 정원의 130% 뽑았기 때문에 대학마다 한국사 강사가 부족했다. 그래서 석사학위도 받기 전에 전임으로 나가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이를 입도선매라 불렀다. 한영우 선생도 입도선매를 새삼 강조하면서 마땅한 강사가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내가 한영우 선생 연구실에 들렀던 것이다. 한영우 선생은 나를 보고“자네가 한번 가보지”하며 나를 덕성여대 강사로 추천하였다. 이래서 나는 82년 봄 학기에 처음으로 덕성여대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당시 덕성여대 캠퍼스는 운니동에 있었다.


(사진 3) 운니동 캠퍼스

사학과 학생들은 기질이 드세기로 소문나 있었다. 학생들이 거의 매일 교무과에 찾아가 한국사 교수를 충원해달라고 항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장은 학생들의 등살에 못 견딘 나머지 동양사 교수 뽑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사 교수를 채용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 때문에 나는 1983년 2학기에 한국사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다.


(사진 4) 신임 교수

  1980년대에는 전두환 폭압통치에 맞서 대학마다 학생운동이 심하였는데 덕성여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학과가 있었다. 총학생회장을 한 해 걸러 한 번 꼴로 배출할 정도로 사학과 학생들의 단결심과 투쟁력은 대단했다. 내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학생들이 교무과로 몰려가는 일도 안생기자 이사장은 만족해했다. 그리고는 부임한지 한 학기 만에 사학과 학과장을 시켰다.

  나의 효용가치를 높게 평가한 이사장은 나에게 가장 골치 아픈 신문사주간 또는 학생과장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 박사학위를 받지 않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분간은 보직을 맡지 않을 수 있었다.

3. “길게 내다보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둬라”

  1986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이사장 측근 교수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최후통첩이 왔다. 학교가 그동안 공부하라고 많이 봐주었으니 이제 보은의 차원에서 학생과장이나 신문사주간 중 하나는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시험문제 출제로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에 있었다.

  출제를 마친 후 벽을 쳐다보며 많은 고심을 하였다. 보직을 맡아 이사장 측근인왕당파가 될 것인가(당시 덕성여대에서는 이사장 측근을 왕당파라고 불렀다) 아니면 쫒겨날 것인가? 즉 어용교수로 살아남느냐 아니면 미운털이 박혀 짤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덕성여대에서 이사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사장에 대한 항명은 해직을 의미했다. 소속과를 없애거나 명칭 변경을 해도, 심지어 조교수에서 전임강사로 직위를 강등해도 어느 누구도 감히 항변하지 못했다. 내가 들어오기 직전에도 덕성여대에서 교수 대규모 해직 사태가 있어 신문 사회면 톱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이사장의 ‘마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갖은 궁리를 하였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보직 제의가 오면 거절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다행이도 보직 제의는 오지 않았다). 내가 교수가 된 것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학문을 하려는 것이므로 영혼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교수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학자는 교수보다 상위가치였다. 내가 왕당파가 된다면 학자로서는 끝장이지만 교수직에서 쫒겨 난다고 하여 연구까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덕성여대를 떠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설사 떠나더라도 의미 있게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사표는 쓰지 않기로 했다. 보직을 맡지 않기 위해 사표를 냈다면 누가 믿어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말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속사정을 물어 보아라도 주면 낫겠지만 묻지도 않는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떠날 시한이 다음 학기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의미 있게 해직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1986년 3월 28일 고려대 교수 28명이 학원자율화, 개헌논의 자유화 등에 관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를 필두로 한신대(42명), 서울대(48명), 성균관대(35명), 감리교신학대(10명), 전남대(43명), 계명대(49명), 한국외국어대(28명), 영남대(50명), 연세대(32명) 등 여러 대학에서 정치민주화와 조속한 개헌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라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 퍼뜩 ‘이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성여대 교수들을 모아 시국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상이 불온한’ 나에게 절대 보직은 안 맡길 것이며 설사 해직이 된다 할지라도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1986년 4월 25일 덕성여대 교수 12명이「학원과 현실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을 했다.

