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일본군 성노예, 그리고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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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과 일본군 성노예, 그리고 간도

 

1. 체험의 기록과 반성의 한계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야만적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1986년 서울대 출신 여성노동자 권인숙이 부천경찰서에서 문귀동이라는 형사에게 차마 밝힐 수 없는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도 모두가 아는 일이다. 이들 사건이 이미 집단적 기억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제 결정적 ‘증거’는 없다. 가해자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피해자의 진술 외에 문서상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작성되지 않았다. ‘문서화된 자료’만을 유일한 증거로 받아들일 경우, 이 사건은 ‘가공된 사건’이거나 기껏해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이런 류의 반인간적 범죄에 대해서는 사건에 관련된 양측의 엇갈린 ‘주장’을 듣는 것 만으로는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고문사실을 부정하는 여러명의 가해자와 고문피해를 호소하는 단 한 명의 피해자 사이에서 수량적 형평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사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상황’에까지 눈을 돌려야 한다. 상황은 집단적 체험을 유발하고, 집단적 체험과 기억은 다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일상에서 수시로 국가보안법과 마추쳐야 했다.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더 나쁘다’는 말이 ‘김일성을 고무 찬양했다’는 죄로 둔갑하는 – 이런 논리라면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은 개를 고무 찬양하는 것이 된다 – 지독한 역설의 세계 속에서 살았고, 누구나‘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 시대를 김근태 ․ 권인숙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를 접하지 않고도 쉽게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있는 자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자의 집단적 체험과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도 권인숙을 ‘성조차 혁명의 도구로 삼은 좌경용공분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좌경용공세력’이나 그로 의심되는 자에게는 고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상당히 많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상황인식 위에서 – 어느 편에 서서 – 사건을 바라보느냐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완전히 중립적인 영역에서 사실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솔직히 고백해라’ 밖에 없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사실관계를 누락없이 고백한다고 해도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적 차원의 반성만을 증빙자료로 삼는다면 사실 관계가 완전히 왜곡될 수도 있다.

나는 아직껏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한 고문경찰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설령 이들이 반성하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 반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사실관계 전체를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안될 것이라 본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중정 직원이나 경찰 간부에게 직접 고문을 지시했을 리는 없다. 경찰청장이나 치안본부장이 고문하라는 공문을 보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고문 경찰들의 자기성찰적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기껏 “고문은 했지만,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는 내용 뿐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그런 일을 ‘직접’, ‘구체적으로’, ‘문서를 통해’ 지시하겠는가. 고문 경찰들에게도 고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하게 할 것인가 살살 할 것인가를 선택할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록, 고문경찰을 포상하고 고문하지 않는 경찰을 징계한 ‘권력’의 책임은 은폐되고, 책임 한계는 그들 내부에 국한된다. 국가권력은 ‘경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간접적 책임만 지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관련자들의 ‘성찰적 고백’도 사실 관계를 완전히 왜곡시킬 수 있다. 지금도 일본군부나 조선총독부가 ‘종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자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의욕적인 연구자들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위안부 모집 방법이라든가 도별 ․ 군별 할당량이라든가 하는 문제에까지 시시콜콜 개입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다만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 연행과 사기, 개인적 보복 등을 모른 체 해 주면 되었다. ‘위안부’를 모집한 자들이나 ‘위안소’를 찾은 병사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내용도 거기에 국한될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한국인들 사이에서 도덕성 회복의 열풍이 불어 ‘성찰적 고백’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해도 일본군이나 조선총독부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명백한 ‘증거’는 아마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물어야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처한 ‘총체적 상황’에 대한 집단적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단적 체험의 기억은 ‘민족’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가상의 기억’이 결코 아니다. 학대와 차별, 학살과 수탈이 ‘민족’을 경계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성된 집단적 기억이다. 그 민족의 ‘경계 밖’에 있었던 자들 – 일본인과 이른바 ‘민족반역자들’ – 은 결코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이다. 군사독재체제의 수혜자들 역시 피해자인 대다수 민중의 집단적 기억을 공유할 수 없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을 범죄라 생각할 뿐, 국가보안법 자체가 반인간적 법률이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신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중립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터이다. 해석자 역시 ‘상황’ 속에서 살며 판단하는 인간인 이상, 어느 한 쪽의 상황인식을 ‘부정’하는 순간, 그는 다른 한 쪽의 상황인식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2. 계량의 매력과 함정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자들이 입버릇처럼 뱉어내는 말은 “국가보안법이 보통 사람 사는 데 불편을 주는 게 뭐냐”는 것이다. 국민이 절감하는 문제인 ‘경제난’은 외면하면서, 과거사 규명이니 국가보안법 폐지니에 매달리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얘기도 한다. 사실 수치만으로 따져  보면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친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직접’ 피해를 본 사람은 전 국민의 1%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치를 절대화하는 순간,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에 아주 ‘미미한’ 영향만을 준 법이 된다.

