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한반도 개항 둘러싼 제국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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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항과 통상항의 마찰, 한반도 개항 둘러싼 제국의 갈등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지중해와 해중지의 경계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김윤미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11888)

김윤미(한국 도시사 연구자)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의 봉급을 받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용은 1882년 여름 임오군란의 수습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누적된 사회 모순과 이로 인한 계층 간 갈등이 격화되던 차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군란 자체의 전후 처리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청·일의 간섭은 노골화되었고, 주변국들과의 다양한 갈등 상황에 대해 자문해줄 이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맡길 제3국의 인물을 찾게 되었는데, 바로 묄렌도르프였다.

청나라 천진의 독일영사관과 해관 말단을 전전하던 그가 조선의 고빙(雇聘)을 받아 배를 탄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계약 당시만 해도 외교부 국장급 직위였던 그는, 임명된 지 보름여 만에 조직이 재편되면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지금으로 말하면 외교부와 통상산업자원부를 합친 부처의 차관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가 조선에서 일한 기간은 3년(1882~1885)에 불과했지만, 구주(歐洲) 5국이라 불리던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과 조인 과정에서 협상 실무를 주도하였고, 조선 측 대표자로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공식 직책도 다양해서, 근대 신식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 총판을 맡은 경우도 있었다. 양잠사업, 담배사업, 유리공장 등 그 시기 몇 건 되지 않는 이권 투자에도 그의 이름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외교와 통상이라는 범위라고 하지만 실상 그의 업무는 경계가 없는 셈이었고, 그로 인해 그에 대한 평가도 사안별로 엇갈린다. 그런 그가 조선에 와서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은 관세를 징수할 해관을 설치하고 인력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서남해안 조사와 개항장의 입지 조건

이미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고 개항한 지 6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부산과 원산은 일본인 거류지가 설정되어 일본인의 거주와 정착이 가능했고, 무관세 통상이 이뤄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임오군란 직후 일본은 조일수호조규속약(1882.8.30)을 체결하여 그 통상 범위를 연차적으로 넓히고자 하는 때였다. 구미 각국과의 통상조약 조인에 앞서 기본적인 관세율 조정은 필수적이었고, 기존의 개항장에 해관과 조직체계를 서둘러 마련해 놓아야 했다.

부산, 간행이정에 따른 통상범위의 확대

1883년 4월 조선해관을 설립한 묄렌도르프는 스스로 총세무사(Inspector General of Customs)가 되었다. 인천, 원산, 부산의 순서로 지역별 해관을 설치하였고, 청나라의 해관에서 근무하던 영국인 3명(A.B.Stripling, W.Nelson Lovatt, T.W.Wright)을 각 지역별 해관장으로 채용하였다. 해관장 뿐만 아니라 해관업무를 담당할 이들 또한 상하이에서 불러왔다. 러시아공사관 설계를 담당한 사바틴도 이 당시 해관원으로 고용되어 들어온 경우였다.

개항장 입지에 대한 재조사도 함께 시작되었다. 부산이 조선시대부터 일본인이 드나들던 초량왜관을 그대로 이어받은데 반해, 원산과 인천은 일본이 한반도 연해 조사를 거쳐 새롭게 낙점한 곳이었다. 군함이 연해를 돌며 수심을 측량하고 해만을 둘러싼 형세를 조사하였으며, 이는 통상보다는 기선의 계류가 가능한 곳을 우선적으로 감안한 것이었다.

조선해관은 개항장 입지로서 원산과 인천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항목들을 사전에 체크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슐츠에 의해 정리된 인천·부산·원산 보고서(1885)는 이를 크게 인구현황, 산업실태, 교역환경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더불어 개항장의 기후 및 기상에 관한 관측을 2년에 걸쳐 실시하였고, 항구 및 조계지의 위생 상태도 점검하였다.

결론은 향후 항구의 입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광산, 자원, 산업 등 내륙의 시장성을 고려하고, 이를 항구로 유통시킬 수 있는 도로, 철도 등의 기반시설이 갖춰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부산, 인천, 원산 이외에도 더 많은 지역이 개항되어 ‘내부에서 해안으로, 해안에서 내부로’ 수송방식이 점차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개항지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 각국과의 통상조약이 잇따라 진행될 때였다. 조건은 내륙의 시장이 항구와 연결되고, 해양의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통상항과 해군항의 기능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3곳의 개항장을 보완할 새로운 항구의 입지 찾기는 해안선이 복잡한 서남해안에서 이루어졌다. 군산 옥구, 영광 법성포, 영산강 하구 등 전라도에서 내륙수운으로 접근이 가능한 3개 지역이 대상지였다. 조사는 항로, 지형, 농지분포, 지질자원 등의 항목으로 진행됐으며, 개항장으로서의 입지타당성을 ‘교역이 가능한 지역의 물산(자원)’, ‘선박 종류에 따른 운항 여부’ 등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특히 목포지역의 해안 및 도서에 관한 조사를 통해 영산강 하구가 쌀의 주산지인 나주, 영암, 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으며, 상업의 유통거점 뿐만 아니라 해군항으로 쓰이기에 아주 적당하다고 평가하였다. 목포지역의 가능성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서남해안 항로조사, Fritz W. Schulze, 1884

