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서울은 ‘오물의 도시’? 근대도시와 오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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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물의 도시’? 근대도시와 오물 이야기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도시 위생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김은진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09189)

김은진(가톨릭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동아시아 도시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도시를 묻는다면 ‘서울’을 빼놓을 수 없다. 또 친숙한 만큼 우리는 서울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 쉽다. 이때 누군가 근대도시로서의 서울을 묻는다면, 행정구역 혹은 제도의 변화, 인구 변화 등을 언급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근대도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 위생’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19~20세기에는 위생이 근대도시, 문명도시의 척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위생 중에서도 우리의 일상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은 우리가 배출하는 오물(분뇨, 쓰레기)을 처리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근대적인 오물 처리체계가 구축되면서 오물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서울이 근현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오물을 처리해 나갔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서울의 전통적 오물 처리체계

 

서울은 ‘오물의 도시’라는 오명(汚名)을 갖기도 하였다. 1894년에 서울에 도착한 이자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은 서울의 첫인상에 대해 “북경을 보기 전까지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평가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은 위생 관념이 미비한 상태고, 오물을 여기저기 버려놓아 위생에 해가 되었다’고 하면서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위생 상태를 열악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위생행정제도를 수립하고자 하였던 서구 근대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서울의 오물 처리체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서울은 오물 처리를 위한 근대적인 체계를 갖추진 못했지만 나라의 중추인 도성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간헐적인 개입으로 오물 처리가 이루어졌다. 통치의 기틀이 된 『경국대전』 중 공전 교로(橋路)조에는 도성 도로 양쪽의 도랑을 침범하여 파헤친다든지, 오물을 버리는 자가 있으면 본부 관리도 함께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다.

 

18세기에는 조선이 청계천 준설사업과 수원성 건설사업 등을 일으키며 국가 차원에서 도시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는데, 그 흐름 속에서 오물을 처리하려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영조는 오물이 던져진 개천이 장마 때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매년마다 개천을 정비하도록 하였다. 정조 때에도 도성 안의 개울과 도랑의 오물을 제거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국권피탈을 전후해서도 한국 정부 인사들은 시정개선에 대한 협의회에서 위생회를 조직하는 것보다 오물이 쌓인 하천을 준천하는 것이 급무라고 발언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이전 서울은 도로 청소보다 하천 정비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서울에 흐르는 청계천과 여름에 집중되는 강수량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국가의 간헐적인 오물 처리 외에도 근교 농민이나 거름 장수가 서울의 오물 처리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한성위생회 자료를 살피면 거름 장수와 근교 농민이 ‘똥 망태’를 지고 분뇨와 쓰레기를 함께 수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거된 오물은 근교 농가에서 거름으로 쓰면서 생산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때 거름을 ‘얻어 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물은 무상으로 수거되고 수거해간 사람이 자체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서울 인구가 배출하는 오물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거름 장수의 수가 매우 적었고, 그들의 방문이 정기적이지도 않았다.

 

분뇨

그림 설명 : 왼쪽 –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활약한 기산 김준근의 똥장수 그림(출처: 김광언, 2002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59쪽) 오른쪽 – 지게에 얹은 똥장군(출처: 김광언, 2002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11쪽) 농민들은 망태나 똥장군으로 불리는 통에 거름을 넣어 옮겼다.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미국의 언어학자, 시학자, 선교사) 등 서울을 방문한 몇몇 서구인들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의 거리가 위생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서구 근대적 위생 관점에서 서울의 도로는 ‘온갖 오물들의 집적소(集積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 지식인들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인구를 관리하고자 서구의 위생담론을 받아들였고, 정부에 위생 정책을 추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더해 19세기에는 콜레라가 여러 차례 유행하면서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 사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치도사업(治道事業)의 일환으로 서울의 오물 처리를 시도하게 된다.

 

우선 쓰레기 처리를 살펴보면, 경무사(警務使)가 거리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게 되었다. 한성부에서는 쓰레기 처리장을 지정하여 지정된 곳에서만 쓰레기를 버리도록 하였다. 또 이전과 같이 거름 장수가 분뇨를 수거하였으나 증명서를 받은 거름 장수만 분뇨를 수거하도록 하여 ‘빙표제(憑票制)’로 운영하였다. 비록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행정기구가 주체가 되어 효율적인 오물 처리체계를 마련하고자 하려는 노력이었으며, 전통적인 수거방식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04년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일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에 위생제도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 결과 청결법(1904)이 제정되어 오물 처리체계가 임시적으로 개편되었으나 일본의 요구에 따라 여러 차례 오물 처리방식이 바뀌게 되면서 실패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오물 처리체계가 개편되고 운영되는 것은 ‘한성위생회’(1907)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한성위생회와 전통적 오물 처리 방식의 변화

