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6세기 후반 ~ 7세기 초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와 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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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

6세기 후반 ~ 7세기 초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와 그 변화
-요서 지역 고구려의 라(邏)와 수의 진(鎭)ㆍ수(戍)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82, 2011 )

이정빈(고대사분과)

  국경은 근대 국민국가의 외형적 경계를 지상에 투사한 것으로, 혹자는 국경 긋기를 통해 국민국가가 탄생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런 만큼 국경은 국민국가의 배타성을 온전히 담고 있다. 독도 문제 혹은 대선과정에서 논란이 된 이른바 NLL문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많은 이들에게 독도와 NLL은 ‘한 치의 양보가 불가능한 우리 고유의 영역 내지 국민의 생명선’인 것이다.

이처럼 근대의 국경은 ‘고유의 생명체’처럼 인식되는데, 그런 이유에서 국경 개념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부터 적용되기 쉽다. 그러면 과연 고대 국가의 경계는 어떠한 형태였을까.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마련된 기획발표회, 「한국 고대의 국경과 변경」(2011. 6. 18)의 한 꼭지로 출발하였다.

 


<언론에 보도된 NLL(좌), 교과서에 실린 6세기 삼국의 국경(우)>

2009년부터 준비 중인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는 고구려ㆍ수 전쟁사이다. 이에 기획발표회에 참여하며 일석이조(?)를 노리고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와 수의 변경지대」를 검토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롭게 다가온 공간이 요서지역이었다. 고구려ㆍ수의 갈등이 요서지역에서부터 발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충돌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의 요령성(좌), 요서 지역의 주요 지형(우)>

요서의 범위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현재의 요령성의 서부 지역과 내몽골자치구 남부의 일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동쪽으로 요하, 북․서쪽으로 시라무렌, 남․서쪽으로 난하 및 연산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서방 경계는 요하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요하를 흡사 국경선처럼 여기고 요서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선 월경지대 내지 이역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요서 지역은 농경과 목축이 모두 가능한 농목(農牧) 전이지대(轉移地帶)의 동단으로 일찍부터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공존했다. 이러한 사정은 5~6세기 중반에도 마찬가지였다.

5~6세기 중반 요서지역에는 고막해ㆍ거란이 거주하였고, 지두우ㆍ실위ㆍ말갈 등의 종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북조의 여러 나라와 유연ㆍ돌궐이 이 지역을 두고 각축했다. 고구려 또한 5세기 이후 요서 지역을 군사활동의 무대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일부를 관할했다. 5~6세기 중반 요서지역에서는 동아시아의 여러 세력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하를 고정된 국경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지역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고구려의 변경지대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한 것이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였다. 무려라는 요하의 서쪽에 두어진 고구려의 군사기지였다.『수서』와『자치통감』을 보면 그에 대한 찬자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구려는 요수의 서쪽에 라(邏)를 두고 [요수를] 건너는 자를 경계하고 살폈다.”

여기서 라의 의미를 주목했다. 무려라에서 무려가 고유명사라면, 라는 일반명사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는 지도교수 조인성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에 무려라 이외에도 다수의 라를 상정하고 이를 고구려 요서경영의 거점으로 주목하였다.

  이 글의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 변경지대를 탐색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고구려의 변경지대를 직접 말해줄 만한 사료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당시 고구려의 서방에 자리한 수의 세력범위는 어느 정도의 짐작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수의 세력범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풀어가고자 했다.

  6세기 후반 수는 의무려산 일대~대릉하 하류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수가 이 지역을 모두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유성(요령성 조양시)에 영주총관부를 설치했지만 수대 총관부의 기능이 그러하였듯 그 주변 지역의 제종족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단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5세기 이후 고구려 또한 요서 지역의 일부를 세력범위에 두었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6세기 후반 고구려와 수의 입장에서 볼 때 요서 지역은 변경지대로, 양국 간의 완충지대 내지 중간지대로 기능하였다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요서 지역에 대한 수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580년대 후반~590년대 초반 수는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598년 고구려의 요서공격은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감행된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의 요서공격은 30만 대군을 동원한 수의 반격으로 이어졌다. 양국은 대규모 전쟁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나 수의 반격은 실행되지 못했다. 비록 요서 지역에서 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통치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여 전쟁을 수행할만한 여건이 불비하였기 때문이다.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좌), 7세기 초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우)>

598년 전쟁의 위기로부터 적어도 607년까지 고구려와 수의 양국관계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이 무렵 수는 의무려산~대릉하 하류로부터 요하 방면으로 동진하고 있었다. 이곳에 진(鎭)ㆍ수(戍)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회원진과 노하진이 대표적이다.

진ㆍ수는 수대 변경지대에 두어진 군사적 통치단위의 하나로 612~614년 고구려ㆍ수 전쟁에서는 군수기지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그 설치는 요서 지역에 대한 수의 지배력이 한층 강화되고, 고구려 공격을 위한 준비가 차분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거란ㆍ말갈을 동원해 진ㆍ수를 공격함으로써 수의 동진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607년부터 수의 고구려 공격이 공식적으로 추진되며 수의 동진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의 완충지대 내지 중간지대는 더욱 좁혀졌고, 마침내 611년 고구려의 무려라가 함락되며 이듬해의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의 변경지대를 가늠하고 대수관계의 추이를 조금이나마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첫째 요서 지역을 고구려ㆍ수와 같은 강국의 시각을 중심으로 바라보았고, 주요 거주민이었던 거란․말갈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 최근의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변경지대는 중심보다 주변의 시선을 통해 볼 때 그 복합성 내지 혼종성이 더욱 잘 드러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고구려 요서경영의 방식과 변경지대의 역사적 성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현장답사를 진행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요서 지역의 지리적 특색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 글의 한계는 차후의 연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필자소개>
필자 이정빈 선생님은 현재 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서 한국고대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주된 관심분야는 고구려 군사사로 현재 고구려ㆍ수 전쟁사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대표 논문으로는 <고구려 東盟의 정치의례적 성격과 기능>(한국고대사연구 41, 2006),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역사와 현실 72, 2009), <6~7세기 고구려의 쇠뇌 운용과 군사적 변화>(군사 77, 2011) 등이 있습니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분야에서 매우 주목되는 연구 성과로서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상’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2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편집위원장 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