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일제 강점기 평양의 도시 공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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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평양의 도시 공간 분석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구시가, 신시가와 그 너머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박현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09680)

박현(근대사분과)

일제강점기 평양은 경성, 인천, 부산 등과 더불어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다. 물론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 고려시대 서경 등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역사적 측면에서 중요시되었다는 점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평양 기생이나 모란봉·을밀대 등이 유명해 평양을 찾는 일본인들이 평양의 기생학교를 방문하거나 모란봉에 올라 감상을 남기기도 했고, 이른바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대표되는 종교적인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 등 평양은 실로 다채로운 도시였다.

일찍이 평양이 주목받은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지리적 측면이었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에 위치해 있고 대동강을 통해 진남포라는 양항(良港)으로 접근하기에 용이하였으며 중국 대륙과 가깝고 경의선이 부설되어 있는 등 대륙으로 향하는 주요 거점이자 무역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이러한 평양의 지리적 이점에 주목한 일제는 평양의 개시(開市)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양 개시의 논리와 개시장 설정

 

평양 개시에 대한 논의는 늦어도 1886년에 시작되었다. 스즈키 미츠요시(鈴木充美) 재인천영사가 평양이 대청 무역의 중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조사가 되지 않았다며 평양을 시찰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시찰 후 평양 개시의 이점이 적지 않다면서 근거를 몇 가지 들었는데, 물산이 풍부해 외국 무역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고, 그를 통한 토민(土民)의 이익 증가는 생산의 장려로 이어지며, 운반비가 감소해 외국산 물품의 수요가 증가하고, 청상(淸商)이 독점하던 의주무역이 평양무역으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평양이 개시되면 원산이나 인천, 부산 등이 쇠퇴할 것이라며 평양 개시에 반대하는 주한일본공사 및 영사들이 있어 논의가 더는 진전되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청의 밀무역을 문제 삼아 평양 개시를 주장했다. 청이 평양과 황해도 연해지방에서 행하는 무역은 밀무역이라기보다는 조선 정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니 사실상 공상(公商)이며, 그렇다면 조선이 청에 무역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니 최혜국대우 조항에 따라 일본 또한 그 이익을 균점(均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개시와 관련된 논의가 청의 허락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종래 조선 정부가 개항할 때는 언제나 이홍장(李鴻章)에게 ‘상청(商請)’했다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평양 개시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평양으로 시찰 위원을 보내고 이홍장이 청상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고종에게 평양 개시를 촉구하는 자문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고종은 자문을 수용하면 자문에 의해 평양을 개시한 것이 되므로 ‘자주체면’에 해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일본에게 먼저 권리를 주게 되면 청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평양 개시를 불허한다는 뜻의 자문을 이홍장에게 보내는 한편, ‘자개(自開)’의 방식으로 평양 개시를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 정부 내부의 반대와 제주통어(通漁)를 중시한 일본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평양 개시는 다시 논의되었다. 일본은 목포와 진남포의 개항을 논의하면서 평양 개시 또한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대동강 연안을 이미 개항하기로 했으며, 평양을 개시하면 조선인의 상권을 외국인에게 빼앗긴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런데 1898년 조선 정부는 함북 성진, 전북 군산, 경남 마산 개항과 더불어 평양 개시를 성명하였다. 이에 대해 주한일본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増雄)는 조선 정부가 무역의 이익을 깨달았고, 러시아 등의 열강이 청의 주요 항만을 점령하던 당시 현실에 자극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조선정부는 성명 발표 이후 1899년 5월 1일 전술한 세 항구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를 앞두고, 여론의 압박에 의해 적극적으로 조약을 준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즉 내지잡거가 조약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 소유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각국인의 점포를 철폐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평양군수는 외부훈령을 고시해 내지잡거를 금지했고, 각국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 개시를 조속히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미 일본인들이 평양성 중심시가에서 점포를 내고 있는 상황이므로, 개시 구역을 평양성 내외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평양 개시 구역을 평양부 내 대동강 연안의 석호정(石湖亭)으로 통고했다. 하지만 각국은 평양성을 대상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크게 반발했고, 조선 정부는 평양성 정해문(靜海門)과 우양관(又陽關) 사이길 북쪽 일대를 개시장으로 설정하여 통지하였다. 하지만 각국은 이 제안 역시 거부하고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양성 전체를 잡거지로 개방하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였고, 조선 정부는 내성 내 일부 구역을 개시장으로 선정하겠다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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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부가 제시한 개시장구역 설정안(박준형,「개항기 平壤의 개시과정과 開市場의 공간적 성격」,『한국문화』64, 2013,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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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이 제시한 개시장구역 설정안. 점선 안쪽은 평양성 내성, 중성 서부, 외성의 정전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고, 실선 안쪽은 내성, 외성의 정전 대부분을 제외한 지역이다(박준형,「개항기 平壤의 개시과정과 開市場의 공간적 성격」,『한국문화』64, 2013, 112쪽)