근대 과학에서 ‘숫자’는 대단히 매력적인 도구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측정할 수 있고 계량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근대 과학자들은 크기와 무게, 속도와 빈도, 화폐가치나 생산량으로 측정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수집과 분류, 재배열과 수학적 종합의 과정을 거쳐 ‘평균적’수치와 ‘표준적’수치로 전환된다. 숫자는 이제‘표준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됨으로써 모든 가치판단에 선행하는 ‘객관성’의 체현체가 된다. 이 객관성은 ‘표준적이고 평균적이며 보편적인’ 사건과 사물, 사람들 속에서 ‘일반적 진리’로 통용된다. 그러나 숫자는 ‘현상’을 그럭저럭 기술할 수는 있지만, ‘본질’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산술적 평균’ 역시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되며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근래 식민지시대사 연구에서도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연구의 결론은 대개 유사하다. 식민지 시대에도 ‘보통’ 사람들은 신문물에 열광하고 연애와 사교에 열중했으며 경제적 성취에 몰두했을 뿐, 민족해방운동이니 민족문제니 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같은 결론은 다시 식민지 시대의 ‘민족문제’를 상대화하는 자세를 낳고 더 나아가 “민족주의라는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본 결과 민족문제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인식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식민지 시대를 산 98%의 조선인 – 보통의 조선인 – 들은 1%도 안되는 ‘민족운동가’나 1% 남짓되는 ‘친일파’들이 사는 공간과는 다른 어떤 지대 – 회색지대라는 말을 인용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 에서 그들 특수한 부류와는 다른 생각, 다른 생활을 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런 분석방법을 취하면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보통사람들의 평균적 요구가 되고 ‘조선 독립 만세’는 극소수 사람들의 특이한 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한 100여명의 증언은 기껏 ‘특수한 사례’에 관한 기록이 되어 버리고, 나머지 ‘위안부’ 수만명의 ‘무언(無言)’이 오히려 ‘위안부 조달이 대체로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수량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표준적인 것과 일탈적인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숫자가 그 경계를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텍스트들이 ‘평균적으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출현했고 유통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출판금지 처분건수, 필화사건의 횟수, 검열에 걸려 삭제된 자행의 수 따위만 가지고 본다면 텍스트 생산에 가해진 제약은 ‘무시해도 좋은’ 수치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듯이, ‘인위적 경계짓기’는 모든 산술적 표준화에 선행한다. 감옥과 수용소는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을 가두어 둠으로써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합법’의 표준적 규율을 강제한다. 더구나 식민지 감옥의 심리적 ․ 문화적 크기는 문화적 연속성 위에서 만들어진 서구 사회의 감옥보다 훨씬 컸다. 조선인들이 ‘민족주의’의 색안경을 쓰고 일본인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일본인들이 ‘민족차별주의’의 색안경을 쓰고 조선인들을 쳐다 보았다. 일본인들이 설정해 놓은 ‘표준’에 의해, 대다수 조선인은 잠재적 범죄자요 ‘비정상적인’ 열등인이 되어 버렸다. 그로써 ‘표준적’ 조선인과 ‘평균적’ 조선인 사이의 거리도 더 멀어졌다. 조선인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설정해 놓은 표준에 근접해 가야 했다. 일제하 조선인들은 그 표준에 가까이 있는 텍스트만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은 한 두 차례의 단호하고 혹독한 처벌만으로도 대부분의 저항적 언어 – 이 언어가 조선인들의 진정한‘평균적’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었겠지만 – 를 잠재울 수 있었다. 황성옛터를 작사한 전수린이 종로경찰서에서 치도곤을 당하고 난 뒤로는 그와 비슷한 노래는 물론 그에 훨씬 못미치는 노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검열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검열과 처벌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 ‘자기검열’의 기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 기제의 작동에 의해 식민지 상황에서 생산된 텍스트는 ‘위험한 경계선’곁이 아니라 그 한참 바깥에서 평균화되었다. 동시에 민족, 독립, 해방, 혁명, 자주, 평등 등 수많은 언어들이 사람들의 의식 저편으로 숨어 들어갔다. 중국인 비단장수 ‘왕서방’은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 지주 나까무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식민지 시대 금기의 영역은 너무 넓었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은 너무 좁았다. 그럴진대 자신의 요구와 희망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말해서는 안되었던 사람들에게 ‘보통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만든 텍스트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보통사람의 생각’을 그려내고서는 마치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양 흥분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들은 민족에 대해, 독립에 대해 말하기 싫었거나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말할 수 없음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뱉을 수 있었던 저항의 언어는 풍자와 비아냥의 선을 넘을 수 없었고,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저항의 행위는 ‘공공성(公共性)’ – 이 역시 일본인들이 정한 표준 위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 을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제하에서뿐 아니라 해방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공중도덕을 안 지킨 것은 그 이율배반적 표준에 대한 뿌리깊은 저항심리가 오히려 평균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하 ‘합법의 공간’이 더 넓었다면, ‘감옥’의 심리적 ․ 문화적 크기가 더 작았다면, 그 시대 평균적인‘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준거에서 구축되었을 것이다. 조선태형령이 없었다면, 치안유지법이 없었다면, 살인적 고문이 없었다면, 평균치를 추출할 모집단의 크기는 훨씬 커졌을 테니까.

