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용흥궁과 김상용 순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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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과 김상용 순의비

홍순민(중세사 2분과)

강화읍에 들어가서 대개 처음으로 들르는 곳이 용흥궁(龍興宮)이다. 강화읍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구 버스 터미널을 지나서 두 번째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차도가 고려궁지(高麗宮址) 올라가는 길이다. 그 길로 들어서서 조금 들어가면 첫 번째 골목이 강화경찰서로 통하는 뒷골목이다. 용흥궁은 그 골목 안에 들어 앉아 있다. 용흥궁―용이 일어난 궁이란 뜻일 터인데 여기서 용이란 임금, 곧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을 가리킨다.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였을 때 원범(元範. 철종의 본명)은 강화에 살고 있었다.

원범은 1831년(순조 31)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원범의 증조 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이고,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와 그 궁녀 사이의 소생 은언군(恩彦君)이었다. 은언군은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제주에 유배되는등 여러 곡절을 겪었다. 정조 연간에는 이복형이 되는 정조의 끔찍한 비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순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원범이 11살이 되는 해에 죽었다. 이러한 집안 사정 탓으로 원범은 종실(宗室)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그 처지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14살이 되던 해에는 어떤 역모 사건의 바람을 타서 전가족이 교동을 거쳐 강화에 와서 살게 되었다.

철종의 강화 생활은 반 죄인 상태였던 듯하다. 그의 <행록(行錄)>에 보면 그가 강화에 살 적에 동내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있어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언사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왕이 되고 나서 하교하기를 ‘무지한 부류에 대해 지금 문제삼을 필요가 있는가’하고 놓아 두고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당시 강화 유수가 그들을 감시하고 지키기 위해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여 집안 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었는데 왕이 되고 나서 그 사람의 이름이 승지 후보에 올라 있자 그에게 낙점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식 기록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저의는 철종이 너그러웠음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를 뒤집어 해석해서 철종의 강화 생활이 매우 곤궁하고 비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원범이 살던 집이 오죽하였겠는가. 그러나 전력이 어찌 되었든 왕은 왕이었고, 초라하든 어쨌든 그가 살던 집은 잠저(潛邸)―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가 되었다. 철종은 1853년(철종 4) 5월 ‘내가 심도(沁都. 강화의 별칭)에 대해 늘 한 번 뜻을 보이려고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강화 사람들만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를 보이기도 하였고, 8월에는 묵은 세금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하는 등 자신이 살던 강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해 3월부터 11월까지 강화 유수로 재직하였던 정기세라는 사람이 철종 잠저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새로 꾸몄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일종의 기념관인 셈인다. 철종이 살던 집 자리에는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을 세운 조그만 비각을 짓고, 그 주변 일대에 정면 7간 측면 2간의 안채, 정면 6간 측면 2간의 바깥채와 그 행랑채 등을 지었다. 그 후 1903년(광무 7)에 이재순이라는 이가 한 차례 중건한 것이 조금씩 손을 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용흥궁에 가서 무엇을 볼 것인가. 그곳에는 옛 건물이 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그 건물에서 문화재로서 가치, 웅장함과 화려함을 찾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곤궁하게 살던 철종의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 마땅하다. 더 나아가 힘없는 왕 철종과 세도정치기로 부르는 그 시기의 시대상을 그려볼 일이다. 왕의 권한은 미약한 반면, 서울의 몇몇 유력 가문으로 권력의 핵심이 옮겨 가 있던 것이 세도정치의 권력구조였다. 곤궁하기 그지없던 “강화도령”을 불러 들여 왕으로 삼은 이는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였다.

순원왕후는 당시 정치 권력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세도 가문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따님이다. 그는 철종을 윤서(倫序)상 순조의 아들로 삼았다. 이는 곧 자신이 철종의 모후(母后)가 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실에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튼튼히 다지고 자신의 친정가 안동 김문의 정치적 기반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용흥궁은 초라함이 그 본질인 바, 용흥궁의 초라함은 바로 세도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흥궁에서 다시 골목을 나와 오른편으로 고려궁지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비석 두 개를 모셔놓은 비각이 있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殉義碑)들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왕실을 모시고 강화로 피난와 있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게 되자 순절한 인물이다.

청병이 강화로 들어오는 날 김상용은 강화읍성의 남문에 화약을 쌓아 놓고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화약이 폭발하였다. 이를 놓고 김상용을 높히는 사람들은 담배도 피우지 않던 사람이 담배를 찾은 것은 자폭할 의도였다고 해석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부주의에 의한 실수였다고 평가절하한다. 지금 나로서는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이 때문에 김상용은 척화파로 유명한 그의 동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충절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이들의 충절은 조선후기 내내 안동 김씨 가문이 성세를 누리는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세도가의 핵심 인물인 김조순은 김상헌의 7대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상용 순의비는 용흥궁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세도정치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