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고려 문인들의 모임, 죽림고회에서 해동기로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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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인들의 모임, 죽림고회에서 해동기로회까지

고려시기 문인들의 모임으로는 잘 알려진 것으로 명종 때 이인로(李仁老: 1152~1220) 등이 중심이 되었던 죽림고회(竹林高會)와 그 보다 조금 뒤인 신종 때 최당(崔讜: 1135~1211)이 결성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가 있다. 이 두 모임은 모두 무인집권기에 문인들이 시를 지으면서 일종의 여가생활을 보내기 위해서 만든 모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죽림고회가 세상에서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아서 생긴 한적함을 달래고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인 반면 해동기로회는 고관대작을 지내 뒤 은퇴한 원로들의 모임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출세에 목마른 청년 문인들의 모임, 죽림고회

명종 때 문인들의 모임인 죽림고회에는 이인로, 조통(趙通), 임춘, 오세재,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 7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들은 망년우가 되어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항상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고 한다. 죽림고회는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은거하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완적(阮籍), 혜강(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 죽림칠현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죽림고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림칠현과 같이 자의로 관직을 멀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관직에 나아가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죽림칠현과는 달랐다. 죽림고회가 결성되었을 때 이인로와 조통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간 상태였지만, 임춘은 급제를 못하였고, 오세재는 급제는 했지만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문재가 뛰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쓰이지 못한 울분을 이렇게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보내면서 출세할 꿈을 버리지 못했다. 이중 이인로와 조통은 어느 정도의 꿈을 이루었지만 임춘과 오세재는 요절하는 비운을 맞았다.

은퇴한 원로들의 모임, 해동기로회

은퇴한 관리 곧 원로들의 모임을 기로회라 하는데, 9명의 노인이 모였다하여 구로회(九老會)라고도 하고 중국의 고사에 따라 진솔회(眞率會)라고도 하며 기영회(耆英會)라고도 한다. 그 중 구체적인 기록을 남긴 것이 최충헌 집권기 때인 신종 때 최당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해동기로회’이다. 이 모임은 중국 당나라 때 백낙천이 주도했던 ‘낙중 구로회’와 송 나라 때 문언박이 주도한 ‘진솔회’를 모범으로 삼았다. 신종 초 최당이 재상으로 치사한 후 숭문관 남쪽 영창리에 쌍명재를 지은 후, 이곳에 은퇴한 관리들이 모여서 날마다 시와 술, 거문고와 바둑으로 즐기면서 해동기로회가 만들어졌다.

[그림1]김홍도, 기로세련계도. 1804년 송악산 아래 고려궁궐터에서 열린 개성 기로들의 잔치모습을 그렸다. 그림 아래에는 발문과 64명의 이름과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기로회는 아무나 만드나?

해동기로회에 참여한 9명은 주도자인 최당을 비롯하여 그 동생인 최선(崔詵), 장윤문(張允文), 고영중(高瑩中), 백광신(白光臣), 이준창(李俊昌), 현덕수(玄德秀), 조통(趙通)이었으며, 박인석(朴仁碩)은 나이가 차지 않아 정식 회원이 되지 못하고 배석하여 기록을 맡았다 한다. 이들의 면모를 조금 더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주도자인 최당은 명종 초 재상을 지낸 최유청의 아들로서 신종 초 재상으로 치사하였다. 그 동생 최선은 신종 때 과거를 주관하였고, 신종 7년 최충헌이 사제에 불러 내선의 일을 밀의할 정도로 최충헌의 측근이었으며, 죽은 후 희종묘에 배향되었다. 동궁시독학사를 지낸 고영중과 판비서성을 지낸 백광신 역시 신종 때 과거를 주관하였다. 한편 수사공으로 치사한 이준창은 어머니가 궁인 출신이어서 5품이 한직이었지만 3품에 제배되어도 대간들이 위축되어 감히 그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그 역시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국자감대사성으로 치사한 조통과 박인석은 신종 초 경상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또 현덕수와 이세장 역시 당시 재상에까지 올랐다. 이들은 최충헌 집권기에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들로서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를 주관하였다. 특히 최선은 최충헌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들은 최충헌 집권기의 ‘문치정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최당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유자량(庾資諒)과 금의(琴儀도 기로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역시 최충헌 집권기에 현달했던 인물이며 특히 금의는 한 때 인사권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해동기로회도라는 그림을 남긴 사연은?

이들이 해동기로회를 만들어 활동한 시기는 최당이 은퇴한 신종3년부터 최선이 참여한 희종 2년 정도까지인데, 이 때 이들은 최당의 쌍명재에 모여서 시와 술, 거문고와 바둑으로 즐기자 사람들이 이들을 지상의 신선이라 불렀다 한다. 최당 등은 자신들의 활동을 ‘해동기로회도’라는 그림으로 그리고 그 도형을 돌에 새겨 자신들의 활동을 후세에 남기려고 하였다. 비록 그 그림은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이인로의 글에 따르면 이전(李佺)이라는 화공이 그린 ‘해동기로도’에는 창안에 흰 머리털, 가벼운 갖옷에 늘어진 띠, 거문고와 바둑, 시와 술에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누워있고, 구부린 여러 모습의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하니, 그 모습은 지금 남아있는 조선후기의 군선도(群仙圖)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또 최해(崔瀣: 1287~1340)의 글에 따르면 신종 때 처음 그린 ‘해동기로회도’에는 조통이 글을 썼으며, 희종 때 최선이 참여하게 되자 최선의 상을 본래 기로회도 안에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그림으로도 그리고 또 돌에 새겼다니, 요즘으로 말하면 사진도 찍고 비디오 촬영도 한 셈이다. 그 결과 최당이 주도했던 ‘해동기로회’는 원간섭기 기로회의 모범이 되었으니, 그것은 최해가 쓴 글에서 확인된다.

[그림2] 설악산 비선대의 각석. 10명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있다.

단순히 술만 마시고 시만 썼을까?

이들 문인들의 모임에서는 세상일을 잊고 술을 마시면서 시만 지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죽림고회에 참여한 대부분이 관직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은 정국동향이나 구직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이들의 대부분은 술과 시로써 젊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해동기로회에 모인 퇴직관리들은 세상일을 잊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음악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이들은 최씨집권기에 고위관직을 지낸 원로였기에 당시 사회가 태평성대가 아니었음에도 시주를 일삼으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정치에 대한 한(恨)은 적어서 비교적 한가한 여가생활을 즐겼을 법하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정국동향에 관심을 가졌고 더 나아가서 정국에 일정한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죽림고회와 해동기로회의 모임이 모두 개경에서 이루어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두 모임에 모두 참가한 사람도 있었으니…..

죽림고회에 참여하였던 사람 중 해동기로회에도 관여한 사람이 2명 있으니 바로 조통과 이인로이다. 조통은 해동기로회의 회원이 되었으나 이인로의 경우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모임에 참여하여 시문을 함께 하였다. 조통은 명종 때 등제한 후 문한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한 때 금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구류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벼슬이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에 이른 후 기로회에 참여하였고, 이인로 역시 명종 때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감 우간의대부에 이르렀으니, 두 사람은 모두 무인집권기라는 사회에서 잘 적응한 문인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이인로는 죽림고회를 주도하면서 쓴 글을 [파한집] 이라는 책으로 묶어 당시 문인들의 행적을 정리한 데 이어, 해동기로회에 참여하여 여러 기로들 사이에서 지은 시문 100여수와 그 동안 모임의 일을 자세히 묘사한 글을 [쌍명재집]으로 엮었다 하니 당시 문인으로서의 소명은 다한 셈이다.

(중세1분과, 박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