우리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보안법은 접근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영역이었고, ‘보통 사람의 공간’은 그 바깥, 한참 떨어진 곳에 만들어졌다. ‘보통사람들’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말이나 행동은 물론, 저촉될 ‘우려가 있는’ 말이나 행동도 해서는 안되는 세계로 내몰렸고, 그 안에 고립되었다. 인민이나 동무는 물론 노동자, 민주주의, 평화통일, 독점자본 같은 단어가 한꺼번에 또는 번갈아 금기의 단어가 되어 버렸다. 국가보안법은 그렇게 ‘좁은 세계 안에 갇힌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자들은 ‘보통사람’에게 ‘국가보안법’은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듯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그 순간부터 ‘보통사람의 공간’은 서서히 확대될 것이고, ‘보통사람’의 표준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결사반대하는 자들이 정녕 두려워 하는 것은 이로 인해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고립된 세계’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3. 민족주의의 색안경과 간도 문제

일제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과 국가보안법 폐지는 모두 ‘보통 사람’의 인식 지평을 넓혀 주는 일이다. 제국주의자들과 독재권력이 편한대로 그어 놓은 금기의 영역을 줄이고, 보통 사람들의 공간을 늘이는 일이다. 그것은 집 한 평 넓히는 데에는 기를 쓰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데에는 무관심한 이 시대‘보통 사람’들의 불구성을 교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보편적 표준’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일이다. 그것은 결코 ‘민족주의적 편견’이나 ‘민중주의적 편향’에서 제기되는 요구가 아니다. 금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선이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 사이에, 군사독재 시대에는 민중과 독재권력 사이에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이, 민중이 그 선 바깥에서 불구적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 전반에 대한 집단적 체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체험과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인식태도를 민족주의라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이다. 민중주의라고 부르고 싶다면 또 그렇게 부른들 어떠랴. 집단적 체험의 틀 안에 빠져서는 ‘전체 사실관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민족주의적’ 시각이 편협하다고 주장하던, 그래서 식민지 시대를 ‘청산’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부조리하다고 목청을 높이던 지식인들과 기자들이 ‘간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공공연히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동조하는 기묘한 현실이다.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면 비애국적이고, 반민족적인 인간으로 매도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간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우리 연구회 회원들조차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식민지 시대의 집단적 체험과 그에 대한 기억을 총체적으로 부정한 발언에 ‘용기 있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은 있는데, 우리의 집단적 체험과 무관한 ‘가상의 현실’을 공박하는 ‘양식 있는’ 지식인은 왜 없는가.

수구 언론들은 마치 우리가 간도를 영유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식민지 시대에 우리 민족이 입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가공의 산물’인 양 취급한다. 과연 그러한가. 간도가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우리 영토라는 주장은 그를 뒷받침할 충분하고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며칠전 조선일보는 ‘지도 한 장’을 꺼내 들고,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텍스트는 그것이 생산된 상황과 관련해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의 편린을 보여준다. 사진이나 지도, 숫자처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일보 직원들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체험 속에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영삼의 단식’을 ‘정치인의 식사문제’로 써 보았고, 전두환을 ‘희대의 영웅’으로 미화해 보았으며, 이회창 얼굴은 미소짓는 사진으로, 김대중 얼굴은 찡그리는 사진으로 실어 보았다. 누가 왜 그랬냐고 물으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 지도가 생산된 ‘상황’은 아무 거리낌 없이 외면하고 있다.

