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정족산성과 정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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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과 정수사

홍순민(중세사 2분과)

초지에서 오면서 서편을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벌린 산이 보인다. 정족산(鼎足山). 옛날 중국에서부터 왕권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쓰이던 솥은 발이 셋인데 그 발과 같이 봉우리가 셋이라서 붙은 이름인 듯하다. 그 정족산의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돌로 된 성―정족산성이 쌓여 있다. 정족산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하는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글쎄 과연 단군과 그 아들 셋이 실재했었는지, 더구나 그 아들들이 이 성을 쌓았는지 나는 모르겠다. 확인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설은 그저 전설로 웃고 들으면 그뿐이다.

현재의 성벽은 1739년(영조 15)과 1764년(영조 40)에 다시 고쳐 쌓은 것이다.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 종해루(宗海樓)는 예의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족산성, 전등사를 갈 때는 그래서 나는 남문보다는 동문 쪽으로 올라간다. 문루(門樓)가 복원되어 있지 않은 동문쪽이 차라리 좀더 성의 옛 분위기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그 동문 안에 “양헌수장군승전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6호)가 있어 병인양요 이야기를 끄집어 낼 화두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염하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군 순무영의 천총(千摠) 양헌수는 밤중에 자기 휘하 부대를 이끌고 염하를 건너 11월7일 549명이 부대가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다. 프랑스 군이 강화를 침공한 지 한 달 쯤 뒤의 일이었다. 조선군이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프랑스함장 로즈는 부하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가벼운 무장으로 정족산성 공격에 나섰다. 정족산성 동문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에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6명을 죽이고 60-70명을 부상시켜 물리쳤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 뿐이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11월 11일 강화를 떠났다.

위의 글은 논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 “양헌수장군승전”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다. 양헌수는 나중에는 “장군”으로 승진하기는 하였지만 전투 당시에는 오늘날의 영관급쯤 되는 장교 천총이었지 장군은 아니었으며, 그 승전의 내용도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전면전에서 승리라기 보다는 측면공격 부대와 정찰대 사이의 국지적 접전이었다. 조선군의 승리, 다시 말하자면 프랑스군의 피해 상황도 프랑스측 기록에는 부상 30명으로 나오는 등 자료에 따라 다르다.

아무튼 그리 크게 평가하기에는 좀 주저되는 바가 있는 승전이지만 이곳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접전을 벌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 이곳 정족산성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염하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같은 진보들의 후방 지원 기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傳燈寺)는 그 정족산성 안에 들어앉아 있다. 삼국시대인 4세기 말 진종사(眞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고려 원종 때 중창되었으며, 충렬 8년(1282)에 그의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가 대장경과 옥등잔(玉燈盞)을 헌납함으로써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 몇차례 중수하였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선조 때 불탄 것을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대웅전과 약사전이 이 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통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눈으로는 기실 그리 볼 것이 없다.

다만 네 귀퉁이 추녀를 쪼그려 앉은 사람이 받치고 있는 조각이 특이하다. 여늬 건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이러한 조각에 대해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광해군 당시 이 건물을 다시 지을 때 일을 맡은 도편수가 아래 마을 주막에 거처를 정하고 그 집 주모와 번 돈을 맡길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그 주모가 돈을 갖고 도망을 가 버렸다. 이에 화가 난 도편수가 그 주모에 대해 복수하는 마음으로 발가벗겨 지붕을 받치고 있게 조각을 새겨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역시 그냥 재미삼아 듣고 치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 여부를 따지자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집을 짓는 책임을 도편수가 갖고 있다고 해도, 신성한 대웅전에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감히 발가벗은 사람의 형상을 깎아 넣을 수 있는가. 절의 스님들은 이를 몰랐다는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묵인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는가. 나의 상식으로는 그럴 수 없다. 그 조각상이 벌거벗은 여인상이라고 하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자세히 보시라. 완전히 벌거벗지도 않았으며 여인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네 귀퉁이 조각상의 자세도 한 손으로 받친 것도 있고 두 손으로 받친 것도 있는 등 서로 다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혹시 이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역사상(力士像)의 유제는 아닐까? 나는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까 책임질 수 없는 이런 추측을 겁없이 해 볼 따름이다.