(사진 5) 출처:『평협백서』, 49쪽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덕성여대 교수들은 “학원의 자율은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하며, 학문의 자유와 표현을 저해하는 일체의 공권력과 물리력은 학원으로부터 완전 철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국선언이 있자 학교는 아연 긴장했다. 덕성여대에 재직하다 다른 대학으로 옮긴 어느 교수는 덕성여대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였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덕성여대는 철저한 감시체제로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덕성여대에서는 어느 누구도 ‘패거리’를 이루면 안 되었다. 두 사람이 탁구만 쳐도 수상한 행동으로 이사장에게 보고되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 행동해야 했다. 학교에서의 모든 만남은 즉각  보고되었으므로 덕성여대 교수들은 벽에도 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대화를 할 때는 마치 귀신이 몰래 엿듣기라도 하듯이 두려워하였다.

  유일하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휴게실이라고 불렀다. 그 외의 만남은 모두 의심받았다. 이사장의 위엄과 기세가 이 지경까지 사람을 겁먹게 하였으니 덕성여대를 ‘동토의 왕국’이라 부르는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런 대학에서 무려 교수 12명이 ‘작당’하여 시국선언을 하였으니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하다.

‘동토의 왕국’이라 불리는 덕성여대에서 교수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게 된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당시 덕성여대는 교수 채용이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었다. 이사장은 교수를 철저히 실력 위주로 뽑았다. 신문에 교수 초빙 광고를 내면서 채용과정에서 인사 청탁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결격자로 처리한다고 부기했다. 이는 세 가지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하나는 덕성여대는 절대 재정비리가 없으며 이사장이 청렴결백하다는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당백의 젊고 유능한 교수를 뽑음으로써 교수가 적다는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덕성여대는 교수가 적기로 유명하였다. 학과 당 학생 160명에 평균 2-3 명의 교수가 있었다. 1992년 교육부의 대학교수 확보율 발표에서 덕성여대는 교수확보율이 44%로 전주 우석대 다음으로 전국 최저 수준을 나타냈다. 당시 대학교수 확보율 평균은 71%였으며 사립대는 68%였다.

(사진 6) 출처: 『평협백서』, 501쪽

  마지막으로 실력 있는 교수를 채용하면 3-4년 안에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므로 계속 새로운 교수를 충원할 수 있었다. 덕성여대는 월급이 적고 승진도 제 때에 시켜 주지 않는 등 근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이직률이 높았다.

  80년대 초 교육부 감사에서 3년 동안 36명의 교수가 들어왔다가 24명이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 너무 높은 이직률이 감사 지적사항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과에서는 4년 동안 교수 전체가 물갈이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낮 설기 때문에 과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도 졸업생들이 학교에 찾아오지를 않았다. 내가 사학과에 부임했을 때 학생들은 “제발 다른 과 교수님들처럼 덕성여대를 떠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도입한 졸업정원제가 갖가지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1985년부터 유명무실화되자 덕성여대에도 예기치 않은 변화가 찾아 왔다. 타 대학에서의 교수충원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에 1985년 이후로 교수 이직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젊은 교수들은 현재 자기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잠시 거쳐 지나가는 ‘정거장’이 아니라 평생 있을 직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시국선언을 통해 의기투합한 서명교수들은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하였고, 평교수협의회를 건설하여 대학 개혁에 나섰다.

덕성여대 역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인 시국선언이 있자 보직 교수들은 금기를 깬 불순분자들을 학교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흥분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사장의 입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옹호 발언이 나오자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사장은 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한 번은 내 연구실에 밤늦게 찾아와 “불편한 점은 없느냐” “춥지는 않으냐”고 묻고 “길게 내다보고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두라”며 격려의 말을 하였다. 하루는 퇴근하는데 학교 앞 다리 위에서 빵빵하는 크락션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이사장 차였다.(1997년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면서 이사장실도 폐쇄되었지만 당시에는 본부 행정동 2층 총장실 바로 옆에 이사장 집무실이 있었다.)

  이사장은 차를 세우고 자신은 하아야트호텔에 가는데 나더러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지하철을 타러 간다고 대답하자 차에 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영어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부인은 무엇 하는지’ 등등을 물어 보았다. 삼선교 전철역에 이르러 내리겠다고 하자 나폴레옹제과점에 차를 세우고 과자를 사서 아이들한테 갖다 주라고 하였다.

