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의 물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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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물줄기

산과 강

물은 산에서 발원하여 산과 산 사이를 구비구비 흘러 내를 이룬다. 산 있는 곳에 물이 있고, 작은 물줄기는 모여 강이 되며, 모든 물줄기는 산세에 따라 형성된다. 개경의 경우도 그렇다. 조선후기의 책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개경의 산세는 예성강과 임진강 중간을 지나는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에 속한다. 즉 개경은 백두대간에서 비롯한 임진북예성남정맥의 끝자락인 천마산, 송악산, 진봉산의 맥에 자리하고 있으며,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은 위로는 대흥산성이 있는 성거산과 천마산으로 연결되고 아래로는 진봉산으로 이어진다. 개경내부는 주산인 북쪽의 송악산, 서쪽의 오공산, 남쪽의 용수산, 동쪽의 부흥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고려 현종 때에는 이 4산의 구릉에 나성을 쌓았다. 이 나성 안이 개경의 기본 영역인데, 이곳은 동남쪽을 제외한 사방이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 4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개경중심부에서 만나 동남쪽으로 흘러 사천을 이루어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개경을 둘러싼 예성강과 임진강

* 개경주변의 산과 강(KBS역사스페셜팀 제공)
개경의 서쪽에는 예성강, 동남쪽에는 임진강, 남쪽에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한 조강이 서해로 흐른다. 서해로 흘러나가는 이들 큰 강은 조세를 운반하고 외국과 교역하는 중요한 해상수송로였다. 특히 예성강은 고려가 서해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일찍부터 예성강에 벽란도라는 항구가 발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예성강 하구의 서강(西江)은 임진강 하구의 동강(東江)과 함께 조운을 통해 운반된 세곡이 집결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개경은 서해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거나 남쪽의 세곡을 운반하는 것이 조선의 한양보다 유리하였다. 반면 개경은 임진강과 한강을 국토의 동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이용하였지만, 이 점은 한강을 직접 끼고 있는 한양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였다. 전체적으로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합하여 서해로 흘러나가는 강화도 북단 해안은 고려의 건국이래 정치, 경제, 교통, 군사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남북분단으로 그 가치를 잃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개경내부의 물줄기

* 조선후기 지방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 번호는 필자가 씀.
이제 개경 내부의 물줄기로 눈을 돌려보자. 북쪽의 송악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배천(白川;3)과 서쪽의 오공산과 남쪽의 용수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앵계(鶯溪  – 烏川;4)가 개경  내부의 중심 물줄기인데, 이 두 물줄기는 개경 중심부인 십자가의 동남쪽에서 만나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개경의 동북쪽 부흥산 자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善竹橋水;5)와 합하여 나성의 동남문인 보정문(장패문)의 수구문을 빠져나간다. 이 물줄기는 다시 나성 밖 동북쪽의 오관산, 용암산 등지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6)와 나성 밖 남쪽의 부소산, 진봉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웅천(熊川;7)과 만난다. 이렇게 합쳐진 물줄기가 바로 사천(沙川;8)인데, 사천은 계속 동남쪽으로 흘러서 장단의 보봉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분지천(分地川;9)과 만나서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사천은 개경 동남부에 형성된 평야지대의 중요한 수원이 된다.

송악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줄기, 배천(白川)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송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배천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배천은 송악산 서쪽 광명동에서 만월대를 관통하여 내려오는 물줄기(1)와 송악산 자하동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2)가 개경 황성 정문인 광화문 남쪽의 흥국사 근방에서 합쳐진 것인데, 이것은 오천(烏川;4)과 만날 때까지 남쪽으로 흐른다. 한편 1번 물줄기를 고유섭은 서천 이병도는 광명동수라 하였는데, 이 물줄기는 황성의 광화문 안쪽에서 궁궐 북쪽의 조암동 쪽으로부터 황성 동쪽을 관통하여 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북천, 조암동 북대천;1-1)와 합하여 동쪽으로 흐른다. 황성 동쪽 왕의 휴식공간이었던 동지(東池)는 바로 북천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2번 물줄기는 송악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2-1)와 입암동 노군교 근처에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1번 물줄기와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배천이다. 배천이라는 이름은 물이 맑아서 붙여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이지 않고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송도지]에 처음 나타난다. 배천은 고려시기 시전(市廛)이 형성되어 있던 남대가와 거의 평행선을 그리면서 남쪽으로 흘러간다.