 

일제는 한일 양국민의 ‘잡거지’인 서울에서는 전염병 유행을 막기 위해 양국 위생시설이 상호 보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일제의 요구에 따라 1907년 12월 21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고시 제1호로 「한성위생회규약」을 반포하였다. 1908년 11월 21일에는 한성부령 제3호로 「한성위생회비용 수립의 표준 및 과율」을 근거로 서울 거주민들에게 위생비를 납부하도록 하였고 그 중 많은 비용이 오물의 수거 처분에 이용되었다. 이때 위생비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여 징수하였다. 한국인에 대해서는 주로 건물을 기준으로 1간(間) 1개월 2전을 위생비로 산정하였다. 반면 일본인 및 외국인의 경우는 1인 1개월 8전을 내도록 했다. 이처럼 한성위생회 시기에 오물 처리는 본격적으로 유상 수거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한성위생회는 1908년 4월 2일 「제예규칙」과 1908년 9월 「제예규칙 시행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오물 처리체계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먼저 오물을 청소하는 1차적 책임을 토지와 건물의 소유자와 점유자에게 부여하고, 오물 수거는 한성위생회에서 일괄적으로 집행했다. 또한 거름 장수의 활동을 금지하고 고용 인부를 통한 일괄적인 수거가 이루어졌다. 분뇨의 경우 인부들이 들통으로 분뇨를 모두 수거하여 적환장인 가출소(假出所: 1911년 집적소로 변경)에 두면, 마차인부가 들통을 마차로 옮겨 분뇨를 성 밖 처분장에 설치한 “탱크”에 모아두는 방식이었다.

 

위생회 설립 초기에는 동대문 밖, 용산 만리창, 밤섬 3곳에 분뇨 처분장을 두고 임시처분장을 광희문 밖 신당리, 독립문 밖 아현리와 기타 장소에 설치하였다. 1913년에는 독립문 밖 임시처분장은 폐지하고 동대문 밖 분뇨 탱크도 처분이 불편하여 폐지하였다. 분뇨의 처분은 경쟁 입찰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한성위생회 분뇨 처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남산상회였다. 남산상회는 분뇨를 대량으로 처분해주었고, 거름으로 잘 쓰지 않는 오줌도 황산암모늄으로 생산하여 처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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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 광희문 밖 분뇨처분장 위치 (출처: 서호철, 2016 「서울의 똥오줌 수거체계의 형성과 변화- 189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서울과역사』93)

오물 중 쓰레기 처분은 소각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일본 본국의 방식을 도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각소의 소각 능력은 하루 최고 480석 정도로, 하루 쓰레기 수거량 약 981석을 감당하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양의 쓰레기가 방치되고 말았다. 쌓여 있었던 쓰레기는 점차 광희문 밖과 독립문 밖에 반출되거나 북부 옥동(玉洞)의 공터, 혹은 기타 편의 장소로 처리되었다. 특히 순화원 공터는 쓰레기가 임의대로 버려져서 쓰레기 산을 이루게 되었다.

 

쓰레기 처분에 소각소를 이용하면서 기존 한국인의 오물 처리체계는 크게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쓰레기와 분뇨를 부착하여 망태를 이용해 쓰레기를 수거하였다. 그렇게 수거된 쓰레기는 거름으로 쓰이거나 수거되지 못하는 경우 아궁이에 넣어 연료로 쓰였다. 한성위생회가 도입한 쓰레기 소각 방식은 도로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가져왔을지는 모르지만 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물 처리체계-식민지 유산? 잔재?

 

유상수거-처분방식, 수거인부 고용, 쓰레기 소각소 등을 특징으로 하는 한성위생회의 오물 처리체계는 1914년 경성부에 이관되면서 지역행정의 일환으로 합리적 체계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조선오물소제령(1936)이 제정되면서 서울의 오물 처리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에 의해 운영된다. 이 조선오물소제령은 해방 이후에도 오물 처리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의 오물 처리체계가 개편되면서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오물 처리방식 문제, 처리 비용 문제, 오물 처리 혜택의 지역 차별 문제를 일제에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한성위생회시기에 크게 개편된 오물 처리체계는 전체적인 틀의 변화 없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참고문헌>

I. B. 비숍, 신복룡 역, 2000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H. B. 헐버트, 신복룡 역, 1999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경국대전』
『국조보감』
김광언, 2002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김은진, 2017 「20세기 초 일제의 서울지역 오물 처리체계 개편과 한국인의 대응 」, 가톨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서호철, 2016 「서울의 똥오줌 수거체계의 형성과 변화- 189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서울과역사』93
萩森茂, 1929 『京城と仁川』 中, 100쪽
漢城衛生會, 1914 『漢城衛生會狀況一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