덕성여대 교직원은 감히 이사장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이사장을 지칭할 때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표시했다. 그런 이사장이 한상권 교수가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더라고 칭찬하니 보직교수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조계사 앞에서 학교 행 좌석버스를 탔는데 그 차에 타고 있던 덕성여대 교수가 나를 불러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이 분’한테 내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 교수는 외국에 같다 오면서 나에게 테니스공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밀월도 잠깐이었다.

4. “창끝이 나한테 향할지 모르겠다.”

1987년 1월 15일 경찰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21. 언어학과 3년)의 죽음은 대학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경찰은 책상을 ‘탁’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말을 하여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한 젊은이가 경찰에 끌려간 지 수 시간 만에 죽음으로 변해 나온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추모와 고문규탄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형성, 사회의 각계각층과 대학가로 번져갔다.

  1월 20일 서울대생이 주최한 추모제에서 같은 과 여학생 학우가 흐느끼며 낭송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는 조시는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서울대 양병우 교수가 박군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였고, 23일 고려대 교수 5명(이문영, 이상신, 김충렬, 권창은, 윤용)이 박군 분향소를 분향하면서 ‘고려대학교조상교수 일동’ 명의로 된 유인물을 전달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조성한 공포분위기 때문에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교수들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미미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2월 3일 한신대 교수 54명이「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교수단 명의로 최초로 발표하였다. 교수들의 성명으로 한신대 정대위 학장은 문교부 대학정책실장으로부터 “한신대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가 타 대학 교수들에게 미칠 영향을 크게 우려한다”, “학생들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구두경고를 받았다. 박군 모교인 서울대에서는 2월 5일 교수 1백여 명이 박군에 대한 추도의사표시로 밤 9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각자 연구실에 남아 있다가 귀가하였다.

  한신대 교수단 명의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덕성여대 교수 네 명이 학교 근처에 모여 박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입장 발표를 둘러싸고 밤늦게까지 설전을 벌였다.

  두 명은 효과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며 반대하였다. 아직 서울대나 고대, 연대 등 주요 대학에서도 성명서가 나오지 않았는데 덕성여대 같이 규모가 작은 대학에서 성명서를 발표해봤자 신문에 한 줄도 안 나고 헛되이 피해만 입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하려면 동조자가 최소한 두 자리 숫자는 되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공포 분위기하에서 누가 동참하겠느냐며 반대하였다. 성명서 발표가 위험 부담이 큰 만큼 다른 대학의 움직임을 보고 서서히 동참하자는 신중론이었다.

  반면 두 명은 2월 7일 재야 48개 단체가 공동으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개최하는데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우리의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교수들이 성명서라도 발표하여 국민대회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나중에 가톨릭신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명동성당에서의 추도회에서 한 신부가 강론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덕성여대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사진 7) 추도회전야 초긴장 대치 출처<『평협백서』, 50쪽>

1987년 2월 6일 덕성여대교수 10명이「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사진 8) 출처:『평협백서』, 52쪽<동아, 조선>

교수들은 이 성명서에서 “이번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간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외면한 채 진행되는 일련의 반민주적 조치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어온 결과 발생한 것이다.…민주주의 사회는 인간성의 존엄과 양심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때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가 신뢰하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위협하는 것이다”라며 “오늘날 사회가 이러한 상황으로까지 악화된데 대해 대학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 같은 인권 유린이 다시는 자행되지 않기를 바라며 민주화와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결의하였다.

  덕성여대 성명서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하여 실명으로 발표된 유일한 교수성명서였다. 우리의 성명서가 언론에 보도되자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보안사 요원이 학교에 파견 나와 하늘이 두 쪽 나도 주동자를 색출하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러자 보직 교수들도 덩달아 날뛰었다. 이번에는 이사장도 비호하고 나서지 않았다. 이사장은 “앞으로 창끝이 나한테 향할지도 모르겠다”며 보직교수들에게 위기감을 토로하였다.