전등사는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대찰(大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가 높은 고승들이 별반 배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압을 받아 절들이 대부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전등사가 국가의 인정을 받으며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절의 역사나 규모, 불심 때문이 아니라, 정족산성에 사고(史庫)가 들어서면서 전등사에 그 사고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등사에 가서 사고는 보지 않고 전등사만 보고 오면 본채는 보지 않고 문간채만 보고 오는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고란 각 왕대의 <실록(實錄)> 등 역사와 학문에 관련된 주요 서책들, 또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서책과 보물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원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 전주(全州) 네 곳에 사고(史庫)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통에 모두 타 버리고 천행으로 전주사고의 것만을 보존하였다. 이를 이리저리 옮겨 보존하다가 임란이 끝나자 강화 마니산으로 옮겨 이를 저본으로 하여 네 부를 만들어 강화와 원주 오대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등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던 것이다. 정족산 사고는 1660년(현종 1)에 지어 마니산으로부터 서책을 옮겨 왔다. 그 사고에 있던 서책들은 1910년 병합 직후 일제가 제실 재산으로 한 데 모아 총독부에서 관리하다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넘어 갔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초행자들은 정족산 사고 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전등사 대웅전에서 서쪽 적묵당―선방 앞으로 가면 그 남쪽 끝에 화장실이 있다. 그 화장실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정족산성의 서문 올라가는 골짜기가 나온다. 일단 그 길로 올라서서 한 30여 미터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낮은 등성이를 넘어 서서 조금 올라가면 철책을 둘러 친 빈터 앞에 스테인리스 안내판이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사고, 하나는 선원각(璿源閣) 안내판이다. 1910년 무렵 서책들이 없어진 사고는 그 직후 무너져 버리고 지금은 잡초 속에 주춧돌만 박혀 있다. 그나마 철책을 둘러치고 안내판이라도 서 있어서 찾아보는 이들이 여기가 그 터인줄 짐작이나 하게 해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전등사 대웅전 앞의 대조루(對潮樓), 원래는 강당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건물에 둘러보면 온갖 기념품들 사이에 “장사각(藏史閣)”,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고 하는 나무 편액이 대못으로 꽝꽝 벽에 박혀 있다. 뭘 이런 걸 다 파나, 하고 살펴보니 그것이 바로 사고와 선원각의 현판이다. 참으로 기막힌 보존이다.

정족산성을 내려와 다시 강화를 한바퀴 도는 여정을 잡으려면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내려오면서 왼쪽, 원래 들어왔던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온수리를 지나게 되고, 온수리 동네 가운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301번 도로를 타고 도로 강화읍으로 향하게 되고, 그냥 직진하면 301번 도로를 반대 방향으로 타고 강화를 일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일주는 완전한 일주는 아니다. 정족산성을 내려오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상면에서 화도면으로 건너가는 348번 도로를 타는 것이 완전한 일주가 된다.

348번 도로를 타고 정족산을 돌아가면 꽤 넓은 벌판이 나오는데 이쪽 길상산 산모롱이와 저쪽 마니산 산모롱이가 서로 가까이 손을 내민 듯 가깝게 보는 곳이 있고, 두 곳을 잇는 곧은 둑 위로 차도가 나 있다. 그 둑을 건너간 곳에 정미소를 비롯한 집들이 몇 채 있는 마을―사기리(沙器里) 어귀에 비석들이 대여섯 개 서 있다. 이건창(李建昌), 이시원(李是遠), 민진원(閔鎭遠) 같은 사람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따위인데 그 가운데 별다른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제목이 선두포축언시말(船頭浦築堰始末)이라고 써있다. 이곳 선두포에 언(堰), 곧 방조제 둑을 쌓은 자초지종을 적은 비석이라는 뜻일텐데 내용인즉슨 1707년 (숙종33)에 이 둑을 쌓게 된 경위, 길이가 450보(步)에 이르는 둑의 이런저런 규모와 시설, 11만 명에 이르는 역군의 규모 및 소요 물자, 관계자 명단 등이다. 선두포언 이 둑을 쌓음으로서 그 안쪽에 굉장히 넓은 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강화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지 않다. 그 까닭이 바로 해안을 따라 뺑뺑 돌아가며 이런 간척지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선두포언은 대단한 유적은 아니지만 그런 간척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서 강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두포언에서 2km 남짓 더 가면 포장도로가 끝나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1.3km 가량 올라가면 정수사(淨水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원래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처음 창건되었다 하나,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창하였다. 절이라기 보다는 전등사에 딸린 암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대웅보전”만이 오래된 건물로서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집에 조선후기 어느 때 앞으로 한 칸을 덧달아 내고 그 부분에 죈마루를 놓았다. 부처님 모신 법당에 죈마루가 있는 것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다. 죈마루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칸 네 짝 분합문은 각각 하나의 화병에서 한 줄기 모란이 올라가고 그 줄기에 핀 꽃들이 만개한 형태를 목각으로 깎아 끼움으로서 창살을 삼았다. 그 창살 앞 죈마루에 걸터 앉아 앞을 내다 보면 황해 바다가 눈앞에 망망하게 펼쳐진다. 누군가 그러길래 나는 정말 그런줄 알았다. 그래서 거기 앉아 아무리 앞을 내다 보아도 앞산 등성이만 보일 뿐이었다. 바다를 찾으려 마당가로 나서니 동남쪽으로 개펄인지 바다인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인천이 보였다. 부처님의 눈을 가져야 저 산등성이 뚫고 망망한 황해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정수사 오르던 길로 내처 올라가면 마니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흔히들 가는 상방리에서 참성단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된 길보다는 이 길이 훨씬 산의 정취가 깊다. 이곳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친근감을 인정받는 비결이 있다. 마니산이라 하지 않고 마리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곳 분들은 마니산이 아니라 머리라는 뜻의 마리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바꾸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지만 중앙지명위원회에는 아직 가결되지 않고 있다. 나로서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마니산이든 마리산이든 올라가 볼만한 산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마니산 등산은 그 자체 별도의 일정으로 추진할 일이지 강화를 한 바퀴 돌아보는 촉박한 여정의 일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