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폐허를 지키는 사신, 고산리1호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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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지키는 사신, 고산리1호분 벽화

전호태(고대사분과)

 자그마한 중국의 시골도시, 고구려의 흔적이라고 일컫는 수많은 돌무더기들. 20여 년 전 집안을 방문했던 외지인들의 눈에 비친 고구려 두 번째 서울의 풍경이다.

  콘크리트 고층건물들이 삐죽거리며 솟아 있는 회색빛 근대도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석조기념물들. 적막한 잿빛 거리와 빌딩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옛 석성의 잔해들. 최근 몇 년 동안 평양을 방문한 남쪽 역사학자들이 마주친 고구려 세 번째 서울의 현재 모습이다.

  668년 9월, 왕이 죄인의 모습으로 신라와 당나라 장군들 앞에 나와 항복의 예를 올린 뒤, 평양은 버려진 도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집안 역시 고구려 제2의 도시로서의 번영을 뒤로 하고 서서히 잊혀져갔다.

  당군이 고구려의 주요도시들을 접수하고 도시의 유력자들을 전쟁포로로 붙잡아 당의 내지로 보낸 뒤부터 평양이나 집안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고, 멸망한 제국 고구려의 흔적은 한꺼번에, 혹은 차례차례 지워져갔다.

  국가가 관리하던 관사와 기념물들이 불타거나 훼손되었고, 역대의 귀중품들은 철저히 약탈되거나 도적질 당했다. 전쟁의 불길, 군마의 함성과 발굽이 여러 차례 이런 도시들을 휩쓸고 지나갔고 인적은 점차 드물어졌다.

  흙무지의 한 변 길이만 20m가 넘는 대형 흙무지돌방무덤인 고산리1호분은 평양의 대성산성 기슭에 있는 여러 기의 벽화고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대성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산동고분군은 약 20여 기의 흙무지돌방무덤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6기가 벽화고분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일대의 다른 고분들처럼 돌방 안에 벽화가 그려진 고분들도 모두 무덤칸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668년의 고구려와 나당 연합군 사이의 마지막 전쟁 당시 대성산성 일대에서 벌어진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의 전투를 전후하여 이 일대의 고분들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고, 고구려 멸망 뒤 왕실과 귀족무덤에 대한 도굴이 극성을 부리는 와중에 이들 유적이 망가뜨려졌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무덤의 흙무지는 파헤쳐지고, 돌방의 벽과 천장을 이루던 석재들은 깨뜨려졌다. 무덤칸 안의 시신이 훼손되고 돌방 안에 껴묻었던 귀중한 물품들이 도적질 당했음은 되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고산리1호분도 대성산성 일대의 다른 고구려 고분들과 같은 수난을 겪었다. 무덤칸의 천장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벽체도 바닥에서 1.5m 정도만 남고 그 윗부분은 모두 없어졌다. 무덤칸의 벽과 천장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남벽의 문지기 장수, 동벽과 서벽의 청룡, 백호, 북벽의 쌍현무 뿐이다.


(그림1) 고산리1호분 벽화: 청룡 

  벽면 중단에 가로로 길게 부전무늬띠를 그려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고 위에 청룡, 백호, 쌍현무 등을 그린 것으로 보아 문지기 장수 위로 주작을 그렸을 것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벽의 네 모서리에 자색기둥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벽과 천장부의 경계에 주두와 도리 등을 그렸을 것이나 역시 남아 있지 않다.

  천장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보이는 하늘세계의 모습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사실 하늘세계를 그렸을지 다른 무엇을 표현했을지도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상태인 현재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널방 모서리에 목조가옥의 뼈대를 그리고,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 뒤 위쪽에 사신을 배치하는 등 초기 및 중기 고분벽화 제재구성상의 특징적 요소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고산리1호분의 벽화 주제는 사신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덤구조나 벽화구성으로 보아 5세기 후반의 늦은 시기, 아마 5세기 말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고산리1호분은 전형적인 사신도무덤으로 진입하는 단계의 벽화고분이라고 하겠다.

  벽체의 일부만 남은 이 비운의 고분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청룡과 백호의 머리 앞에 쓰인 묵서(墨書)이다. 세로 줄이 여러 개인 황색 편지지 형태의 구획된 칸 안에 글을 써 넣었는데, 청룡 앞의 묵서에서는 “□神光難□□□進力”, 백호 앞에서는 “白神□□遠洛吉□”등의 글귀가 확인된다.

  이외에도 글자가 더 있었음이 확실하나 획의 일부만 남아 있거나 흔적만 보이는 정도여서 어떤 문장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백신(白神)의 중간 부분 테두리선 바깥에 ‘虎’자를 작게 덧써 넣어 ‘백호신’임을 알게 한 것으로 보아 청룡 앞 묵서는 ‘(靑)神’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문장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면 고분벽화 속 사신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고산리1호분과 무덤구조는 다르나 널방의 사신 배치 방식이 비슷한 고산리9호분 역시 천장부는 아예 없어지고 벽체만 일부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림2) 고산리9호분 측면도

  벽화는 널방 동벽 장식띠 위의 청룡의 몸체 일부분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고산리1호분이 파괴되던 때에 고산리9호분도 파헤쳐지고 무덤칸 내부가 훼손되었을 것이다. 벽화마저 제대로 남지 못한 고산리9호분에 비하면 고산리1호분은 청룡, 백호, 쌍현무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역사 인멸’의 손길을 덜 탔다고 할 수 있다.

   폐허상태로나마 무덤의 남은 부분이라도 지켜내려는 사신의 힘이 작용했다고나 할까. 무자비한 도굴과 파괴를 겪고 난 뒤 1400여 년 세월의 흐름을 다시 견뎌냈다는 사실을 이외에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