덕성여대 교수들은 1987년 5월 민정당정권의 장기집권음모인 ‘4ㆍ13 호헌 조치’에 대한 대학가의 반대 성명 대열에도 동참하였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장기집권음모를 선명하게 드러낸 ‘4ㆍ13 개헌논의 유보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맞서 ‘호헌철폐 및 민주개헌 요구’ 운동이 사회각계에 빠른 속도록 확산되어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음모를 좌절시켰다.

  이 과정에서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4월 22일 고려대 교수 30명이 성명을 낸 것을 필두로 5월 14일까지 46개 대학 교수 1,437명이 서명에 참여하였다. 덕성여대 교수 14명은 5월 7일에 이 서명운동에 동참하였다.

5.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위상을 주체적으로 정립한다.

1987년 ‘6ㆍ29 선언’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민주화 분위기가 확산됨에 따라, 학생활동의 자유와 교수들의 활동영역 확대 두 축으로 대학 민주화가 가시화되었다. 교내 시위 등과 관련해 제적당했던 시국 관련 제적자들이 2학기 개강과 함께 복학하였고, 교수들의 학내 위상 정립을 위한 활동이 전 대학가에 파급되었다.

  교수들은 학내 위상정립을 위해 자신들의 의사를 대내외적으로 결집시켜 표출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대의기구의 출현을 요구하면서 [교수협의회] 또는 [평교수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각 대학에서의 교수협의회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세대 오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교수사회에 확립하는 길밖에 없다. 평교수들의 의사와 비판적 견해가 제도적으로 수렴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대학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교수평의회의 구성인 것이다. 이는 관료적 대학의 권력구조를 평등화하고 민주주의를 대학 내에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대학의 자율과 민주화는 교수평의회의 장치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국과 대학 모두 깨달아야 한다.(심계선, 「대학가에 퍼지는 교수협의회 운동」, 신동아 1987년 9월호)

  대학가의 민주화 흐름에 발맞추어 덕성여대에서도 서명교수들을 중심으로 하여 1987년 말 평교수협의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공식 출범은 처음에는 실패하였고, 1년 뒤인 1988년 10월 11일에 성공적으로 결성하였다.

(사진 9) 평교수협의회 발기대회 개최, 덕성여대신문 275호, 88.1.1<출처:『평협백서』 81쪽>

평교수협의회 창립선언문에서 교수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주체적으로 정립한다.”며 “폐쇄된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 교수들 간의 연대감 속에서 자유롭게 활기찬 대학문화를 창출할 것”을 다짐했다. 평교수협의회는 (1) 대학의 재단에 맞서는 위상 정립 (2) 제도 개선 (3) 학사 인사 행정 운용의 정상화 등을 요구하였다. 이는 이사장 일인지배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이후 평교수협의회는 덕성여대 민주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88년 말부터 1990년 초에 이르기까지 평교수협의회는 재정, 인사, 총장선출 등 학교 운영 전반의 정상화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및 대안제시로 구성원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 냈다. 한편 평교수협의회는 사회 민주화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에 대한 지지 및 후원과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활동에 대한 참여 및 협조는 대학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하나로 인식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1990년 초, 선거에서 드러난 민의를 배반하고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 민자당이 출현하였다. 국회는 3월 16일 의원 입법으로 기습적으로 사립학교법을 개악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개악된 사립학교법에 반발하는 국민 여론을 무시한 채 4월 7일 이 법을 공포해 버렸다.

  개악된 사립학교법은 정부의 행정 감독권을 축소하여 사학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사립학교 교직원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기만적인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가공할만한 권한을 재단에 부여하여 사학의 공익성과 교육의 자율성을 철저히 유린하는 전대미문의 악법이었다.

첫째, 온갖 비리로 사회 지탄의 표적이 되어 온 재단에게 교수와 직원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부여하였다. 재단은 총장 임면권은 물론 총장이 가져야할 인사권마저 장악함으로써 교수와 직원 및 학생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대학 구성주체와 교육주체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아무 권한도 없는 대학평의회나 예결산자문위원회와 같은 어용기구를 설치하여. 재단이 교수 직원 학생들의 정당한 권한을 원천 봉쇄하여 인사 행정 재정 등 대학 운영 전반을 전횡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재단의 학교 사유화와 독점 및 거대 재벌화를 공공연히 보장하고 있었다. 재단 이사장의 직계 존․비속 및 그 배우자를 총장으로 내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친인척들로 재단이사회가 40퍼센트까지 채울 수 있게 함으로써 망국적인 족벌 경영체제를 옹호하였다.