법성포 하구 조사, Fritz W. Schulze, 1884

동해와 남해, 군함의 탐색과 마찰

 

그렇다면 1882~1885년에 해관이 벌인 조사 대상지에서 동해와 남해는 왜 빠져있었을까. 이 해역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조사 과정을 거친 상태였다. 19세기 초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해협부터 중국을 지나 오호츠크 해역까지 나아간 가장 강력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해군력을 바탕으로 1842년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지역을 개항하면서 해관 운영도 장악하였다. 군함의 정박과 민간 차원의 통상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자 영국 군함은 한반도의 동해와 남해를 번갈아가며 탐사했다.

 

다만 당시의 동해와 남해 조사는 군함에 의한 탐사였다. 영국 사마랑호가 1845년 제주도와 거문도를 중심으로 서남해를 탐사 측량했고, 뒤이어 1852년 러시아 팔라다호가 거문도를 경계로 울릉도, 원산 등 남동해를 조사했다. 군함의 탐사는 해역의 토포그라피, 즉 해안선의 형태와 수심, 주요 섬들의 위치와 규모, 해안마을의 분포 등을 조사하고 지리정보를 취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군함 정박 시 필요한 석탄고와 부두, 병원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해군항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통상 조건을 제외한다면 거문도는 위치, 규모, 방어, 주민저항 등의 조건에서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최적의 해군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만 해도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여길 뿐이었고,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대결할 힘이 없었다.

 

1885년은 해관의 2년에 걸친 서남해안 조사가 마무리되던 해였다. 영러 간의 힘이 대등해지면서 발생한 그해의 아프가니스탄 갈등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조러통상조약체결을 진행하던 묄렌도르프는 결국 러시아에 협력하고 청과 정치적 마찰을 빚음으로써 해임되었다. 이를 계기로 청에서는 후임자를 여럿 주선하여 외교와 통상 권한이 분리되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의 지배 받도록 하고, 총세무사의 지위를 해관세무사(Chief Commissioner of Customs)로 격하시켰다.

 

지중해와 해중지의 전선에서 카드를 든 해관

 

1894년 청일전쟁은 분기점이었다. 일본의 승리로 조선은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의 영토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쟁탈 무대가 되었다. 일본이 부산을 기점으로 한 내륙 확장에 공을 들이는 사이, 조선의 무대 전면에 등장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이미 1860년부터 러시아는 청과의 연해주 지역 국경획정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서 남하정책을 개시한 상태였다. 러시아 남하 정책의 목적은 부동항의 획득이었다. 대륙의 반대편에서 발칸 지역을 통한 흑해 진출,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페르시아만 진출을 노리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염두에 둔 것이 만주와 한반도를 통한 동아시아 공략이었다.

 

러시아는 내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결절지로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1872년 해군기지 이전, 1886년 시베리아철도 부설이 순차적으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안개가 자주 끼고 겨울 4개월은 동결 상태라는 점이었다. 당시 식량·군수물자 등 물류의 운송은 해운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항행 가능 기간이 연간 평균 140여일에 불과한 항구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항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항구를 찾고자 했다. 주목할 점은 통상이 아닌 군항 설치가 목적이었기에 각국 공동조계지를 설정하는 개항보다는 별도의 조차지를 획득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THE ILLUSTRATED LONDON NEWS, Feb. 27, 1904
뤼순~진남포~원산에 이르는 부동항 한계선과 시베리아 철도

처음에는 원산이었다. 원산은 1852년 팔라다호가 동해를 탐사하던 시기부터 러시아가 눈여겨보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기지 확보 의도를 알게 된 일본에 의해 원산항 개발은 애초에 좌절되었다. 1898년 요동의 대련과 뤼순을 조차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뤼순과 대련 역시 시베리아 철도를 통한 러시아와의 연결이 필요하였으며, 해운 경로에 있어서도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 사이에서 연료를 충당할 저탄장을 필요로 했다. 이에 저탄장 확보와 해군기지 거점으로 부산의 절영도, 마산의 율구미를 선택하였다. 특히 마산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의 중간 지점으로써 태평양 함대를 위한 항구 건설지로는 최적지였다. 이 역시 토지구입을 시도했으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해군병원과 석탄보관소로 규정되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19세기의 영국은 중국 개항장의 통상만으로도 동아시아에서 충분히 제국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서해를 마주하고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는 위협요소로 등장했다. 조선에서의 러시아 남하정책을 주도적으로 저지한 것은 일본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한 것은 영국이었다. 대응 방법은 해관을 통한 저지였다.