지도에는 분명 간도가 조선 땅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는 모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들의’ 지도를 증거자료로 삼아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려면, 먼저‘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인정해야 맞지 않는가. 지도에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로 ‘명확히’ 표시되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백두산 정계 직후에 조선 정부에서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이 청과 외교문제로 비화될까 보아 우려했던 일이다. 정계비를 세울 당시에는 청이나 조선이나 그것이 두만강의 지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백두산 정계비만을 근거로 국경을 그을 양이면, 왜 간도만 우리 땅이라고 하는가. 토문강은 송화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송화강은 다시 흑룡강에 합류한다. 1898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이 주장한대로, 지금 아예 흑룡강 동쪽 전체와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해야 맞다.

그들은 또 ‘간도협약’을 무효로 하고 이 지도를 ‘근거’로 하여 우리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이다.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에 무효 선언을 하였기에 무효이며, 1962년 조중변계조약이 간도협약 무효화를 기초로 체결되었기에 무효이다. 지금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선은 간도협약 당시의 국경선이 아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이기에 조선의 외교 문제와 관련된 통감부의 모든 정치적 ․ 행정적 ․ 군사적 조처 역시 무효이다. 당연히 통감부나 일본 군부가 대륙침략의 의도를 품고 만든 이 ‘지도’ 역시 무효이다. 이미 무효화된 협약을 다시 무효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식의 소산인가, 의도된 언술인가.

나는 간도가 ‘우리 땅이 아니다’라고 단언할 생각은 없다. 간도에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의 군현이 설치된 적이 없었지만, 조선측에서 그린 어느 지도에도 간도가 우리 땅으로 표시된 바 없지만, 조선과 청의 국경문제는 양측의 합의에 의해 정리된 바 없다. 따라서 다시 협의할 여지는 있다. 다만 한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북-중 국경 조약이 무효이고,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해서 바로 간도가 ‘우리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간도를 ‘분쟁지’화 할 수는 있지만, 바로 우리 영토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간도 문제’를 이슈화하는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속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과거사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 미래의 우리 영토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할 때다”, “우리의 당면한 적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 영토를 빼앗아 가지고 있고 우리 역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중국이다”, “북괴는 우리 영토를 제멋대로 중국에 넘겨 준 매국 집단이다”, “북괴의 매국적 행위에 대해, 중국의 무리한 횡포에 대해 할 말을 못하는 정부는 비애국적 정부이다” 등등. 좋다.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하는 사람이 남의 말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말하는 자의 ‘민족주의적’ 인식태도가 아니라, ‘정파적’ 왜곡과 날조에 있다.

인식 태도의 문제는 논쟁의 영역 안에 머물 수 있고 머물러야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들이 지지해 마지 않는 연구자들이,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기계적 중립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사실에 관한 수많은 기록과 기억들 중에서 어떤 것을 승인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거기에서 정파적 태도나 이념적 지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 자체에 대한 임의적 왜곡이나 날조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해석자의 권리는 사실 관계 안에 국한된다.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순간, 역사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어지러운 ‘주장’들의 집합체가 되어 버린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범죄이다.

우리의 집단적 체험에 기반하여 형성된 ‘민족적 태도’는 과거 사실관계를 이해하는 데 순기능을 하지만, 우리의 집단적 체험과 무관하게 조작된 ‘민족주의적 태도’는 과거 사실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같은 태도는 ‘애국적’이기만 하다면 사실을 마음대로 날조하고 왜곡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정작 비난해야 할 것은 조선일보류의 민족주의적 태도이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민족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 이상 제국주의의 침략에 희생된 민족이며, 그 속에서 반침략주의, 반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평등주의의 가치관을 내면화했다. 침략주의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적 민족주의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일본의 민족주의였으며, 그 일본 제국주의에 기생한 파렴치한 반민족행위자들의 ‘민족주의’였다. 지금, 조선일보는 황국신민의 총후보국을 외쳤던 과거의 ‘족쇄’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족쇄에 묶인 채로 다시금 과거의 범죄행각을 답습하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