  요컨대 이 법은 교수 직원 학생 등 대학 주체의 자치권과 자율권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사회적으로 도덕성을 의심받고 있는 재단에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허용함으로써 교육에 봉사하는 역할을 수임 받은 재단이 오히려 교육주체의 교육활동을 자의적으로 복속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1990년 사립학교법 개악으로 1980년 이후 사문화되었고 문교부에서조차 폐지를 약속했던 교수재임용제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그 첫 희생자가 덕성여대에서 나왔다. 1990년 8월 25일 개강을 불과 사흘 앞두고 평교수협의회 운영위원이었던 성낙돈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된 것이다.

  명백한 탈락 사유가 없었다. 교내민주화와 사학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8월 27일 평교수협의회는 임시비상총회를 개최하여 교원인사위원회의 성 교수 재임용 동의 부결 조치에 대해 강력 대응할 것을 결의하였고, 도서관 건물에 있는 교수휴게실에 [성교수재임용탈락철회를위한투쟁본부]를 설치하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사진 10)  성낙돈 교수 복직을 요구하며 집회에 참석한 평교수협의회 교수들의 모습

평교수협의회는, 교수재임용제를 악용한 덕성여대에 대한 학내외의 비판여론과 복직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대학사회의 전폭적인 격려와 지원에 힘입어, 대학사상 유례가 없는 54일간의 철야농성을 포함하여 75일간의 장기간 항의농성을 통해, 11월 9일 마침내 학교 측으로부터 ‘성 교수 복직 약속’을 구두로 받아냈다.

  평교수협의회는, 그간의 수차례 공식 협상 결과 학교 측이 성 교수 복직을 확실히 약속하면서 학내 분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화합을 제시하여 옴에 따라 11월 16일 철야농성을 마무리 하였다.

(사진 11) 성낙돈교수 복직가능 시사로 물꼬터, 한겨레 1990.11.14<출처:『평협백서』, 235쪽>  

그러나 학교측은 대승적 차원에서 성낙돈 교수의 복직을 차기 총장에게 위임한다는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 복직 약속을 이행하기는커녕, 총학생회장을 무기정학하고, 복직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평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6인을 무더기 징계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교수협의회 활동을 하였던 교수들에 대해서는 승진 및 보직에서 완전 배제하는 등 온갖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면서 극도로 탄압하였다.

(사진 12) 총학생회장 무기정학 <출처: 『평협백서』, 391쪽>

평교수협의회는 학교 측의 집요한 탄압에 못 이긴 나머지 1993년 3월 16일 공식해체를 선언하였다. “평교수협의회를 창설하여 사회와 학원의 민주화, 교권 확립, 연구풍토 조성이라는 대의 아래 참다운 대학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이러한 이념을 구현할 현실적 영역은 날이 갈수록 좁아질 뿐만 아니라 본래의 취지가 발현되기는커녕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유감스러운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기도 하여 더 이상 평교수협의회가 존립할 의의가 없다”는 것이 해체 이유였다.

  평교수협의회가 해체된 후 이사장의 전횡은 날로 심해졌다. 평교수협의회 활동을 하였던 교수들의 가슴에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이들은 다른 대학으로 옮기거나 전향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과 양심이 사라진 동토의 왕국에서 숨죽인 채 하루하루 연명해야만 했다.

6. “아무런 하자가 없고 다만 ‘알파’가 작용하여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평교수협의회 해산과 더불어 교수들의 교권은 땅에 떨어졌다. 덕성여대에는 직급상 조교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1997년 당시 전체교수 134명 가운데 37.3%인 50명이 조교수였다. 전임강사도 30명이나 돼 22.3%를 차지하였다. 교수와 부교수는 각각 27명으로 20.1%에 불과하였다.

