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염하(鹽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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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鹽河)

홍순민(중세사 2분과)

조강이 흘러가는 중간에 김포군 월곶면을 왼편으로 감싸고 돌면서 강화와 옛날의 통진, 현재의 김포군 사이를 지나 인천 앞바다 영종도로 흘러드는 강, 역시 강이라고 하기보다는 해협이라고 해야 정확할 그 물줄기를 염하(鹽河)라고 한다. 조강도 물길로서 한 몫을 하였지만, 특히 염하는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에서, 더 멀리 외국에서 황해를 지나 인천 앞바다를 거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 갈 때 어김없이 지나가는 길목이다.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출발한 조운선, 상선들이 이곳을 지나 다녔고, 또 중국, 일본, 서양 여러 나라들에서 온 군함과 무역선들도 이곳을 통과했다. 그러나 지금 이 뱃길에는 조운선도, 상선도, 군함도, 무역선도 다니지 못한다. 유람선조차 뜨지 못하고 다만 새우잡이 목선들이나 몇 척 떠 있고, 인천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조그만 고깃배들 십여 척만 드나들 뿐이다. 그것도 고깃배들은 염하 초입의 김포쪽 대명리를 포구로 삼고 있고, 새우잡이 배들도 염하 상류의 강화 다리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 강화 본 섬에 배가 드나드는 포구는 열을 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고깃배 몇 척만 드나드는 곳을 제외하면 여객선이 드나드는 곳은 강화 서쪽의 석모도와 통하는 외포리와 교동과 통하는 창후리 두 곳 뿐이다. 강화의 동서남북 네 해안 가운데 조강과 염하가 죽었으니 강화도는 북편과 동편 두 해안은 완전히 죽은 셈이고, 남해안과 서해안이 살아 있는 폭이다. 살아 있다고는 해도 강화 앞 황해 바다에 고기는 줄고 쓰레기만 쌓여 가니 어획고가 쏠쏠할 리 없고, 그렇다고 여객과 물산의 왕래가 빈번한 것도 아니니 그냥저냥 근근히 살아 있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인천서 자란 40대 이상되는 분들은 ‘국민학교’나 중고등학교 시절 월미도나 화수 부두 어디쯤에서 배타고 강화로 소풍간 추억이 있는 분들이 꽤 되실 것이다. 그 때 내린 데가 어딘지, 무슨 성인지 절인지도 모르고 그저 김밥 먹고 군것질하고, 보물 찾고, 장난감 한 두 개 얻어 갖는 데만 정신이 팔렸겠지만, 이제라도 다시 들러 보면 그 내린 곳이 초지(草芝)요, 무슨 작은 성같은 곳이 초지진 돈대이고, 절은 전등사라는 깨달음이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스멀 떠 올라 오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렇게 초지는 강화 뱃길의 초입으로서 인천과 가까왔다.

근자에 보도를 보니 인천시에서 강화의 역사, 문화 유적지와 해상 관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올해 안에 월미도와 초지 사이 22km 해상에 유람선을 운항할 계획이라 한다. 여객선사인 원광코스모스 해양관광이 유람선 투입의사를 밝힘에 따라 시험운항을 하는 등 검토 작업에 착수했으며 유람선 취항에 대비, 7억원을 들여 강화 초지리에 선착장 보강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흔히 보는 홍보용 공약은 아닌 듯하다. 뱃길 염하가 다시 열리는 첫 신호인가 싶어 기대가 크다.

강화의 염하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초지 다음에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그 중 광성보가 규모도 크거니와 지세도 자못 험하다. 광성보를 이루고 있는 세 돈대 가운데 용두(龍頭) 돈대는 정히 용의 머리인 양 염하를 향해 불쑥 머리를 내민 지형의 끝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지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염하 해저로 용 이빨처럼 날카로운 바위 맥을 뻗쳐 건너편 김포 땅 덕포진으로 건너 간다. 이곳이 손돌목(孫乭項)이다.

손돌목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임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갈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태우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뱃길을 찾아 초지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일부러 험한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들을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죽기 직전 손돌은 자신이 죽은 뒤에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손돌을 죽이고 왕과 일행은 급한 김에 손돌의 말대로 하여 과연 무사히 물을 건널 수 있었다. 왕은 그제서야 손돌의 충성을 깨닫고 그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죽은 날이 음력 시월 스무날이었으므로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니 이를 손돌 바람이라고 하고,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여울을 손돌목이라고 하였다. 이 날에는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사람들은 겨울 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전설은 전설이다. 전설은 그저 재미있게 들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고려 시대에 강화로 피난 온 왕이라면 고종이겠는데, 그 고종이 굳이 이곳 손돌목까지 와서 물을 건넜을 리가 없다. 신화나 전설을 그저 재미있게 듣지 않고 굳이 분석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그 해석에 따르면 손돌이 이야기는 해마다 이맘 때면 불어오는 계절풍에 대한 민간의 신화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 이맘 때면 꼭 이렇게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누군가 원통한 일을 당하였나 보다. 원통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지배 계층일 턱이 없다. 힘없고 가난한 계층, 뱃사공이라야 제격이다. 지배계층의 민중에 대한 불신, 민중의 지배계층에 대한 원한이 이런 전설의 현실적 배경이 되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으로 대표적인 것이 고려 시대 강화 천도이다. 강화 천도가 몽고에 대한 민족적 저항인가. 글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최씨 무인정권을 비롯한 지배 계층의 저항은 될 지 모르지만 전 민족, 전 민중의 저항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최근 이 시기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이러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반과 불신이 겨울의 문턱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대한 민중의 신화적 해석과 연결되어 손돌이 전설은 생겨난 것이리라.

손돌목은 삼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뱃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험지이다. 옛날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것이 최대의 난제였다. 그래서 이 곳을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인천 앞바다에서 바로 한강으로 통하는 운하를 뚫자는 논의가 있어 왔다. 그 운하를 뚫자는 이야기는 해방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고 나오고 하더니 지금 다시 진행중에 있다. 이제는 거의 될 것같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되어야 되나 보다 하겠다. 지금 상황에서 이 운하가 꼭 쓸모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박한 생각으로는 운하보다도 염하가 뚫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