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1960년대 후반 서울시 주택정책과 ‘중산층’문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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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 주택정책과 ‘중산층’문제 인식」

(2015.08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김재원(현대사분과)

 

연구의 출발

 

대학원 진학 후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하나 있다. 문제의식.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문제의식이 뭐니?” 사실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논문에 녹여 냈는지는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내게는 문제의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소박하게나마 그 놈의 ‘문제의식’을 ‘논문을 써야만 하는 이유’라고 정리한다면 할 말은 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사실 그 이야기가 내 논문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 1학기 때의 일이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는데, 문든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강남에 땅을 사지 않았을까?’, ‘그때 할아버지가 강남에 땅만 샀어도 난 대학원에 오지 않았겠지?’ ‘강남땅이 똥값일 때 땅 사서 부자된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따위의 생각들이었다. 우습지만 문제의식의 출발은 내 방 침대에서의 잡생각이었다. 그러한 질문들이 다듬어지고 구체화되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내가 바라보던 세상이란 “왜 한국에는 중산층만 있고, 노동자는 없을까”였다. 타자, 혹은 사회가 인식하는 중산층의 기준과는 무관하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인식하는 한국인은 절대 다수다. 반면에 회사에서 회장님, 사장님들께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노동하는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심지어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노동절을 굳이 근로자의 날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근면성실한 사람’으로 부르고 애쓴다.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은 더욱 노골화되어 나타난다. 계급성은 희석되고 계층성은 ‘중산층’이라는 이름으로 욕망된다.

할아버지-땅값-중산층,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은 석사과정 2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논문을 작성해야 될 시기가 닥쳐올수록 나는 이 단어들을 ‘어른’스럽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할아버지가 집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었던 시기와 서울에서 땅값, 혹은 집값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던 시기는 그 때를 같이 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은 그렇게 내 연구시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연구시기를 파헤치던 중 아버지께 소름돋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집은 사실 무허가였어”. 그렇다. 나의 조부님은 무허가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집을 짓고 살았어. 집을 가지려면 달마다 돈을 내야 했거든”. 그렇다. 나의 조부님은 직장인이 아닌 일용직 목수였던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1960년대 후반 한국을, 좁게는 서울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연구는 그렇게 힘을 받기 시작했다.

 

어른스럽게 정리하기

 

1960년대 후반 서울시의 인구는 그야말로 폭증을 맞이한다. 1960년 244만 5천명에 달했던 인구는 1966년 380만으로 증가하였으며 유입인구만 5년간 140만 명을 웃돌 정도로 서울로의 인구집중현상은 심각했다. 문제는 주택이었다. 주택부족율은 무려 50%대를 육박했다. 그렇다고 50%가 집을 가지고 있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50%의 자가주택 비율에는 판자집과 천막, 창고, 등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 가거주시설(하숙, 병원, 기숙사, 고아원, 양로원, 사찰 등)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집 있는 사람이 30% 밖에 없는 공간, 1960년대 중후반 수도 서울의 민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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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967년 남산인근의 무허가주택가 전경 (서울사진아카이브)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은 ‘부유’해지고 있었다. 1962년 실시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한국 경제는 1964년까지 매년 5.5%씩의 GNP 성장률을 보였으며 1965년부터 1966년간 11.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2차 산업의 성장이 있었고 이러한 경제성장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1966년 시점에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등장한 단어가 있었다. 중산층! 내가 찾던 그 단어였다. 이제 얼추 ‘세 단어’가 조합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1966년 조선일보, 정경연구, 청맥 등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서는 특집기획으로 ‘중산층 논쟁’을 벌여주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정권으로서는 골치가 아팠을 일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특정 도시로의 인구유입(특히 서울로의 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당대 지식인들은 중산층을 분석하며 “체제안정”까지 들먹였다. 체제안정에 대한 고민은 지식인들이 분석한 ‘중산층’이 가진 중요한 역할이었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안정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역할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중산층’의 안정적 보호는 체제불안요소를 제거한 것과 같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이들을 관리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시에서의 주택문제는 박정희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절대적인 주택부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박정희정권의 선택은 ‘중산층’만의 안정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은 집을 사게 해줄게”가 해결책이었다. 그러면서 세간에는 달콤한 말들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름부터 유혹적이지 않은가, 중산층! 나도 집만 사면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불도저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국회에서 노골적으로 이렇게 외쳤다. “앞으로 서울시는 중산층과 영세서민의 주택정책을 구분해서 실시하겠소”. 당대의 주택구매방법은 월납입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매달 정기적인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중산층으로 불리며 집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익히 아는 사실처럼 영세서민을 위한 주택정책은 공수표였다. 그나마 대책이라고 세웠던 계획이 시민아파트였지만 정작 비싼 가격에 영세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마저도 와우아파트 붕괴와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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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1969년 서울시내 시민아파트 건설현장 (서울사진아카이브)

이를 위해 박정희정권은 민간의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중장비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소규모 건축업자들은 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죽이 이렇게 척척 맞아가는 듯 했지만 문제에 봉착한다. 미친 듯이 올라간 땅값이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한 도시개발이 화근이 되었다. 나라 곳간에 돈이 없으니 땅주인들한테 돈 걷어서 개발을 시키려 했는데, 그 땅주인들이 뱉어낸 돈이 아쉬워 땅값을 올린 것이었다. 때문에 아쉽게도 땅 값이 올라간 곳에 영세한 건축업자들이 대규모로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돈이 왜 없어. 돈은 은행에 있어”. 그렇다. 선택은 1969년 주택은행의 설립이었다. 주택은행은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그 돈으로 땅을 매입, 대규모 주택을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정부-주택은행-기업’의 Three Combo는 막강하게 작동하여 ‘강남’이라는 전무후무한 중산층用 공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멋스러운’ 마무리

나의 논문에는 이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정권하 주택정책의 방향성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노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회안정화’라는 목적으로 특정계층을 주조하여 ‘중산층’담론을 확산시키고 주택정책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금융을 통해 기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부동산투자를 활성화시키는 등 경제개발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사회를 재구조화했다.”

할아버지의 주거문제로 시작한 나의 논문은 박정희정권의 ‘사회 재구조화’와 ‘계층주조’, ‘주택의 상품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논문을 쓰면서 잊지 않으려 했던 문제는 현재 나의 계급성, 나의 주거상태, 그리고 정치적 지향 사이의 괴리였다. 사실 이 논문의 끝자락에는 주조된 ‘중산층’의 정치지향성을 담고 싶었다. 그러나 총선과 대선 등의 결과, 그리고 주거문제의 단편적 연결만으로 정치지향을 증명해 낼 수 없음을 확인하고는 아쉽게도 그 내용을 녹여내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주거와 계급성, 그리고 정치지향 등을 엮어낸 글을 쓰고 싶다. 아울러 논문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기관과의 관계도 더욱 면밀한 분석이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