 

 

평양의 일본인 거주와 구시가, 신시가

평양에 일본인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청일전쟁 때였다. 평양성 주민들이 전쟁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자 일본인 상인들이 빈 가옥을 점거하고 군인을 상대로 한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공사가 1896년 초 평양 거류민에게 철퇴 명령을 내렸다. 5월이 되자 공사는 행상에 지장이 없다고 통고하였고, 5월 하순 2백여 명의 일본인들이 다시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후 1899년까지는 조선인들의 중심지였던 평양성 내성 일대에 거주하였다. 이주 초기 일본인들은 장기적으로 거주할 계획이 없거나 자본을 많이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내성에서 상업 활동을 하여 단기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평양이 주요 병참선로상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에 경의철도 부설 등을 이유로 상인과 노동자가 유입되면서 러일전쟁 개전 후 3개월이 지나지 않아 평양 거주 일본인 수가 급증하였다. 1904년 8월에는 외성 일대가 일본군의 군용지로 수용되면서 부대 건물이 건설되었는데, 외성에 군용 시설이 들어선 것은 일본인 시가지 건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 내성에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집값이 많이 뛰었고, 한인가옥은 일본인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내성은 불결하고 위생설비 설치비용 또한 만만치 않고, 한인과 잡거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신시가’가 평양 내성의 남문인 주작문과 외성의 정거장 사이에 조성되었다. 신시가가 조성되면서 기존의 시가지였던 내성 일대는 조선인 중심의 ‘구시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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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경 평양 시가지(박준형,「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평양 진출과 평양성 내에서의 ‘잡거’ 문제 -일본인 신시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비교한국학』23-3, 2015, 45쪽)

 

일제강점기 평양의 행정구역은 기존의 평양성 내성, 중성, 북성, 그리고 외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1929년 구역(區域)을 확장하여 주변 대동강면 선교리, 오촌리, 능라도, 양각도, 동대원리, 신리, 고평면 평천리, 서성리, 구정리, 임원면 기림리, 서천면 이흥리, 상흥리 등을 평양부로 포함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평양성 중성, 외성 일부였던 지역에 신시가가 처음 조성되었고 내성과 북성 지역이 구시가가 되었는데, 신시가지는 명칭에 정(町)을 사용했고, 구시가지는 리(里)를 사용했다. 경성의 경우 1936년 구역을 확장하면서 구역 명칭에 동(洞)과 정(町)을 병기하던 것을 정(町)으로 통일하였는데 반해, 평양은 1945년까지 리(里)와 정(町)의 명칭을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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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평양부 행정구역(유경호,「평양의 도시발달과 지역구조의 변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26쪽)

그런 점에서 보면 식민지 도시에서 보이는 ‘이중도시’ 현상(1)이 경성보다 평양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 분포를 봐도 구시가지에 조선인이, 신시가지에 일본인이 더 많이 살았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민족 간의 분리 현상이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그럴지도 모르나, 조금 더 세밀한 단위를 기준으로 한다면 평양이라는 도시 공간을 구시가, 신시가로 두부 자르듯이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현재의 도시도 상업중심지, 거주중심지 등으로 성격에 따라 공간을 나눠볼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평양이라는 도시 공간 또한 세부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료에서 성격으로 평양의 공간을 구분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1932년 간행된『生活狀態調査(其4) 平壤府』를 보면 아래 지도와 같이 공간을 구분하였다. 이 지도를 보면 앞서 언급한 평양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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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공간별 성격 구분(『生活狀態調査(其4) 平壤府』의 정보를 바탕으로「平壤府全圖」(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소장) 위에 필자가 표시)

 

구시가와 신시가, 그 너머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든다. 1932년 자료에서는 성격을 규정하지 않은 지역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정(里町)보다 세밀한 지번 단위를 가지고 평양의 도시공간을 규정지어보고자 한다. 이에『朝鮮商工大鑑』(1929년)과『朝鮮工場名簿』(1934년)등의 자료와 각 자료의 광고란에서 지번을 찾아 지도 위에 표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 지도에서는 지번을 민족 별로 구분해 놓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인과 조선인의 분리 현상은 지번 단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율이 낮기는 해도 구시가에 일본인이, 신시가에 조선인이 거주 또는 상공업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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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별 분포 양상(지번). (「平壤府全圖」(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소장) 위에 필자가 지번 표시)

민족 이외에 또 다른 성격을 통해서도 평양의 공간을 구분해보자. 지도에 표시한 지번은 주로 상공업과 관련된 자료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직업 ․ 직종을 기준으로 공간을 나눠볼 수 있다.

