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의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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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과일

그 지역에 알맞은 과일나무를 심으면, 봄에는 꽃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길 수 있으며,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자라서 재목이 되면 그것이 모두 자산을 늘리는 방법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을 중히 여겼다.

조선후기의 농서 [산림경제]의 글이다. 여기서 과일을 곡식이나 채소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의 농서들에는 당시 재배되던 과일의 종류와 그 재배방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반면에 그 이전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어떤 과일을 먹었나?

인류가 농사를 짓기 전 채집생활을 할 때 가장 대표적인 채집대상이 바로 나무 열매였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과일 역시 재배하기 시작하였겠지만 산이나 들에 있는 나무 열매 역시 중요한 식량자원이었고, 그 사실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예로부터 중요한 과일을 5과라 하였는데, 5과는 복숭아, 오얏, 살구, 밤, 대추이다. 중국 측 고대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에는 5과가 나지 않는다고 한 반면 마한에는 배같이 큰 밤이 난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복숭아, 오얏, 밤, 살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중국 고대 농서인 [제민요술]에는 과일류로 대추, 복숭아, 매실, 살구, 배, 밤, 감, 석류, 모과, 임금(능금)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소개된 과일 대부분은 그 당시 한반도에서도 생산되었을 것이다.

고려시기에도 복숭아, 오얏, 살구, 밤, 대추 등 5과를 비롯하여 배, 잣, 호두 등이 생산되었다. 우선 [고려도경]에서는 잣, 밤, 앵두(함도), 개암, 비자, 능금(래금), 오얏(청리), 복숭아, 배, 대추 등을 소개하면서, 특히 밤은 복숭아만큼 크고 달다고 하였다. 아울러 [고려도경]에서는 밤을 질그릇에 담아 흙속에 묻어 보관하는 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또 고려후기의 의서로 알려진 [향약구급방]에서도 대추, 복숭아, 밤, 감, 배, 도토리, 호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고려시기에는 이전 시기와 달리 포도와 감귤류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사진1: 밤송이(2005, 항동) 밤은 예로부터 5과의 하나로 매우 중요한 과일이었다.

과수의 재배와 기술

앞에서 본대로 과일나무를 심으면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과수재배를 권장하였고, 당시 사람들도 마을 어귀나 산기슭은 물론이고 도시의 빈터나 정원에도 과일나무를 즐겨 심었다. 고려 명종은 백성들에게 곡식뿐 아니라 밤 잣 배 대추나무 등 과수 재배를 권장하는 교를 내린 일이 있었으며, 이규보는 앵계 근처에 살면서 주변에서 뽕나무 삼나무 복숭아나무를 볼 수 있었다. 또 통재기([동국이상국집] 권23)라는 글을 보면 이규보가 서울에 사는 양응재의 집에 가보니 사방 40보(步) 남짓한 정원에 진귀한 나무와 유명한 과목들이 가까이 있는 것은 서로 닿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게 늘어서 있었으며, 포도는 나무에 감기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이것을 모두 주인 양생이 소밀(疏密)을 고르게 하여 질서가 있게 심은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렇게 고려시기에는 과수재배가 일반화되었고, 이에 따라 과수재배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규보의 접과기([동국이상국집] 권23)에는 배나무 접을 잘했던 전씨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전씨의 기술은 나쁜 배나무에 좋은 배나무 가지를 꽂아 좋은 배나무를 만드는 이른바 과수 접붙이기로 이런 기술은 배나무뿐 아니라 다른 과수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귀하신 과일, 포도와 감귤

포도는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 서역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후기의 문집에서 포도를 읊은 시문 몇몇이 눈에 띈다. 이규보는 통재기에서 양응재의 정원에 있는 포도가 나무에 감기어 아래로 늘어진 것이 영락같다고 묘사하였으며, 이색은 포도가 겹겹이 그늘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였고([동문선], 권5, 답동암선사), 포도가 시렁에 가득한 것이 마치 푸른 빛이 흐르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였는데([동문선], 권16, 신우숭덕사), 이색은 절집에 심은 포도를 보고 읊은 것 같다. 특히 이인복은 정휘의 포도헌의 시렁에 가득찬 포도 덩굴을 보고 쓴 시를 남기고 있다.([동문선], 권11, 정상국휘포도헌차운) 이를 통하여 당시 절이나 관리들의 집 정원에서 포도를 흔치 않게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청자에는 포도무늬를 상감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당시 사람들이 포도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 원에서 고려왕에게 몇 차례 포도주를 선물로 보낸 사실이 확인된다(충렬왕 11년 8월, 22년 3월, 23년 3월, 24년 9월, 28년 2월, 34년 2월). 이것은 고려시기에 포도주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2: 상감포도동자문동채주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마 전까지 감귤나무 1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는 제주의 감귤은 고려시기에도 제주에서 재배되었다. 제주의 귤은 중앙에 공물로 납부되었는데, 문종 6년에 탐라에서 바치는 귤을 100포로 정했다. 이외에도 [고려사]에는 일본과 대마도에서 귤을 바친 예가 기록되어 있다. 이 귤은 팔관회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궁궐에서 사용하였다. 장순룡은 팔관회 때 오봉루에 올라가 상위의 귤과 유자를 손으로 집는 무례한 행동을 하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으며, 명종 때 한 궁녀는 귤을 던져 관리를 유혹한 사례가 있다. 모두 귤이 매우 귀한 과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감귤에 얽힌 일화

다음은 감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충렬왕 때 전라도안찰사가 된 임정기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제주의 귤나무 2그루를 소 12마리를 동원하여 여러 날 걸려 궁궐까지 옮겼다. 귤나무를 옮기는 동안 잎과 가지가 다 말라 버려서 임정기 자신도 쓸모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충령왕 때 활동했던 곽예가 쓴 영귤수(詠橘樹)([동문선] 권11)라는 시이다. 이 시는 당시 궁궐에 심어진 귤나무를 노래한 것인데, 시기적으로 보아 이 귤나무는 바로 임정기가 가져와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곽예는 이 시에서 궁궐 정원에 뿌리 내린 귤나무의 무성한 가지, 만발한 흰 꽃, 동그랗고 노란 열매를 읊고 있으니, 가져올 당시 말랐던 귤나무가 회생한 것인지 아니면 곽예 역시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이 시를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대표적인 구황식품, 산속의 도토리

사진3: 도토리(2005, 백두대간 백학산 근처)

한편 산속의 열매들은 흉년 때 비상식품으로 매우 중요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도토리와 밤은 대표적인 산 속의 식품이자 구황식품이었다. 충선왕이 흉년 때의 백성들을 생각하여 도토리를 맛보았다는 일화는 도토리가 대표적인 구황식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극기는 전가사시([동문선] 권5)라는 시에서 산의 배와 밤은 일찌감치 거두어야 한다고 읊었으며, 이달충은 산촌잡영([동문선] 권11)에서 익은 도토리는 삶아서 밥 대신 한다고 하여 농촌이나 산촌 사람들에게 도토리가 얼마나 중요한 식량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윤여형의 상율가([동문서] 권7)는 토지탈점과 중첩된 수탈로 황폐해진 농촌에 홀로 남은 노인들이 차마 몸을 구덩이에 던져 죽을 수 없어 새벽에 마른 밥을 싸가지고 산에 올라 들짐승과 경쟁하며 도토리와 밤을 줍는 참혹한 농촌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고려시기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니, 흉년으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어야 할 때 산속의 밤과 도토리 등은 시기를 막론하고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비상식품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밤과 도토리는 요즈음 먹고 살만한 등산객들이 다람쥐와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도토리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하겠다.

(중세1분과, 박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