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만난 역사] [Prologue] 골목길에서 만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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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골목길에서 만난 역사

 

김성희(중세 2분과)

 

골목길은

  큰 강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가 산과 들을 이리저리 누비며 아름다운 풍광을 엮어내듯, 큰길에서 갈라져 나와 아담한 집들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작은 길은 우리네 삶을 한 폭으로 엮어주는 씨실이며 날실입니다.

자연스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낸 골목길에서, 우리는 그 길을 오가던 많은 이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그 길로 오가던 동리에 반듯반듯한 아파트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선인들과 우리의 삶을 이어주던 골목길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켜켜이 쌓인 세월과 함께 말이죠.

이미 많이 헐리고 묻혀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곁에는 걸어 볼 만한 골목길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한 번만 더 시선을 준다면 그 길을 보게 될 것이고, 한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그 길을 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잊기 전에, 더 잃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내딛어 보려 합니다.

골목길에는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하루는 바삐 흐릅니다. 치열한 일상에 치여 지쳐가는 심신을 위로하고자 우리는 저마다의 여유를 찾아 발길을 돌립니다. 서울이라는 유서 깊은 도시의 둘레에는 고금을 통하여 풍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내사산(內四山)이라 일컬어지는 백악산·인왕산·낙산 그리고 남산 자락이 그곳입니다.


<그림 1>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속 인왕산 일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울창한 수목과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시냇물, 시원한 바람과 그 바람이 머무는 바위가 어우러진 그곳에는 풍취를 즐기던 선인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부분이 도시의 확장이라는 막대한 힘 앞에 하릴없이 스러져 버렸기에 요행히 소멸을 피한 희미한 기억만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도원경桃源境이라고도 불렸던 이 아름다운 도시의 자락들이 언제부터인가 회색으로 뭉뚱그려진 도시의 낡은 구석으로 전락하면서 풍류객들의 익숙한 발걸음도 차츰 잦아들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의 바쁜 하루를 이어가는 많은 이들이 하나 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기 시작하면서, 그 분주한 발길이 만들어낸 골목길이 회색빛 산자락을 새로운 이야기로 수놓기 시작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한 자리에서 보낸 산의 우직함 덕분인지, 그 품에 안겨 자라온 산 아래의 마을에서는 도시의 다른 공간에 비해 느긋한 시간이 흐른 듯합니다. 자유롭게 뻗어나간 도시의 옛 거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곧게 펴이는 사이, 재개발의 거센 바람도 비켜간 산자락의 골목길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을 그대로 머금고 있습니다.


<그림 2> 인왕산 자락, 종로구 필운동 일대의 골목길 ⓒ김성희

  늘 바쁘게 달려야만 했던 우리의 삶에 더 많은 쉼표를 더하려는 노력 덕에 그간 차창 밖으로 무심히 건너다보던 도시의 낡은 구석에도 찬찬한 시선이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삼 느끼게 된 옛 시가의 고즈넉한 정취와 새롭게 더해진 세련된 손길이 한데 어우러져 산자락의 골목길은 새 얼굴을 얻어가고, 그 얼굴을 만나려는 발걸음도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골목길로

  도시를 둘러싼 듬직한 울타리와 그 자락의 정겨운 골목길에는 세월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기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골목골목마다 깃든 선인의 흔적을, 시간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은 경복궁 서쪽, 사직단 뒤쪽의 인왕산 자락에서 시작되어, 백악산・낙산 자락을 거쳐 옛 서울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여유 있게 돌아본 후 남산골에 이르러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 골목길 곳곳에 숨어 있는 멋진 찻집과 맛난 밥집, 재기 넘치는 공방과 예술이 흐르는 화랑 등에 들러 가쁜 한숨을 돌리려 합니다. 물론 골목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지점, 집과 집이 만나는 구석구석을 찾아 선인들이 머물다간 집터, 그들이 새겨놓은 바위 글씨 등을 직접 확인하는 본래의 목적도 게을리 할 수 없겠죠.

조만간 게재될 “골목길에서 만난 역사” 첫 편에서는, 이미 만원이 되어버린 삼청동과 북적대는 북촌을 피해 세련된 발걸음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인왕산 아래 서촌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을 기웃거리며 아무개네 집 담장 아래에, 그 옆집 대문 한 편에 숨어있던 옛 사람의 흔적들과 반가운 눈인사를 나누고 온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림 3> 종로구 청운동 일원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 글씨 ⓒ김성희

 

<필자소개>
필자인 김성희 선생님은 현재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에서 조선후기 정치사회사로 박사를 수료하였습니다. 주된 관심분야는 18~19세기 조선인의 자아 및 시대인식이며 대표 논문으로는 <조선후기 민중의 유교윤리 전유와 사회의식 성장>(사학연구 106호, 2012)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