 

주목해 볼 지점은 ‘공업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공업지역은 교구정, 류정, 홍매정, 선교리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이 지역은 ‘중공업의 비중이 큰 공업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방직을 비롯해 식료품 생산 공장도 있지만, 기계나 화학 ․ 금속 등의 공장 비중이 더 높다. 더불어 대동강안의 항정 또한 기계 ․ 제재(製材) ․ 자동차 공장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중공업의 비중이 큰 공업지역’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지역은 공통적으로 평양역과 가까이 위치하거나 대동강안에 위치하고 있어, 중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공업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계리 · 죽전리 · 이향리 · 순영리 일대는 ‘경공업의 비중이 큰 공업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조선인의 ‘민족자본’으로 불렸던 양말공장을 비롯한 방직공장이 다수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밖에도 식료품, 인쇄소, 모자 공장 등 경공업 위주의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파악된다. 일제강점기 자료에서는 죽전리와 아청리를 상업중심지로 구분하였는데, 조선인의 주력산업이 위치했던 곳이기에 공장은 물론 생산물을 판매하는 곳 또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분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지번 단위의 분류는 아니지만 평양에 거주했던 중국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인이 평양에 처음 도래(渡來)한 것은 명치 16,7년(1883,4년)경으로 보인다. 평양부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호구 수는 대정2년(1913년) 감소하기도 했으나 인구는 오히려 증가했고, 인구는 대정3년(1914년) · 5년(1916년)에는 감소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부외(府外)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인구가 부내(府內) 거주 중국인의 인구와 필적하여, 이를 모두 합하면 대정 12년(1923년) 기준 1,513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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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평양 재류 중국인 호구 및 인구(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支那人』, 1924, 152쪽)

 

중국인의 인구 비율은 조선인·일본인에 비해 높지 않았지만, 일부 업종에서는 그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직물업(織物業)과 양말제조업을 들 수 있다.『朝鮮に於ける支那人』를 보면 계리 · 죽전리 · 이향리 · 순영리 등지에 주요 직물류 수입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일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인이 운영하는 양말 공장 등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인과 양말제조업에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를 드는 것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925년 평양 양말 공장의 조선인 직공들이 쟁의를 일으켰다. 1925년 4월 8일 조선인 직공들의 조합인 평양양말직공조합(이하 직공조합)에서 총회를 열고 평양양말생산조합에 대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대략적인 내용은 임금 인하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는 것과 외직(공장주에게 원료를 제공 받아 자택에서 일하는 것) 직공의 임금을 내직 직공 수준까지 끌어올려달라는 것, 그리고 중국인 직공을 채용한 공장은 중국인 직공을 해고하지 않을 시 그 공장을 박멸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직공을 해고해달라고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국인 직공의 임금이 너무나도 싸기 때문에 공장주들이 조선인 직공을 해고하여 조선인 직공들이 직업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공장주들이 조선인 직공의 임금을 낮추고 중국인 직공을 고용한 것은 공장주들의 경쟁 상대였던 신의주의 중국인 양말제조업자들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2)

 

마지막으로 중국요리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자료에서 확인되는 중국요리점은 9곳 정도로, 대체로 ‘구시가’에 자리하고 있었다.『朝鮮に於ける支那人』등에 의하면 중국음식점은 만두나 밥 종류를 파는 곳으로 중국인과 조선인이 많이 찾고, 중국요리점은 고급 중국요리를 판매하였으며 점차 일본인 고객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조선인이 많은 ‘구시가’에 있으면서 일본인 고객이 많이 찾았다는 중국요리점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참조>

1. 도시에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구역이 분리되어 있었던 현상을 말한다. 경성의 경우 대개 청계천을 경계로 조선인 중심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남촌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2. 신의주에서는 중국인의 양말제조업이 성행했는데, 이는 대안지역(對岸地域)인 단둥(安東)에서 양말제조업이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중국 역시 양말제조업이 ‘민족자본’을 대표하는 산업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으로부터 양말 수입이 단절되면서 중국인의 양말제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단둥은 양말의 주요 산지 중 하나였다. 한편, 단둥과 신의주는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군이 철도를 부설하고 압록강철교를 건설한 것을 계기로 서로 간에 깊이 연결되었고, 중국인 양말제조업자가 신의주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朝鮮商工硏究會,『朝鮮商工大鑑』, 1929.
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支那人』, 1924.
朝鮮總督府殖産局,『朝鮮工場名簿』, 1934.
박준형,「개항기 平壤의 개시과정과 開市場의 공간적 성격」,『한국문화』64, 2013.
박준형,「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평양 진출과 평양성 내에서의 ‘잡거’ 문제 -일본인 신시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비교한국학』23-3, 2015.
李正熙,『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大学学術出版社, 2012.
유경호,「평양의 도시발달과 지역구조의 변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五島寧,「日本統治下の平壌における街路整備に関する研究」,『土木史研究』14,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