 

청나라 총세무사 하트(Robert Hart)에 의해 발탁되어 20년간 청 남부지역 해관 세무사로 근무하던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은 1893년 조선 해관세무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운영한 조선해관은 청국해관네트워크(Chinese Network)에 속한 조선해관(Corean section)으로 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1894년 청의 영향력 소멸로 조직의 위계는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그 세력범위에서 긴밀한 조직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가 묄렌도르프의 제반 업무를 그대로 승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관을 기반으로 한 수입과 예산, 출납 등 재정권을 장악하였고, 해관장 및 해관원들을 영국인 혹은 가까운 유럽인들로 배치함으로써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THE ILLUSTRATED LONDON NEWS, JAN. 15, 1898
서해(Yellow Sea), Robert Hart(청국해관총세무사, 왼쪽)와 Mcleavy Brown(대한제국해관총세무사, 오른쪽)

 

중요한 점은 당시 관세 수입이 국가의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해당되었다는 것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었던 이유로 이를 담보로 한 정부의 차관 도입 기도가 많았고, 관세를 담보를 잡을 시 해관총세무사의 동의를 구해야 했기에, 그의 권한은 상당히 막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정부에 고용된 관리로써 개항장 선정에 있어서 각국의 갈등을 중재하는 심판 역할을 부여받았고, 표면적으로는 일종의 청탁 등에 관하여 가차 없이 거절하는 인물로 남았다. 그러나 일면 청국총세무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영국공사와의 긴밀한 공조 속에 개항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실제 목포와 진남포의 개항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해 영국이 일본의 요구에 힘을 실어주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군산, 마산, 성진의 개항 역시 브라운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1897년 이후의 개항장을 살펴보면, 서해안의 목포, 진남포, 군산은 러시아로서는 군항으로서 전혀 매력이 없는 지역이었고, 마산은 석탄저장소와 해군병원으로 허가되었을 뿐이었다. 성진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차별성을 갖지 못한 곳이었다.

 

왼쪽. 1898년 철도감독 브라운의 철로개설계획. 오른쪽 Northern Corea_Trade route from Songchin, 1888, 한러육로통상장정

 

브라운은 목포와 진남포 개항 당시 철도감독 사무도 담당하였다. 이미 건설되고 있던 경부선과 경인선 이외에 4개 구간을 개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경흥에서 원산에 이르는 구간은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형성된 전선에서 그가 입장을 잠시 보류한 것은 아닐까. 부동항 한계선인 진남포-원산을 경계로 함경도의 철도부설을 잠시 접어두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조계지 입지 선정과 조계장정 초안의 작성은 브라운이 직접 진행하였고, 개항지역 사전답사는 인천해관장이, 조계지 설계지도와 시가지계획 수립은 밑의 해관원들이 담당하였다. 마지막 해벽과 부두 설계는 상해건설국의 토목기사가 직접 와서 살펴보고 진행했다. 이와 같이 1897년 이후 진행된 개항 입지선정과 설계에 이르는 관련 실무는 서양인으로 구성된 해관원들이 분담하였다.

 

무너진 경계, 바다에서 육지로의 확장

 

내륙으로 진출하는 일본과 해양을 감싸려는 러시아가 항구를 선택하는 방식은 달랐다. 러시아가 군항으로서의 정박지를 집요하게 선택했던 데 반해 일본은 군항뿐만 아니라 통상항의 기능을 개항장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두 국가가 개항장에 요구하는 기능과 그에 따른 입지 선택이 달랐던 셈이다.

중심과 주변, 분화된 위계는 근대적 지역체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항로의 중심지인 항구가 지역체계의 중심지로 올라서고 이곳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위계가 결정되었다. 중요한 점은 처음 지정된 입지가 어떤 기능을 수용하느냐였다. 더불어 어떤 기능을 중첩시키느냐에 따라 중심지의 확장성은 상이하게 나타난다. 일본은 군항이라는 조건 위에 통상항의 요건 또한 충족되길 원했고, 러시아는 군항의 요건만 충족되면 되었다.

1905년 지중해와 해중지 사이에 점을 찍고 경계를 만드는 기능을 담당했던 해관은 유성처럼 사라졌다. 해관의 권한은 내륙의 세관으로 통합되었고, 그 권한은 일본에게 승계되었다.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해양의 경계에서 항구의 입지가 비로소 정해지고 이를 연결하는 주변국과의 항로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자 내륙으로 향하는 관성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각 항구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철도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서울본부세관, 『1885 Despatches from Chemulpo : 1st January @ 30th September 1885』, 2007.
Ian Nish, 「John McLeavy Brown, 1893~1905」, 『First published in Papers of the British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2, 1992.
조너선 스펜스, 김우영 역, 『근대 중국의 서양인 고문들』, 이산, 2009.
이반 곤차로프, 정막래 역, 『전함 팔라다』, 살림, 2016.
김현숙, 『근대 한국의 서양인 고문관들(1882-1904)』, 한국연구원, 2008.
김윤미, 「개항기 구미 세력에 의한 국토 및 지역체계의 변화」,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FO 17/1349~1350, 1898 document
FO 17/1389~1390. 1899 document
http://www.britishnewspaperarchive.co.uk/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98년 1월 15일
The Newcastle weekly courant, 1885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