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합설 의정부의 내부 구조와 공사색(公事色)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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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합설 의정부의 내부 구조와
공사색(公事色)의 위상
(『역사와 현실』95, 2015.3 )

 

이경동(중세2사분과)

 

 

  이 논문은 2008년도부터 시작된 은대조례학습반을 모태로 육전조례연구반에서 수행한『은대조례』․『은대편고』․『육전조례』등 법전류 자료 학습의 결과물이다. 처음 시작은 조선후기 정치제도사의 올바른 이해를 하고자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은대조례』와 『육전조례』를 편찬한 시기인 고종대 초반 의정부의 구조와 위상을 연구반의 발표 주제로 선정하였다. 이 논문은 비변사(備邊司)가 의정부에 합설된 이후 의정부의 하위 기구였던 공사색(公事色)과 관련한 것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사진1] 고종대 편찬한 『은대조례(銀臺條例)』와 『육전조례(六典條例)』한국학중앙연구원

  의정부는 주지하다시피 재상인 의정(議政)이 소속된 조선의 최고 행정 기관이다. 조선후기에는 비변사(備邊司)가 상설화됨에 따라 기존에 의정부가 수행했던 국정운영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능을 비변사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운영되던 조선후기 비변사 중심의 국정운영 체제는 1865년(고종 2) 3월에 전격적으로 의정부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그 결과 비변사는 공사색(公事色)이라는 명칭으로 의정부와 합설되었고, 비변사 청사는 의정부의 조방(朝房)이 되었다. 이후 의정부는 고종 초 국정운영의 핵심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를 포함하여 많은 한국사 관련 서적에는 이 조치를 비변사(備邊司)의 폐지와 의정부(議政府)의 복설(復設)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비변사는 폐지된 것이 아니라 공사색이라는 명칭으로 의정부에 합설되었으며, 의정부 또한 기능이 약화되었을지는 몰라도 관서 자체가 폐지되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복설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의정부와 비변사의 ‘합설(合設)’이 되어야 하며, 이전의 의정부와 구분하기 위해서 ‘합설 의정부’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합설 의정부로의 재편은 의정부와 비변사 두 관서를 인위적으로 결합시킨 것을 의미한다. 합설의 구체적 실상은 1864년(고종 1) 2월 「본사정부거행조건분장절목」을 통한 의정부와 비변사 간의 업무분장 조치와 1865년 3월 합설 의정부 정비의 결과로서 정리된 「정부체통연혁별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른바 대원군 집권기로 일컬어지는 1873년(고종 10)까지의 전 기간을 거쳐서 합설 의정부로의 직제와 운영에 관련된 정비가 이루어졌다.

직제의 측면에서 합설의 방향은 기존 의정부 직제를 기준으로 비변사와 관련된 직제가 이에 편입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비국당상(備局堂上)은 정부당상(政府堂上)으로, 비국낭청(備局郎廳)은 공사관(公事官)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외형적으로 의정부와 비변사는 합설 의정부라는 형태로 통합되었다. 이와 동시에 합설 의정부 청사가 광화문 앞길에 중건되면서 의정부는 명실상부하게 국정운영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직제와 달리 운영의 측면에서는 기존 의정부와 공사색은 이원적인 경향을 보였다. 기존 의정부의 본래 수행했던 업무들은 기존 의정부 관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공사색 또한 기존에 비변사가 수행했던 업무를 기준으로 운영되었다. 그 결과 공사색은 구조상 의정부 내 하위 조직으로 운영되었지만 실질적인 국정 전반을 관여하여 비변사의 직능을 유지하였다. 문부의 관리 및 공사색 운영은 유사당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대부분의 국정 운영은 정부당상들이 8도구관당상이나 공시당상 등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정부당상이 수행했던 업무의 제반 실무는 공사관들이 담당하면서 실질적 국정 전반은 공사색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공사색으로의 재편 이후 관서운영의 특징적인 사실은 정부당상의 수효는 예겸당상의 추가, 종정경(宗正卿) 관원의 참여 등을 통하여 철종대 까지 운영된 비변사 제조의 숫자에 비하여 15~20명 증가하여 합좌 기구적 성격이 외형적으로 한층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요 국정현안과 관련하여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관원은 19세기 전반과 마찬가지로 소수였고,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울러 유사당상 중 최하위 유사당상인 공사당상(公事堂上)은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평가받는 김세균이 전담하였는데, 그는 1866년(고종 3) 5월부터 1873년(고종 10) 1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공사당상을 역임하였고, 다른 유사당상에 비해 의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은 수의 관원들이 합설 의정부에 존재하였지만 의사결정의 참여가 소수였으며, 일부 관료의 경우 장기간 재직하면서 주도적으로 국정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의정부의 정무 권한이 이전에 비해 집중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합설 의정부는 외적 측면에서는 일원적인 경향을 표방하였으나, 내부 조직 등과 관련해서는 기존 의정부와 비변사 두 관서의 기능을 유지하는 이원적인 경향을 보였다. 대부분의 직무는 공사색이 수행하면서 비변사에서 전담하던 국정 현안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단, 기존의 비변사 체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러한 운영이 합설 의정부라는 구조 속에서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합설 의정부에서 공사색의 위상은 단순히 하위 기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합설 의정부의 국정 운영 주체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의정부의 ‘복설’과 비변사의 ‘폐지’가 아닌 의정부와 비변사의 ‘합설’로 접근해야 한다.


[사진2] 합설 의정부 청사의 과거와 현재 ⓒ서울시청 홈페이지

고종 초 합설 의정부로 정치기구를 재편한 결과, 국정운영을 한 기관에 집중시킴으로서 국정 장악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권력이 합설 의정부로 집중될 수 있었고, 정부당상의 증가와 이를 통한 국정운영 등이 이전에 비해 더욱 집중될 수 있었다. 또한 합설 의정부가 되면서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력이 보다 일원적인 체제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왕이 거처하는 시어소(時御所)로 변화하면서 광화문 앞길 일대가 조선전기의 기능과 위상을 회복함에 따라 중건된 합설 의정부 청사도 중앙정치기구의 최상위 관서로서 기능과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 본 논문이 나오기까지 수차례의 자료 독해와 세미나를 통해 충고와 조언을 아까지 않으셨던 육전조례 학습반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5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