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고려시대 개경 여인 ‘염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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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개경 여인 ‘염경애’

여자가 이름을 갖는다는 것

최근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을 남녀차별 문제가 해소되는 의미 있는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의 목소리도 있지만, 신라시대 세 명의 여왕이 나온 이래 여성으로서는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직책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그 상징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공직사회에 취임하여 공적인 업무를 보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부분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대부분 남성의 역할을 보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국가가 성립된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신라시대 3명의 여왕이 등장했던 것은 그것이 ‘국왕(國王)’이라고 하는 특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딸로서,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아내로서,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어머니로서 존재하였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독자적인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고려시대에도 “나라의 풍속에 따라 (여자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자의 이름은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실제 고려시대 여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경우는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봉성현군 염씨’인가, ‘염경애’인가

1148년(의종 2) 예부낭중 최루백은 2년 전에 죽은 아내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한 23년의 세월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묘지명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최루백은 자신이 직접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아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죽은 아내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통 6년 병인(1146년)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의 처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 염덕방의 딸이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다.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받들었다.  — 내가 고을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거리끼지 않고 함께 천리 길을 가고,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는 가난하고 추운 방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주었으니, —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 간의 일들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최루백은 아내의 묘지명에다 둘이 함께 한 23년의 세월을 그리워하면서 아내의 이름을 적었다. 다른 사람이 묘지명을 지었다면 분명히 “봉성현군 염씨”라고만 적었을 것이었다. 최루백에게 있어 자신의 아내는 단지 ‘봉성현군 염씨’가 아닌 ‘염경애’였던 것이다. 최루백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아내의 묘지명을 끝맺었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노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 딸 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장가를 갈까, 시집을 갈까

현재 우리나라는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丈家)’ 즉 ‘장인의 집’에 간다고 하고,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시집’ 즉 ‘시부모가 있는 집’에 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시집’과 ‘장가’를 간다면 둘은 영원히 따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남자가 ‘장가’를 가든, 여자가 ‘시집’을 가든 한 가지만 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시집가는 날’이라는 영화 제목도 있듯이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자는 혼인식을 치르기 위해 ‘장가’에 갔다가 3일 정도 머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장가’는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려시대에는 남자가 ‘장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혼인식 역시 보통 여자의 집에서 치렀고, 이후 한동안 신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길렀다. 따라서 자식들 상당수는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혼인을 하면 남자가 처가로 갑니다.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존하니, 장인, 장모의 은혜가 부모와 같습니다”(이규보), “고려의 풍속은 아들과는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딸은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니, 무릇 부모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주관합니다”(이곡) 등의 말이 빈 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권리, 같은 의무

고려시대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3-4명의 자녀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불교가 정서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적었으므로 남아선호사상이 통하지 않았다. 사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조선시대와 같이 조상의 제사를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에도 굳이 아들만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딸들도 돌아가며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권리, 의무상에 있어서 고려시대에는 아들, 딸 간의 차별이 크지 않았다. 우선 재산이 아들과 딸 구분 없이 균등하게 상속되었다.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받았으므로 의무도 균등하게 주어졌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부모를 모시는 것은 아들과 며느리뿐 아니라, 딸과 사위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의무였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다. 부모가 죽고 난 뒤 지내는 제사 역시 아들 딸 뿐만 아니라 딸들도 돌아가며 모셨다.

여성에게 재산이 균등하게 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번 정해진 여자의 재산은 결혼 후에도 따로 구분되어 보호받았다. 여자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노비 역시 남편 밑으로 넘어가지 않고,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있었다. 여자가 재산을 물려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그녀의 재산은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혼을 할 경우에도 여자는 당연히 자신의 재산을 다 챙겨서 나갈 수 있었다.

이혼과 재혼, 그리고 수절

상대적으로 평등하였던 부부관계에서는 이혼도 그만큼 잦을 수밖에 없었다. 남녀의 애정에 문제가 생기면 억지로 참고 사는 것보다 이혼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를 보고 “고려인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조롱하였으나,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평가가 오히려 가소로울 것이다.

이혼은 재혼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다. 고려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고 수절을 강요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고려 여성의 재혼에 큰 제약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자(義子)가 있다. 의자는 재혼한 여성이 전 남편에게서 낳은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사회 진출에 있어서 거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왕의 부인 중에도 재혼녀가 있었다. 충숙왕의 다섯 번째 왕비인 수빈 권씨는 원래 전형이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는데, 충숙왕이 이혼시키고 결혼하였다. 충렬왕의 세 번째 부인인 숙창원비도 과부였다. 충선왕의 후비인 순비 허씨는 이전 남편에게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충선왕가 결혼한 후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았다.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시키자는 주장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때에 비로소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일반 여성의 재혼을 금지시키자는 것은 아니었고, 6품 이상 관리의 아내에 대해서 재혼을 제약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이것은 여자의 재혼 금지보다는 수절의 장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과전법을 시행하면서 ‘수신전(守信田)’이라는 명목으로 남편이 사망한 후 재혼하지 않고 수절(守節)하는 여성에게 반대급부를 제시하였지만, 얼마나 효과를 보았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보편화되었던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시대의 남녀관계는 상대적으로 평등하였다. 그렇다고 고려시대에 현대 사회와 같은 평등사회, 적어도 평등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에 비해 이혼과 재혼은 자유로웠지만,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많았다. 재혼의 경우도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 남성의 재혼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여성의 재혼은 선택이었다. 조선시대와 같은 법적인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개경에 살고 있던 고위 관리의 아내에게 재혼은 그다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현대사회는 법적으로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한다. 이는 사회 관계에 있어서나, 가족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얼마 전 부부관계에 있어 ‘(여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논란이 되었을 정도로, 실제 평등한 관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수십 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한 이혼도 아직까지 남성의 이혼은 적극적인 데 비해, 여성의 이혼은 소극적인 선택의 경우가 많다.

염경애를 잊지 못하겠노라고 믿음으로 맹세했던 최루백은 그 후 재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그와 비슷한 경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배우자와의 사별 후 자신의 행복을 찾아 새로운 배우자를 찾는 것은 당연한 법적 권리이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도 여성이 당연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 고려사회에서 그것이 당연한 법적 권리로 인정되었는지는 않았다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가 변화하는 한 단면을 되새겨 보게 하고 있다.

 

오영선(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