앵계가 저교를 지나면 오천이 된다.

개경내부의 중요한 물줄기 중의 하나로 앵계가 있다. 앵계는 개경 서쪽의 오공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앵계는 개경의 남북 간선도로와 만나는 곳에 있던 저교(猪橋)라는 다리를 지나면 이름이 오천으로 바꾼다. 꾀꼬리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물줄기 앵계가 돼지다리(저교)를 지나면 시커먼 똥물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저교 밑에 가축시장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물줄기와 배천이 만나는 곳보다 조금 하류에 탁타교(橐駝橋)가 있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다리의 옛 이름은 만부교(萬夫橋)였으며 조선초에는 야교(夜橋)라고 불렀다 한다. 바로 고려초 태조가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 곳이다. 한편 고려 명종 때 이의민이 탁타교에서 저교까지 둑을 쌓고 버들을 심자 사람들이 이곳을 새길(新道)이라고 했다 하는데 이 둑은 오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앵계 주변은 물을 얻기 쉽고 풍광도 좋아서 주거지로 인기가 좋았는데 이규보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 개성의 민속여관은 이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 개성 민속여관(2003년 2월 정창현 사진)
개경 내부 물줄기의 특징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개경 내부에는 큰 강은 없는 대신 작고 좁은 물줄기가 지형상 동남쪽으로 몰려 내려가게 되어 있다. 특히 내부의 물은 구불구불 흐르지 않고 거의 일직선으로 동남쪽 방향으로 흐른다. 이러한 지세를 흔히 ‘산수동거(山水同去)’형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개경은 일찍부터 수덕이 불순하다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개경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물을 얻기 어려운 반면 비가 많이 오면 그 물이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려와 수해로 연결될 여지가 많았다고 한다. 개경의 수덕이 불순하다는 말은 이같이 지형 상 개경의 물길이 아래를 서서히 적시는 물의 본성과 배치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지형도를 보면 3번 물줄기의 상류와 5번 물줄기의 상류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해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가의 절과 탑, 비보사탑

고려건국이후에도 개경은 풍수 상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이미 수도로 정해졌기 때문에 건국 초부터 내놓고 개경의 수덕 불순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라고 하여 개경의 수덕이 서경만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불순한 개경의 수덕을 보완하기 위해서 당시 취했던 대응책이 바로 풍수 상 결점이 있는 곳에 절이나 탑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흔히 비보사탑이라 한다.

* 개국사탑.  고려초 대표적인 비보사찰인 개국사의 탑. 지금은 경복궁 뜰에 서있다.
고려초 개경에 설치된 절들 가운데는 물가에 설치된 것이 많다. 개경 내부만 보더라도 송악산 서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1)에 광명사, 일월사, 북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1-1)에 귀산사, 법왕사, 2번 물줄기에 왕륜사, 1과 2번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 근처에 흥국사, 4번 물줄기에 보제사, 개경의 물줄기가 몰려 나가는 나성 동남쪽 수구문 밖에 개국사가 설치되었다. 이런 비보사탑은 그 실질적인 기능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로서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며, 민심안정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비보사탑은 실질적인 기능도 하였다. 우선 물이 모이는 곳에 절을 세움으로써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물의 범람을 막는 둑의 기능을 하였다. 고려시기 개경 내부 천변에 둑을 쌓은 예는 오천의 저교에서 탁타교까지와 개국사 근처에서만 확인된다. 이곳은 송악산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흐르는 곳으로 장마철에는 큰물이 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상류지역의 경우 수량이 크게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물이 합쳐지는 주요 지역에 세운 절만으로도 어느 정도 제방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만, 특히 산세나 물줄기 등에 대해서는 거의 정리된 것이 없다. 이런 현상의 1차 원인은 현재 개성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의 나루에서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통해 개성에 들어갈 날이 언제가 될까?

(박종진, 중세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