이 같은 직급 비율은 다른 대학과 비교할 때 큰 차이점을 보였다. 우리나라 전체 대학의 교수 직급 비율은 40.6%, 부교수 23.5%, 조교수 22.8%, 전임강사 12.6%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덕성여대 교수들의 연령이 다른 대학에 비해 젊은 것도 아니었다. 교수들의 평균 연령은 46.8세였다.

이 같은 직급 비율은 이사장의 잇따른 승진 보류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10년 이상 조교수에 머물러 있는 교수가 절반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조교수와 부교수의 구분은 신라시대 골품제에서 6두품과 진골의 경계와 같았다. 승진이 계속 보류되는 교수들은 대부분 평교수협의회 활동 경력을 갖고 있었다.

  승진심사는 내규에서 규정한 최저소요연수, 연구실적, 교육실적, 근무실적, 봉사실적 등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승진을 하려면 전향을 선언하고 이사장에게 충성을 보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임용탈락 안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평교수협의회 활동을 하였던 교수들은 이사장 지배체제가 계속되는 한 조교수로 정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助교수를 ‘祖교수’라 부르기로 했다. 이 용어는 대학사회에 화제가 되었으며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다.

(사진 13) 낮은 급여 수준에 ‘祖교수’ 수두룩<출처: 『백서』 1, 371쪽>

나는 1983년 덕성여자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87년 조교수로 한 번 승진한 이후 97년까지 10년간 승진은 물론 호봉마저 동결되어 승급조차 못한 채 조교수로 근무하여 왔다. 나보다 뒤늦게 부임한 동료들이 부교수, 정교수로 승진할 때마다 승진에서 누락된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우리 학교에 출강하였던 분이 다른 대학에 취직하여 정교수로 승진할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조교수로 있었다. 승진 발표가 있는 4월과 10월이 되면 나를 비롯하여 평교수협의회 활동을 하였던 교수들은 기분이 우울했다. 승진 탈락의 괴로움을 잊고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당하게 승진에서 탈락되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학교 측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한상권 전 조교수의 진정서에 의하면 무려 10년간 특별한 이유 없이 승진을 못하였고 재임용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바,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한상권 전 조교수는 93년 8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훨씬 전인 87년에 조교수로 승진하였습니다. 우리대학이 석사학위 소지자를 조교수로 승진시킨 것은 오히려 사기진작을 위한 이례적인 조치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며 계속 승진에 누락된 것은 박사학위 취득까지 석사학위 취득 후 11년 6개월, 본 대학 임용 후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린 학업부진과 중징계 이후에도 파벌을 조성하여 불평불만을 일삼아 학내질서를 문란케 하며 면학분위기를 방해하는 등 교육자로서의 불건전한 근무태도가 주된 이유입니다. 이는 또한 대부분의 대학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며 근래에는 박사학위 취득 직후에도 전임강사로 임용되고 있습니다. 94년부터 96년까지 한상권 전 조교수의 근무실적은 승진의 필요조건에 미달되는 낮은 점수였습니다.(「한상권 전 조교수의 재임용 제외에 관한 학교의 입장」1997.4.14)  

내가 승진에서 탈락된 것은 인사보복이 아니라 객관적인 심사기준에 미달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학교측이 국민회의 배종무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96년 나의 평균 근무 실적은 82.4였다(1학기 82.3, 2학기 82.5).

  덕성여대「교원 승진임용 심사기준에 관한 내규」에 따르면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는데 필요한 교원근무실적 기준 점수는 80점이었다. 더구나 승진임용심사기준에 교원근무실적기준을 추가한 것은 1997년 1월 1일 이후였다. 따라서 근무실적이 미달되어 승진을 시키지 않았다는 학교 측의 주장은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1997년 6.9부터 6.19까지 교육부가 실시한 학교법인 덕성학원에 및 덕성여자대학교에 대한 감사결과서를 보면 학교 측의 주장이 전혀 사실무근임을 알 수 있다. 교육부 감사결과서는 이사장의 대학학사행정 간섭 사례로, ‘승진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교원의 승진임용은 덕성여자대학교「교원승진임용 심사기준에 관한 내규」규정에 의거하여 최저 소요 연수, 전 임용기간중의 연구실적, 교육실적, 교원근무실적(‘97.1.1신설), 봉사실적을 종합 평가한 후 종합평가기준에 충족될 경우, 동 내규 규정에 의거 결격사유가 없는 자는 사립학교법 및 덕성학원 정관 규정에 따라 총장이 교원인사위원회의 임명 제청 동의를 받아 동 법인 정관에 의거 이사장에게 임명제청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 교원승진 임용에 관한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매년 4월 1일 및 10월 1일 현재로「교원승진임용심사기준내규」에 의거, 승진대상자에 대한 종합평가 자료를 작성한 후 승진요건이 충족된 교원에 대해서 총장이 교원인사위원회에 승진임용제청을 위한 심의요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이사장에게 동 승진대상자에 대한 종합평가 자료를 FAX 또는 인편으로 전달하여 이사장이 지정하는 소수의 인원만 승진후보자로 선정하여 교원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사장에게 승진제청 함으로써,

– ‘94년 4월 및 10월에는 승진요건 충족자 21명 중 14.3%에 불과한 3명을, ’95년 4월 및 10월에는 승진요건 충족자 29명 중 51.7%에 해당하는 15명을, ‘96년 4월 및 10월에는 승진요건 충족자 27명 중 25.9%에 불과한 7명만을, ’97년 4월에는 승진요건 충족자 13명 중 23.0%에 불과한 3명만을 승진시킨 사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원승진시 이사장이 사전에 승진대상자를 결정하여 소수인원만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94년부터 ’97년까지 승진요건 충족자 90명 가운데 30%에 해당하는 28명만 승진시켰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승진요건 충족자에 대해 이사장이 추가로 학교발전참여도 및 기여도 등을 판단하여 승진을 제한하고 있으면서도, ‘97.3.1자로 조교수에서 부교수승진 및 부교수에서 교수승진 대상자에 대한 승진 최저소요연수를 각각 1년씩 늘리고 근무실적점수도 80점으로 규정하여 교원승진심사기준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덕성여대에서 승진은 하늘의 별따기이었으며 그야말로 이사장의 특별한 은총을 입지 않으면 절대 부교수 정교수가 될 수 없었다. 이사장은 승진을 무기로 교수들의 충성과 복종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서양화과 이반 교수의 경우 충북대에서 조교수로 있다가 1985년 덕성여대로 이적하였다. 그는 1987년 6월 전체 교수회의 석상에서 서명교수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았다. 이에 학내 교수 22명이 연명으로 1987년 10월 학장을 면담하고 부교수 승진에서 두 번이나 누락된 서양화과 이반 교수의 승진이 합리적인 인사행정에 의거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하였다.(당시 덕성여대는 단과대학이었기에 학장에게 건의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학장은 “승진에 필요한 3가지 요건인 승진소요기간, 연구실적평점, 근무실적평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다만 ‘알파’가 작용하여 누락되었다“고 답변하였다. 이후로도 이반 교수는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했다. 계속 ‘알파’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반 교수가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한 것은 1997년 2학기였다. 나의 재임용탈락으로 교수사회가 동요하자 대학당국은 서둘러「대학 교직원 사기 진작 시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전 교직원(임시직포함)에게 하계 휴가비를 총액기준 100% 지급하고, 직급별 한계 호봉도 철폐하며 이를 소급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교수들이 직급별 한계 호봉제로 승급이 안 되어 받지 못했던 호봉 승급분을 목돈으로 받게 되었다. 이반 선생의 부교수 승진은 이러한 학교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교육부가 감사를 통해 교수들이 부당하게 승진에서 탈락되었음을 밝혀내고 이들을 97.10.1자로 승진시키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교원승진임용심사기준에 관한 내규에 따라 종합평가한 결과 승진요건 충족자에 대하여는 동 규정 제4조의 규정에 의거 결격사유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97.10.1자로 승진 조치와 아울러 그에 따른 호봉 재 사정 등 보수체계를 재정립할 것

  이반 교수는 2005년 1학기 부교수로 덕성여대에서 정년을 맞이하였다. 승진 소요 연수를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11년이나 늦게 승진한 이반 교수는 자신의 이력서에 부교수를 ‘父교수’로 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